공산성 둘러보기
친구와의 설연휴 기념 산행 스케쥴 뭉게졌습니다.
녀석 얼마나 즐거운 밤을 보냈는지 상태가 메롱이라고...
그래서 오랜만에 아이들과 산행아닌 산책을 나섰습니다.
공주에 있는 산성 그래서 공산성을 찾았습니다.
공주公州라는 명칭은 고려 때 지어진 것으로,
그 전에는 웅진熊津, 웅주라고 했답니다. 웅진...
말을 풀어보면 곰나루고 옛말로 하면 고마나루 입니다.
곰나루에는 암컷곰과 한 사내의 사랑이야기가 어려 있는 전설이 있습니다. 곰의 넋을 기리고자 곰사당도 있고요.
곰나루 전설이 어찌나 유명하고 오래된 이야기인지 고을 이름에 쓰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곰(熊)나루(津)가 있는 고을(州) → "곰주"라고 우리말과 한자어가 섞여 불려지다가
가차자인 公을 써서 → 公州로 책자에 올렸다는 것이 제가 알고 있는 공주 지명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는 아래 그림의 공주산성 둘러보기 코스 중 성곽길 코스(1시간30분)를 택했고, 중간중간 쌍수정과 임류각과 같은 건물이 있을 때는 잠시 궤도에서 벗어나 둘러보았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돌아본 공산성 둘러보기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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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은 금강을 끼고 남쪽으로 산과 계곡을 따라 포곡식으로 축조되어졌답니다. 오르락 내리락 이어지는 성곽길이 주는 매력이 끝내줍니다. |
성곽과 성곽 주변 건물을 둘러본 총 거리는 5km정도 됩니다. 안내장은 1시간 30분이면 된다고 하는데, 아이들과 함께 걷다보니 2시간 17분이 걸렸습니다. |
공산성은,
백제시대의 왕성으로 능선과 계곡을 포함해 쌓은 포곡형 산성으로, 백제 22대 문주왕이 475년 웅진(공주)로 천도한 뒤, 성왕 때인 538년에 사비(비여)로 옮길 때까지 5대 64년간 백제왕이 거주했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 때에는 공주산성, 조선 시대에는 쌍수산성 등으로 불리었다고 합니다.
성은 다른 역사가 서린 오랜 성들과 마찬가지로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가 석성으로 개축되어 동쪽의 일부만인 토성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성의 둘레는 2.7km의 장방형이고, 동-서-남-북으로 성문이 나 있습니다. 성 내에는 왕궁지로 추정되는 곳과, 임류각지와 같은 백제시대이 유적과 조선시대의 쌍수정, 영은사 등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2011년도에는 연지 쪽에서 연도가 새겨진 백제시대의 갑옷과 말의 갑옷이 출토되었고,
최근 2014년도에는, 백제시대 대형 목곽고(木槨庫/창고)가 발견되어. 다량의 복숭아씨와 박씨를 비롯해 무게를 재는 석제 추와 칠기, 목제 망치 등의 생활 용품이 출토돼었습니다. 그리고 공주 공산성 저수조에서는 철갑 갑옷과 무기류가 출토되었답니다.
금서루
공산성 둘러보기의 시작은 금서루에서 시작합니다. 연문광장이 있고 무령왕릉 가는이 나누어지는 곳으로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금서루를 통해서 공산성을 찾습니다.
저 어릴적에는 차량이 다니는 차도로 이용되던 곳이었습니다. 그 차도 위로 1993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층 건물을 복원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곳에서는 웅진성수문병 근무교대식도 매4월부터 10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11:00~17:00 매시간마다 재현되고 있습니다.
웅진성에 대한 이야기나 사극에 소개되는 낯익은 사진이죠.
금서루를 통해서 성안으로 들어서면, 백제의상체험, 왕관만들기, 활쏘기 등 체험도 함께 할 수 있답니다.
아이들이 하고 싶다는 활쏘기 체험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우선 성곽을 따라서 반시계방향으로 돌아보기로 합니다.
금서루 기왓장과 맞닿은 하늘의 구름이 양털모양이네요~
공산성 깃발 이야기
공산성의 성곽길을 따라 깃발이 세워져 있습니다. 아이들이 먼저 깃발의 모양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채더라구요.
깃발은 공산성에서 서쪽으로 마주하고 있는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군의 6호분의 사신도를 재현해서 방향에 따라 깃발을 꽂아 놓았다고 합니다.
사신도는
-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태내고
- 우주의 질서를 상징하는 동물로서
-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고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성곽을 돌면서 달라지는 깃발의 모양을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보시기 바랍니다.
금서루를 지나자 가파른 길이 얼마가 이어집니다.
그러고나니 이내 시원한 조망이 보답을 해줍니다. 공주시에서 수년 전부터 잡목을 솎아주는 작업을 해준 뒤로 공산성의 아름다운 모습이 더더욱 곱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북쪽으로,
아이들과 함께 방금 들어온 금서루 누각과 멀리 전망대 두 곳과 공산정이 제법 운치 있게 보입니다.
남쪽으로 길게 이어진 성곽... 아이들이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네요.
오른 편으로는 공주 구도심이 보입니다. 지금 사진으로 보이는 ↓ 아래의 도심은 주로 산성동과 교동의 시가지 입니다.
방위로 치자면 남서서 쪽에 해당되구요.
잠시 오른 쪽으로, 그러니까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볼까요.
- 송산리고분군, 무녕왕릉이 있는 곳:
금서루로 나와서 서쪽으로 차로2~3분만 가면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7기 고분 중 6기는 모두 도굴해갔고 무령왕릉(7호)만 다행히도 우리의 손으로 발굴이 되었습니다.
고대무덤 중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몇 안되는 왕릉입니다. 무령왕릉 출토시 묘지석에 1971년 7월 5일, 제6호 벽돌무덤 내부에 스며드는 유입수를 막기 위하여 후면에 배수를 위한 굴착공을 파면서 왕릉의 입구가 드러나 조사하게 되었답니다. 지석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 5월 7일에 붕어하시고 을사년 8월 12일에 대묘에 예를 갖춰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
국보로 지정된 금제관식, 금제뒤꽂이, 금제 심엽형이식(귀걸이), 지석, 석수, 청동신수경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국립공주박물관이 대부분 보관하고 있다고 하니 꼭 한 번 들러보시길... - 황새바위: 황새바위는 황새들이 많이 앉아서 놀던 곳이라서 또는 죄인들의 목에 씌이는 항새라는 칼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고, 천주교 성지입니다. 1860년대 천주교 박해가 심하던 시절 공주에는 관찰사(충청감사)와 감영이 있었는데, 전국의 교인들이 이곳으로 붙잡혀 와 처형당했던 곳이라 합니다.
- 연미산: 산의 모양새가 제비의 꼬리 모양을 했다고 해서 연미산이라고 했다는데,
곰나루 전설의 곰모자가 살던 산으로 어른들 말씀으로는 예전에는 호랭이도 살았다고 합니다. - 정지산 유적지: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렀다는 곳이죠. 왕이 공산성을 나가 조금만 움직이면 다다를 수 있는 곳입니다.
공주 구도심은 배모양의 산의 띠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그 산줄기가 금강에서 잠시 머문다고해서 정지산이라네요.
그리고 여기서 한참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는 매의 끄트머리라고 해서 주미산이 있답니다.
다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남쪽을 바라보면 공주 구도심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직선으로 뻗은 도로는 공주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오른쪽으로 주된 흐름을 틀어 멀리 부여쪽으로 우금티를 넘어 흘러갑니다.
오른쪽 화면에 걸린 산이 두리봉 같아 보이고요, 가운데로 멀리 모이는 산이 주미산 같습니다.
쌍수정
가던 길을 제촉하다보니 왼쪽으로 쌍수정이 보입니다.
쌍수정은 조선시대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피난와 시름을 달래려고 두 나무에 기대어 마음을 달랬다고 합니다. 후에 난이 평정되고 기쁜 나머지 임금님이 이 나무들에게 정3품의 높은 벼슬을 내렸다고 하네요. 부럽다~
그리고 그자리에 누각을 짓고요.
참 인절미. 그 때 임금이 피난을 내려와 곤궁한 상태에 이르자 성밖의 한 임씨성을 가진 백성이 찹쌀떡을 설은 절편에 콩가루를 묻혀 진상을 했다는데, 그 임씨성의 백성이 준 찹쌀 떡 → 임절미 → 인절미가 되었다고 합니다.
쌍수정에서 북쪽 강 너머 멀리 차령산맥을 지나 한양땅에 마음을 던져 놓고는 아픈 마음을 달랬던 인조 임금님이 그려지네여.
쌍수정 아래에는 사적비도 있답니다.
쌍수정에서 바라본 왕궁지
80년대 중반에 2년 동안 발굴을 해서 10칸, 20칸 등의 큰 건물터와 돌로 쌓은 둥근 연못터, 목곽 저장시설 등 각종 유적이 확인되었답니다. 백제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죠.
아직은 추정 왕궁터인 것 같구요.
많은 사람들이 왕궁터 치고는 너무 작은 것 아니냐는 말을 합니다.
제 생각이지만 예전 고대를 생각하면 그리 작다고만을 할 수 없을 것이고, 이곳은 조선시대 궁궐로 치자면 대전이나 회의를 하던 조당 정도가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공산성 여기저기에 건물터가 많습니다.
성곽이 능선과 계곡과 어우러진 포곡식이 것 처럼 왕궁 건물도 창덕궁의 비원처럼 지형지물에 맞게 곳곳에 세워졌지 않았을까...
나름 공주 토박이로서 생각해봅니다.
진남루
이제 다시 성곽길을 따라 나서면 진남루를 만날 수 있습니다. 진남루는 1박2일 프로그램 촬영지이기도 합니다. 야구선수 박찬호가 매일 새벽에 이곳 금남루 옆에서 훈련을 했다는 곳입니다.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지을 때 함게 세운 누각이며, 이곳이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고 합니다.
박찬호가 열심히 토끼뜀을 하면서 올랐다는 계단입니다.
임류각
진남루를 지나치자마자 경사각이 45도 이상으로 가파라집니다. 계단이 없으면 아이들이나 노인분들은 성곽길을 따라 오르지 못할 정도의 경사죠.
그 가파른 길을 올라 숨을 조금 돌리다보면은
숲 여러 곳에 건물터가 남아 있습니다.
이 터는 "임류각 터"라고 하는데, 백제 동성왕 때의 건물로 삼국사기에는 높이가 5장(약 15m)나 되는 고층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위 사진에서 안 보이던 부분입니다.
건물터를 헤짚어 나오니 2층 누각에 임류각이라고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주로 연회 장소로 쓰였을 거라는데, 백제시대의 임류각을 복원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안내문을 좀더 꼼꼼하게 읽을 것을... ㅠ
영동루
다시 성곽길로 성실하게 돌아옵니다. 임류각에서 바로 가로지르면 금강이 보이는 성곽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건만.
이제 보이는 누각은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영동루. 무너져 없던것을 1980년대에 발굴해서 '공산지'의 2층 3칸 건물이라는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했다고 하네요.
영동루부터 성곽은 토성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토성 위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성곽이 단순한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영동루 밖 쪽으로도 건물터가 있고, 건물터를 감싸듯이 논두렁 같은 토성의 흔적이 나 있습니다.
마치 내성과 외성의 구조처럼 여러겹의 성곽구조 말입니다.
백제시대 이래오 이 영동루를 통해서 나간 반죽동 지역에 공주지역의 알부자들이 모여살던 곳이라고 하던데,
지금은 밭으로 쓰이고 있는 너른 지역 - 여기서는 안 보입니다만 커다란 건물이나 가옥이 많이 지어져 있을 법도 한 터가 펼쳐집니다.
제 모자란 생각일지 모르지만 땅을 파 보면 이런저런 유물이 나올 것 같더라구요.
오늘은 성곽길을 따라가는 여행이니 이쯤에서 생략하죠.
광복루
원래는 공북루 옆에 있던 건물인데 여기로 옮겨와 광복을 기린다는 의미로 광복루라고 개칭했다고 합니다. ㅎㅎㅎ
금강 바라보기
이제 나쪽을 바라보다가 동쪽을 바라볼 수 있게 성각이 방향을 왼쪽을 획~ 돌립니다.
앞에 보이는 작은 산 같이 생긴 곳이요.
여기가 예전에는 토성으로 아마 공산성 방어를 위해 축조된 보조성이라고 하는데 토성이라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공산성이 다른 산성들처럼 단순한 군사적 방어를 위한 산성만은 아님이 확실한 것 같죠?
멀리 월성산 봉화대도 보입니다.
이제 성곽길 돌기도 막바지에 접어드는 것 같습니다.
동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는 곳으로 획~ 왼쪽으로 성곽이 방향을 틀면서 고바위길을 넘게 만드는데,
아~ 뷰포인트입니다.
우리 집사람 曰 쉼터에 휴지통까지 있어서 좋았다는 군요 ㅋㅋ.
금강이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는데 고라니 한 마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여기저기 뛰어다닙니다.
더 요란한 아이들의 소리에 더욱 더 날뛰며 도망다니는 고라니.
고라니를 두 눈으로 처음 본 우리 아이가 잠자리에 들면서도 어떻게 고라니가 성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제게 묻더라구요. 참 인상 깊은 성곽 밟기였나 봅니다.
아래 사진은 대전방향으로 바라본 사진입니다.
멀리 금강상류... 금강물을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곳 바로 오른쪽이 우산봉이구요,
아래 사진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정북으로 보이는 신관동, 공주 신시가지 입니다.
조금더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북서쪽으로, 근대건출물인 금강철교가 보입니다. 그리고 사진 왼편으로 나뭇가지에 가려진 뾰족한 산이 아까 설명한 연미산입니다. 그러고 보니 성곽을 거의 다 돌기는 했나봅니다.
연지와 만하루
이제 내리막 길만 남았습니다. 우리 아이 曰 "아빠!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기 잘했어요." 정말 가파른 내리막 길이다. 올라오는 사람들마다 이토록 힘들줄 몰랐다는 표정이다. ㅋ
이제 연지와 만하루가 보인다.
연지는 단의 형태로 계단을 따라 내려갈 수 있고 깊이는 9m정도다. 금강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서 물을 확보하는데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여기는 연못으로 몰래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암문이랍니다.
아이들이 암문을 통해 연못으로 향합니다. 몰래 성 안팎으로 왕래를 할 수 있는 시설로 성 구조를 연구하는데 좋은 문화재라고 합니다.
만하루. 정자라고 하는데요, 보통 정자라고 하면은 각 변의 길이가 같은 정사각 또는 팔각, 육각정인데 여긴 성벽의 누각처럼 지어 놓았습니다. 비상시에 군사용으로도 활용하기 위해서 그랬나 봅니다.
영은사
대웅전은 도지정유형문화재라고 합니다. 세조 때 지은 사찰인데, 임진왜란 때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답니다. 광해군 때에는 승장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리했다고 하니 대단 곳이죠?
이곳 은행나무... 가을에 오면 참 멋지답니다. 지금도 멋지지만요.
아이와 함께 일부러 가파른 성곽길을 택해서 걸었습니다.
녀석, 겨울 내내 배드맨턴을 쳤다고 큰소리를 떵떵 치더니
몇 십미터 가파른 길을 오르고는 팔각형 주춫돌에 걸터 앉아 고통을 호소합니다. ㅎ
공주 잠종냉장고
녀석이 너스래를 떨더 곳이 바로 공주 잠종냉장고 이랍니다.
1915년도에 콘크리트로 만든 시설물로, 누에씨를 저장했던 곳이랍니다.
누애 알이 보통 4월 중순에 부화하는대 뽕잎은 5월이 되어야 제대로 피어 난답니다. 누애의 보릿기간인 동안 서늘하게 보관해서 부화기간을 늦추는 냉장고 역할을 했다네요.
금강의 얼음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공복루
이제 정말... 코스의 마지막입니다.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관문 공북루에 다다랐습니다.
유형문화재 제37호. 공산성의 북문으로 조선 선조36년 1603년 옛 망북루 터에 다시지은 것으로, 조선시대의 대표적 문루로 평가 받고 있다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백제문화제 때에는 강남과 강북을 잇던 옛 다리배를 재현한답니다. 예전에는 나룻배를 여러첫 띄워 그위를 널판지로 이었는데, 백제문화제 때에는 공기를 넣은 플라스틱 상자를 이어서 그 때의 분위기를 재현하고 있죠.
가을이 되면 한 번 백제문화제 보려 공주로 놀러 오시기 바랍니다.
이제 정말 마지막 오르막...
그래서 한라산 오를 수 있겠니?
아이가 힘겹게 오르고 있는 부분이 유네스코 등재를 준비하고 있는 중에
지난해에 무너져 내려 보수공사를 마친 구간입니다.
공산정
경치가 정말로 끝내주는 자리에 2층 누각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최근에 전망 좋은 곳에 지어 놓은 것인지 안내문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나온 길에 공북루가 보입니다
너른 터는 예전에 마을이 있던 곳입니다. 초등학교 때, 공산성의 복원을 위해서 마을이 이주를 해야 한다는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네요. 그런데 돈이 없어서 언제 될지 모른다고 했는데... 언제 다 이주를 마쳤을까?
아무튼 10여년 전부터 이곳에서 백제문화제 때 다양한 문화행사와 체험활동이 이루어 진답니다.
공산정을 지나 두 곳의 전망대가 새로이 지어졌습니다.
이곳에서는 금강과 금강대교
일제 강점기 때 대전에 철도가 들어오면서 도청이 이전하자,
공주의 민심을 달래고자 금강에 처음으로 다리가 놓여졌습니다.
그 다리가 아래로 보이는 금강대교 입니다.
그리고, 멀리 정지산 유적지와 연미산이 시원스럽게 보입니다.
아~ 이제 아까 처음 출발했던 금서루가 보입니다.
녀석, 아까 미뤄두었던 활쏘기 체험에 대단한 집중력을 보입니다.
이제 오늘 공산성 둘러보기도 이만 접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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