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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주한 마음 틈으로 '제주'를 우겨 넣으니 참을 수 없는 평온이 몰려왔다
  • 비로서 허락한 소백산 비로봉 푸른 하늘과 초록 풀밭에 그리움까지 숨겨놓고 말았다
산행 이야기

적상산 |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자

by 여.울.목 2017. 12. 12.

가야한다.

그래서 그런지 눈은 떠진다만 정신은 몽롱하다. 몇 주 동안 시달려왔던 것이 맷돌처럼 묵직하게 몸과 마음을 눌러재낀다.

가기 싫다.

아직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보온병에 따듯한 차라도 넣어주겠다는 마눌님의 말에 버럭 성질을 내고 만다.

갑자기 신세타령을 한다.

터럭 하나도 논리적이지 못한 상황을 연출하고 말았다.

말의 의도보다는 지금 선택의 순간에 또 다른 선택을 하라는 것 자체가 뇌관이 되었나보다.

후회는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시작해서 헉헉거리며 가파른 길에 아양을 떨 때까지 계속된다.

찌푸린 하늘에서는 그럭저럭 눈 알갱이를 떨어트린다. 추울 것 같다.

 

2017-12-09_08-19적상산.gpx

 

 

 

서창탐방지원센터 인근에 사람들을 풀어놓고 버스가 휑하니 돌아선다.

여기저기 펜션과 같은 숙박시설이 많이 자리잡고 있다. 토요일인데도 한가하다. 날씨 탓인가보다.

처음 얼마는 등고선을 직각으로 올라가는데도 그리 어렵지 않다. 생각보다 춥지 않은 날씨에 다들 한 꺼풀씩 꽁꽁 동여맨 옷을 배낭에 꾸려 넣는다. 나도 두 겹이나 풀어 배낭에 집어넣고 보니 이내 일행과 거리가 뚝 떨어지고 말았다.

이제 산길은 갈지()자 모양으로 가파름에 적응을 한다. 오랜만의 산행이라서 그런지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숨이 차올라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다. 게다가 몇 주 동안 쌓인 이런저런 생각의 찌꺼기들마저 아우성이다. 벌써 지쳤는지 먼발치 앞사람과의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장도바위를 지나 적상산성 서문 앞에 이르러서야 잠시 숨을 돌린다. 나 혼자였다고 생각했는데 앞뒤로 일행들을 만나니 세상 나 혼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창피하네.

장도바위는 최영장군이 적상산에 오르다 거대한 바위를 만나 허리에 차고 있던 긴 칼로 내려쳐 바위가 양쪽으로 쪼개졌다하여 장도바위라고 한다. 그저 바라보며 누군가의 구라인지 참~ 혀를 차다 다시 갈 길에 접어든다.

 

 

잠시 숨 돌릴 틈을 준 무주 적상산성(사적 제146)

삼국시대로 추정한다고 쓰여 있던데 기록상으로는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라고 한다. 하지만 그 형식이나 이런저런 정황을 보면 백제시대의 것이라고 추정을 하고 있다.

백제 멸망 후 방치되어 있다가 고려 중기 이후 거란과 왜구의 침입 같은 난이 있을 때 백성들의 피난처가 되고는 했다. 고려 말에 최영장군의 축성 건의와 조선전기 성곽 보수가 이루어져 공식적으로는 여말 선초로 축성연대를 본다고 한다.

성곽 둘레는 약 3킬로미터 정도인 것 같다. 적상면의 중심부에 있으며, 적상산 위의 분지를 에워싸고 있는 절벽을 이용해서 석성을 쌓은 산성으로 등산로 말고는 어디 까불고 덤빌만한 틈이 없는 것 같더군.

우리가 들어선 서문은 용담문 이라고 하는데, 복원한 것이 좀 어설퍼 보인다. 안내표지판 글만 보더라도 2층에 3칸의 문루가 있을 정도라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안내문에 따르면 성문밖에 서창과 고경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고경사는 절을 말하는 것인지 한자도 병기되어 있지 않고 따로 설명도 없으니 오리무중이다. 다만 서창은 서쪽의 창고를 말한 것 같고, 곡식과 무기를 보관하던 창고로 이루어졌던 관청의 건물이었던 것 같다. 그 서창이 성 밖에 있으니 한두 번도 아니고 다니기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래서 성 안으로 옮겼다는 것이고, 성 밖에 서창이 있던 동네 이름이 서창리가 되었다는...

임진왜란 후 이곳에 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을 보관하는 사고를 짓고 수비대가 들어서는 등 국가 중요시설이 되었다고 한다.

 

 

 

 

대충 성곽이 있는 위치가 해발 1,000미터 정도는 되는 것 같다.

해발고도가 1,000을 넘기자 기온이 사뭇 다르다. 배낭을 끌러 다시 몸을 감싸 안아야 한다.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날카롭게 피어올라 있다. 이제부터는 눈이 제법 쌓여있다.

앞서 간 일행들의 발자국이 명확하다.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의 흔적이 없다.

향로봉을 통해서 하산하기로 한다.

 

 

오랜만의 산행이라 무리하기도 싫어서 앞선 3명의 선발대가 지난 정상 쪽은 포기하고 향로봉으로 향한다. 향로봉까지는 말 그대로 능선이다.

하늘이 좀 더 맑았다면 상고대도 찬란하게 빛났을 텐데 아쉽다.

향로봉에서의 조망도 그저 그렇고 적상산 정상을 다녀온 선발대도 바로 도착을 해서 함께 사진을 찍고 나니 추위가 엄습한다. 더 머물 수가 없는 것이 산봉우리다.

 

 

 

 

 

향로봉을 지나자 갑자기 절벽으로 떨어지듯 급한 내리막이 이어진다. 아이젠을 차서 다행이지만, 고도가 낮아지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눈이 아니라 낙엽이다. 참나무 낙엽이 쌓이고 쌓인 데다 눈이 살짝 얹혀 있다 보니 자칫 발을 삐끗하게 되면 낙상하기 십상이다. 스틱으로 비질을 해가면서 길을 열어간다. 눈보다는 낙엽 때문에 아이젠이 필요한 상황이다.

 

 

 

 

겨우 험한 구간을 헤치고 나왔는데 이놈의 능선이 왜 이리 긴 것인지. 산행대장은 발에 쥐가 나서 절뚝거리고 선발대는 지들만 신이 났는지 멀찌감치 앞서가고... 이 구간이 백두대간도 아니고 조망이 시원한 것도 아닌데, 의미 없는 산행을 계속해야하냐는 의견이 나온다.

가까운 길을 찾아 하산을 하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룬다. 바로 아래에 동네도 보인다. 그렇게 접어든 하산 길... 이놈의 능선에 절벽층이 띠를 이루어 허리띠처럼 산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다보니 길이 이어질 것 같다가도 멈춰서길 몇 번. 쌓이고 쌓인 낙엽층은 흙과 섞여 마치 늪처럼 사람들 발목을 흔들어댄다. 누구 한 명이라도 다치지 않을까 걱정이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던가?

길을 만들어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뒤로 쳐지고 드디어 산행대장이 무거운 책임감 때문인지 앞에 나선다. 사람들의 원망이 하늘을 찌를 듯. 이거 자칫하면 쌍욕이 오갈 것 같은 분위기!

낙엽의 늪지대를 빠져나와 숨을 돌리던 산행대장이 앞에 길이 있냐?”라는 선배님의 묵직하고도 살기 있는 소리를 듣자 무조건 ~!”하고는 눈에 불을 켜고 길을 찾아 내려선다.

~ 난 이 상황이 어찌나 우습던지. 이래도 돼는 건지 모르겠다만 계속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어찌나 웃었던지 다리에 힘이 빠져 경사지에서 넘어질 뻔했다. 웃음은 억지로 멈춰놨지만 간신히 길을 찾아 들어서도 와 이리도 웃음기가 가시지 않는지... 솔직히 다른 고생한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겐 한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는 느낌이다.

뭔가 분출구가 필요했나보다. 탁 트인 경치와 절경이 없어서 내내 우울하기도 했는데 엉뚱한데서 빵 터지고 말았다.

 

 

 

내려서는 길에 바깥쪽 무릎의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무사히 아스팔트길을 밟는다.

아무래도 이런 극과 극인 내 생활의 패턴을 잘 조절해서 균형을 맞춰야겠다.

힘들지만 조금 더 힘내고, 현명하게 나 자신을 다독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