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갑자기 쥐어진 지폐 몇 장 같다.
그냥 까먹기에 크고, 뭔가 대단한 것을 하기는 좀 그런 것이다. 게다가 낯설기까지 하다.
요놈이 바로 토요일 아침이다.
맥주 한 잔 더 하려는 모임을 쏙 빠져나오긴 잘 했는데, 집에서 맥주 캔 몇 개를 들이키니 온 몸에 힘이 쪼~옥 빠지더라.
그런 금요일 다음 날 아침이다.
나를 뺀 모두가 저마다의 스케줄이 있다.
난 이 지폐 몇 장 가지고 뭘 하지?
큰아이와 아내가 먼저 집을 나선다. 둘째 아이가 느릿느릿 10시라는 시간에 맞춰 옷을 갈아입는다.
대체 난 뭘 하지?
누가 뭘 하라고 했으면 좋겠다. 오랜만의 주말 휴식이 나와 내외를 한다. ㅋ
아이를 데려다 주고는 어제 들었던 팟캐스트의 소재가 된 정지산 유적을 방문해보기로 한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 아이가 12시에 수업이 끝이 난다고 하네.
그럼 연미산을 들러 공주 전경사진을 찍고 공주박물관에서 관련 유물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정지산유적지까지 산책길을 따라 걸어갔다 오면 딱 2시간이라는 틀에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추운 측에 속하는 날씨지만 바람은 불지 않아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그리 두꺼운 구름은 아니지만 넓게 자리를 차지한 녀석 때문에 햇살이 따듯하지는 않다.
보통 때면 곰굴 쪽으로 해서 ‘ㄱ’자 형태로 길을 잡는데 다른 일정을 생각하고 있기에 곧바로 제비꼬리봉을 향한다.
패딩에 땀이 차서 얼어붙으면 치명적이라 산행 때 가급적 입지 않는데, 숙취에 더 추위를 타는 것 같고 대충 입고 나온 탓에 그냥 입고 나섰다. 안에 받쳐 입은 히트텍과 구스다운이 열을 제대로 낸다. 쉬지 않고 봉우리에 올라서기로 한다. 간만에 이마에서 땀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한가롭게 사진 몇 컷 찍고 멍 때리고 싶었는데... 연미산에 단체산행이라니. 50대 초반의 30여명이 봉우리 데크를 점령했다. 거기에 끼어 어쩌다 그만 연미산 봉우리를 넘고 말았다.
기왕 내려선 김에 쌍신동으로 내려서는 길을 따라 하산하기로 맘을 먹는다.
얼결에 단체의 일행이 되어 뒤로도 앞으로도 가지 못하는 어정쩡한 속도로 길을 내려간다. 연미산 7부 능선쯤에 평평한 곳이 나타나자 과감하게 추월을 한다. 이런~ 가속도가 붙어버렸다. 아니 솔직히 사람들을 의식해서 걸었다는 게 솔직한 표현이겠지.
한 봉우리만 넘어서 쌍신동으로 내려서자. 그랬는데.
헐~ 어쩌다보니 이 길이 주는 또다른 매력에 그냥 걷게 되네.
2년 전 봄 산행과 사뭇 다른 기분을 준다. http://yyh911.tistory.com/176
한창 초록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길과 달리 모두 겨우살이 준비를 마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앙상한 가지 사이로 풍경이 보인다. 햇볕이 부서져 내리는 금강을 따라 공주시의 모습이 이러쿵저러쿵 숨바꼭질을 한다. 그 재미에 걸음을 줄일 수 없었다.
연미산 봉우리를 내려서 세 개의 봉우리를 지나면 공주IC까지 이어지는 능선이 일단락된다. 고속도로 때문에 산줄기가 잠깐 끊어졌지만 산줄기는 곰나루터에서 시작돼 월미동과 쌍신동의 경계를 이루며 정안천에 발을 담그고서야 잠시 숨을 돌린다. 강남지역에 공주대간이 있다면 강북에는 이런 산줄기가 자연스레 나성의 역할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 능선 곳곳에 평평한 곳이 많다. 예전에 무슨 건물이라도 있었을 것 같다. 실제 가 보면 정말 평지스럽고 넓다.
두 번째 봉우리를 지나서부터는 산세가 조금씩 약해져서 그런지 곳곳에 있는 묘(터)를 볼 수 있다. 하긴 연미산 봉우리 표지석 앞에도 묘가 있기도 하지. 암튼 2년 전에 느꼈던 것처럼 지금까지와 달리 사람의 흔적이 뜸해져서 그런지 음산하다는 느낌이 든다.
고라니 한 녀석이 숨어 있다가 내 인기척에 놀라, 오히려 나를 크게 놀라게 하고는 후다닥 도망친다. 능선길에 녀석을 두 번이나 만났다.
공주IC 근처 종점에 다다르니 떡갈나무 낙엽 때문에 길을 찾을 수 없을 지경이다.
산행을 마치고 포장길을 따라 연미산 주차장으로 걸어가는데 아까 그 고라니석이 숨어 있다가 오버질을 하면서 도망을 친다. 아~ 정말... 처음엔 ‘저거 미쳤나?’ 생각했는데, 너른 쌍신들판을 마음껏 뛰어다니는 녀석을 보니 내 속이 다 후련하더라.
능선을 따라 갈 때 흘낏흘낏 보였던 동네를 따라 걸어간다. 정찰병처럼 동네 구석구석을 훑어간다. 강둑을 따라 난 4차선 도로는 무수해도 많이 다녔건만 때마다 궁금했던 동네였기에 찬찬히 둘러본다. 군데군데 제법 건실한 주택이 있는 반면 빈 집도 꽤 있더군. 너무 조용하다. 아이들이 다 숨었다.
우리아이 역사수업 끝날 시간에 거의 맞을 것 같다.
조금 여유가 되면 강가에까지 내려가 보려했는데 욕심을 부린 탓에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으로 부려보려는 여유라는 사치는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득템한 기분?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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