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들기 전 연두 빛이 잠시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시절이다.
가고 싶은 산 맘껏 가는 것도 좋지만, 반나절이라도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자니 지나면서 유심히 그윽한 눈길로 바라본 연미산 능선.
연미산이야 자주 올랐지만 공주IC까지 이어지는 능선은 되돌아오는 수단이 여의치 않아서 마땅한 짬과 수단을 생각해오던 차였다.
멀리서 산세를 보아하니 그리 어렵다고는 생각되지 않기에 큰아이와 함께 쉬엄쉬엄 걸어보고 싶었는데, 녀석... 친구의 초대에 들뜬 모습을 보자니 억지써서 데려가고 싶지는 않다.
연미산 고개에 나만 덩그러니 내려놓고는 식구들이 마실을 떠난다.
맑다 못해 찌는 듯한 햇살을 퍼붓는 날이다. 내게 어울리지도 않고 내키지는 않지만 썬크림을 두텁게 발라댄다. 그나마 썬크림 특유의 향이 후각을 자극하지 않는 제품이라 다행이다.
2015.4.26. 연미산고개 ~ 공주시립야구장 4.1km 1:20
연미산 고개 정산 부근은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열리는 장소다.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공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사)한국자연미술가협회-야투가 주관하는 국제자연미술전시 행사이다. 2004년 비엔날레가 시작되었다. 문광부, 충남도, 시의 도움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각 국의 예술가들이 함께 먹고 자면서 이곳에 예술품을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2014년도에도 진행이 되었다고 하는데, 새로 만들어진 것보다는 예전부터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품이 더 많은 것 같다.
작품을 하나하나 감상하며 여유를 부리기에는 조금은 가파른 등산길이다. 그래도 숨이 가빠질 것 같으면 작품을 감상한다는 좋은 명분으로 그냥 자리에 멈춰서도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곰굴’로 향하는 좁은 길이 보인다. 온통 떡갈나뭇닢으로 덮였지만 사람들이 자주 밟고 다녀서인지 차분하게 가라앉아 여기가 길이요~ 하며 환하게 반긴다.
‘곰굴’ 산행을 하다말고 웬 곰이 사는 굴을 찾는다냐?
인근 주변과 달리 곰굴 주변은 생뚱맞을 정도로 제법 커다란 바위 여러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딱히 곰이 살만한 굴을 찾을 수는 없지만 곰나루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굳이 바위 모듬을 두고 ‘곰굴’이라 하는지 이해갈 것이다.
곰나루 전설
어릴 적 전설의 고향에서 본 것도 있고, 교실에서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도 생각이 난다. 여기저기 글을 찾아보니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는데 우선 곰굴 앞에 있는 안내판에 적힌 이야기를 적어보면 이렇다.
아득한 옛날 연미산에 착하고 부지런하며 큰 힘을 가진 웅녀가 살고 있었다. 웅녀는 이곳저곳 흩어져 있던 큰 돌을 모아다 집을 만들고 시집 갈 준비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잘 생긴 나무꾼 사내를 만나게 되었다. 웅녀는 나무꾼을 천생배필로 생각하고 온갖 정성을 다하며 섬기며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나 나무꾼은 웅녀와 사는 것에 실증을 느꼈다. 이를 알아차린 웅녀는 바위로 문을 굳게 닫고 일터로 나가곤 했다. 세월이 지나자 웅녀와 나무꾼 사이에는 엄마를 닮은 아이가 태어났다. 나무꾼도 아기를 무척 사랑했고 이를 바라보는 웅녀의 마음도 편안해져 갔다. 어느 날 바위 문이 열려있자 나무꾼은 강가로 달려가 배를 타고는 강을 건너 남쪽으로 떠나버렸다. 웅녀와 아기는 날마다 강 건너 남쪽을 바라보며 나무꾼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꽃피는 봄과 무더운 여름, 낙엽 지는 가을과 흰 눈이 쌓이는 겨울이 몇 번씩 바뀌어도 나무꾼의 소식은 없었다. 그래도 웅녀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무꾼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느 여름 천둥과 번개가 치고 소낙비와 태풍이 휘몰아치던 밤이 지나자 금강에는 큰 홍수가 났다. 그런데도 웅녀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무꾼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이를 딱하게 여긴 사람들이 찾아가보니 웅녀는 이미 돌이 되어버렸다. 그때부터 웅녀가 나무꾼을 기다리고 있는 나루라고 하여 곰나루라고 불리어져 오고 있다.
여기까지가 안내문에 적힌 글이다.
여기저기 글을 찾아보니, 사랑을 꽃피웠다는 안내문 이야기와 달리 - 웅녀가 포악하게 묘사되는 이야기가 더 많다. 잘생긴 나무꾼을 납치해서 무거운 바위로 가로막은 동굴에서 살았다고 한다. 둘 사이에서 두 아이를 얻자 잠시 마음을 놓은 웅녀가 문을 닫지 않고 나간 사이 나무꾼이 도망을 간다. 애타게 불러도 외면하고 달아나자 웅녀는 두 아이와 함께 강에 몸을 던진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두 아이를 먼저 던지고 반응이 없자 웅녀도 물에 뛰어들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후로 금강에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등 잣은 사고가 발생하고 고기도 잡히지 않고 어쩌고... 해서 사람들이 곰의 넋을 기리고자 제사를 지냈더니 평온해졌다는 이야기다. 그 후로 곰사당을 지어 해마다 그 넋을 기렸다는 전설이 이어진다.
▶ 웅진단 터는 곰나루 바로 앞에 있고, 여기는 조선시대 향교 대성전을 본떠 소박하게 다시 세워 '웅신단'이란 현판을 단 것으로 보인다.
▶ 안에 모셔진 돌곰 조형물은 국립공주박물관의 것을 본떠 놓은 것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지금은 곱디고운 백사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퇴적물만 쌓여 잡초만 무성해지고 있다.
▶ 그 고운 백사장은 어디로 가고...
길 언덕 소나무 숲 사이에 곰사당 있다. 사당에 안치되어 제를 받았을 곰상은 1975년에 곰나루 부근 둔덕에서 발견되어 지금은 국립공주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언제의 상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백제시대의 거시으로 추정하고 있다. 웅크리고 앉은 귀가 오롯이 솟고, 앉은 다리선도 매우 부드러우며 34㎝의 자그마하고 아담한 모습이다.(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돌베개)
이 모습대로라면 ‘곰굴’ 안내글의 이야기처럼 나무꾼을 기다리는 애처로운 곰 아낙이 그려지는 것이 맞는 것 같군.
▶ 곰나루 솔밭
▶ 곰나루 솔밭 사이로 연미산이 보인다.
▶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가 주관으로 금강의 수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장소란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문헌과 고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웅진사, 웅진단, 웅진제소 등으로 표기되었다고 한다.
2011년 발굴조사를 해서 고려와 조선시대의 기와건물지 1동과 담장시설을 확인했고, 제사에 이용되었던 분청과 백자제기, 전돌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한 인터넷 신문에는 도토뱅이 전설에 나오는 부자집 아들을 곰나루 전설의 나무꾼과 연계시킨 글이 있던데 다른 데에서는 거론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이야기가 조금 비약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곰나루의 다른 지명인 고마나루는 고어(古語)의 변천 과정에서 보면, '큰 마을'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도 하며, 고마(固麻)는 곰의 옛말이라고 설명하는 자료도 있다.
곰의 전설이 서려 있는 강이라 해서 고마, 곰강[熊江] → 금강(錦江), 곰강 나루터 → 곰(고마)나루 → 웅진 → 웅천주(신라, 신문왕) → 웅주(신라, 경덕왕) → 공주(고려, ‘곰주’를 가차자를 써서 公州)
금강에 배가 드나들던 넓은 나루터. 문주왕 웅진 천도 때의 교통로로, 철도와 새로 난 국도가 그 기능을 대신하기 전까지 백제 역사의 중심무대이자 국제적 교통의 관문이었다고 한다. 1010년에는 고려의 현종, 1624년에는 조선 인조가 이 나루를 통해 공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660년 나당연합군 소정방이 금강을 거슬러 와 주둔했고, 백제멸망 뒤에는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었던 역사의 중심지였다네...
<명승 제21호>
곰 토템과 관련된 여러 주장
-비류 백제가 18년에 한성을 잃고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곰 신앙족인 부여족의 건국신화로 곰 설화를 남겼다는 설
-백제(외래 족)가 마한(토착 족)을 멸망시킨 사건이라는 설
이야기에 비해서 조금은 시시하게 보이는 ‘곰굴’을 뒤로 하고 연미산 정상으로 향한다. 등고선을 따라 허리를 감고 갔던 ‘곰굴’가는 길과 달리 이제는 제법 등산로의 면모를 보인다.
▶ 나무가지 사이로 보이는 공주대간 능선
땀방울이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이게 제일 싫다. 두텁게 바른 썬크림을 비집고 나오는 땀방울이 범벅된 얼굴. 사실 그리 보기 흉하지는 않을 텐데 내 성격이 이상해서 그런지 화장하고 땀흘리는 것 같아서 뭔가 구색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이제 연미산 정상까지 마지막 고비 계단길이다. 30~40여 미터를 치고 올라가야 한다.
가파름 만으로만 치자면 다른 높은 산의 산행길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산의 높이가 있다 보니 그리 길게 고행의 길이 이어지지 않는 다는 점이다.
그 굵고 짧은 노력에 비해 연미산 정상이 주는 풍경은 몇 배나 되니 가히 참고 또 참을만하다.
연미산은 산의 모양새가 제비 꼬리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참 대단하다. 이 산 뿐만이 아니라 산 이름을 짓는 것을 보면 억지춘향 같기도 한 곳도 간혹 있다만, 대부분 지형세와 지역의 역사와 생활양식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아마도 산등허리를 따라 능선을 붓으로 그려 골격을 그려가 보니 모양이 제비꼬리 같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산은 다른 사물과 같이 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양이 다르니까.
▶ 금강을 사이에 두고 왼쪽으로 쌍신들녘을 지나 신관동 새 시가지, 오른쪽으로 공주대간의 산세 안에 자리잡은 공주 시가지
▶ 공주 강남 지역의 시가지가 배 모양 공주대간에 감싸 안은 모양새가 한 눈에 들어오죠?
금강줄기가 동쪽에서 북서로 흐르다 남서쪽으로 90º가량 굽이치는 곳... 이 곳에 곰나루가 있습니다.
▶ 곰강- 금강은 이제 백마강이라는 이름표를 달아볼양 남쪽으로 유유히 내려가는데, 공주보가...
거칠게 쏟아지는 땀방울을 잠시 닦아내고 이제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던 능선으로 내려선다. 이 능선은 다음 봉우리까지 아주 넉넉하게 이어진다. 오프로드 차량이 한 대 있다면 충분이 다닐만한 너비이고, 평탄하기로 치자면 보통의 비탈진 밭보다도 평평한 것 같다.
▶이제 서편으로 눈을 돌리면 대전-당진 고속도로와 논산-천안 고속도로가 들녘 한 가운데를 가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연미산은 주변의 들녘으로 둘러쌓인 섬과 같은 존재다. 그런데 어릴적 어른 들은 이 산에 호랭이가 사셨다고 하셨는데... ㅋ 아무리 생각해도 호랑이가 살만한 생태적 H/W는 아니다.
공주에 사는 사람들에게 연미산 고개를 넘어야 우성과 유구 청양, 보령, 아산 쪽으로 갈 수 있는 길목이었기에 곰나루의 유명세에 보테진 이런저런 문화유산이 쌓여서 만들어진 '호랭이'는 '곰'과 같은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 연미산에서 내려서면 이런 능선같지 않은 너른 길이 얼마간 이어진다.
이런 느낌도 잠시 이제부터는 조금씩 질릴 것 같아서 그런지 제법 능선으로써의 면모를 보여준다. 오르락내리락 금새 잡힐 것 같으면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걸어야 한다.
▶ 가파르지만 높지 않은 야산이 많은 공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주로 리기다소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임야를 유실수로 대체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아마도 밤을 심겠지.
▶ 지나다 눈에 띈 신기한 조합이다.
원래 소나무는 척박한 땅에 힘껏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소나무가 들어서 숲이 안정이 되면 참나무와 같은 넓은 잎을 가진 식물이 자리를 차지한다고 한다. 숲의 천이과정 중에 하나라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이 광경은 소나무와 참나무가 어울려 사는 건지, 다투며 사는 건지... ?
공주시립야구장 쪽에 가까이 갈수록 집안마다 고이 모셔놓은 산소가 즐비하다. 조금이라도 해가 기우는 오후가 되면 등골이 서늘해질 것 같은 느낌이다. 주능선 쪽의 산소는 이장한 흔적이 많고, 날머리 쪽으로 갈수록 동네와 가까워서 그런지 촘촘하게 써진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들머리의 상대어 날머리. 이제 돌아갈 곳이 보이는 언덕에 올라선다. 충청도 사투리로 날맹이라고 한다. 날맹이에 서서 짧은 산행이었지만 지친 내 삭신에게 조금만 참으라고 위안을 하며 눈앞에 펼쳐진 낯익은 광경에 투명한 미소를 머금는다.
내려서는 길은 공주IC와 맞닿아 있어서, 들머리로 이곳을 찾는다면 여러번 기웃거려야 할 것 같다. 등산을 조금 쉽게 하려면 내가 걸었던 길과 반대방향으로 서서히 올라 풍경을 감상하고 알싸하게 내려서는 것이 훨 나을 것 같다.
공주시립야구장에서 나를 반기러올 태우러 올 사랑하는 가족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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