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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충청수영성(보령 오천)

by 여.울.목 2016. 7. 3.

충청수영성

 

 

충청남도 기념물 제9호 ‘보령 오천성’

보령 충청수영성 → 2009. 8. 24. 사적 제501호로 승격 지정, 면적 12만 5,326㎡


 

 

언젠가 다큐멘타리에서 보게 된 충청수영성의 모습,

바다와 함께 어우러진 석성과 무지개 모양의 문이 참 인상적이었다.

언제 보령에 갈 일이 있으면 꼭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

그런데 보령은 이런저런 일로 생각보다 자주 가지만 대부분 업무나 유흥을 위해 방문하면서도 그 인상 깊다는 성곽은 찾아볼 틈을 내지 못한다.

지난 해에는 오천까지 와서 회만 먹고 갔다. ㅎ

 

오늘은 큰 아이가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기에 아직 시험에 자유로운 둘째 아이를 내가 떠 맡기로 했다.

작은 아이가 교과서에 나온 석탄박물관을 꼭 가보고 싶다고 한다.

어릴 적에 데리고 갔었는데, 너무 어려서 기억을 하지 못하는 가보다.

 

보령까지 가서 아이와 함께 석탄박물관만 보고 오기도 그렇고,

그 흔히 가는 해수욕장을 간다는 것도 생뚱맞다.

 

그래서 실내에서 관람이 가능한 박물관은 오후에 가기로 하고 오전에 먼저 충청수영성을 들러보기 한다.

 

 

 

충청수영성은,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이 있던 곳으로 1510년(중종 5)에 축조하였는데, 해변의 구릉의 정상을 중심으로 주변에 성을 쌓아 바다를 관측하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주요 건축물로는 영보정(永保亭)·관덕정(觀德亭)·대변루(待變樓)·능허각(凌虛閣)·고소대(姑蘇臺)와 옹성 5개, 문 4개, 연못 1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 중 영보정만이 최근에 다시 복원되어 있다. 그리고 4개의 문은 모두 없어졌고, 서문의 문루는 사라진채 아치형 석문만이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바로 눈에 띄이는 아치형 석문.

좌우로 복원하지 얼마 안 되는 짧은 성곽이 수줍게 자리하고 있다.

 

 

 

 

 

아치형 석문을 지나 안으로 올라서면 고즈넉한 'ㅡ'자형 기와집이 나온다.

충청수영이 폐지된 이후 민가로 쓰이다가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하고 있는 건물로, 흉년에 관내 빈민의 구제를 담당하던 충청수영 진휼청이다.

그나마 예전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이다.

 

낮으막한 구릉이지만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

가까이 항구와 건너편 천북, 멀리 바다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성벽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포토존이라는 팻말이 나온다.

진짜 경치가 좋다. 왠만한 건 다 한눈에 들어온다.

 

수영성 안에 있던 정자 영보정.

보통 정자에 비하면 규모가 꾀 큰 편이다. 정말 큰 것인지 복원할 때 터를 크게 잡은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1504년 수사 이량이 처음 세우고 계속 손을 보아 온 우리나라 최고 절경의 정자라고 한다.

 

영보정에서 내려와 성곽을 걷다보면

아쉽게도 벌써 성곽길의 끝이 보인다.

아니 도로로 끊힌 것이다.

저 멀리 교회 왼쪽으로 성곽이 계속 이어진다.

사적지로 지정되었음에도 아직 유적지 안에 교회나 민가 등과 같은 사유지가 그대로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

 

사실 아치형 석문을 지나 성내로 들어서면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이 발굴조사현장 안내판이다.

'위험'이라는 푯말이 심난해 보이지만, 이내 맘이 편안해진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복원까지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체계적인 문화재 관리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영보정에서 경치만 감상하지 않고 마을쪽으로 살짝 내려서면,

한창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잇는 현장을 볼 수 있다.

 

옛 관청 건물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서 있었나 보다.

 

 

진휼청 뒤편에서 바라본 발굴터

 

생각보다 둘러보는 것이 금방 끝이 났다.

충청수영성 성곽 안의 많은 부분이 민가나 학교, 면사무소와 같은 관공서와 교회, 사유지로 되어 있고,

잔여 성곽터도 아직 확실하게 발굴하지 못한 것 같다.

 

아이와 함께 서문으로 내려와 안내글을 읽고 있자니 문화해설가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건낸다.

 

"요 앞 바다의 물살이 센 편이죠. 명량에서의 울들목과 같이요.

그래서 어민들에게는 싫지만 군사적으로는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었고,

원래는 물이 여기까지 들어 왔죠. 그런데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항구가 커지면서 부두가 밖으로 밀려 나게 되었죠."

이런저런... 묻지 않은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신다.

유적지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인 발굴작업을 하고 있고,

추정 성곽 안에 학교며 면사무소와 같은 건물이 옮겨질 마땅한 곳이 없어 걱정이라고 한다.

 

 

해설사님 말씀으로는 안내판의 내용에 비해 좀더 세부적으로... 해안쪽은 석성이고 내륙쪽은 토성으로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 토성 쪽은 세월이 지나 흔적을 찾기 힘든가 보다.

 

안내 표지판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면,

충청수영은 조선초기에 설치되었으며 충청도 해안을 방어하는 최고 사령부 역할을 하였고, 조운선의 보호와 안내 및 외적방어 역할을 하다가 1896년 폐영되었다고 한다.

1510년 수사 이장생이 돌로 쌓은 성이며, 현재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인 서문을 비롯한 1,650m의 성곽이 남아 았다. 북벽과 남벽은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했고, 서벽은 바다와 면한 지점에 쌓앟고, 서벽 앞은 'U'모양의 포구를 이류어 전형적인 조선시대 수군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조선 3대 수영 중 하나라니까...

 

그나마...

우리나라 다른 수영성 유적은 훼손이 심해 원래 경관을 잃어버렸지만 충청수영은 지형과 함께 경관이 잘 보존되고 있다네.

 

 

이야기를 마치며...

충청수영성에 대한 이모조모를 살피다보니, 내 사는 공주와 공산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백제의 고도는 물론이고 선조 때(1603)부터 1932년 도청 이전까지 공주는 충청도의 행정,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지였다.

비록 대전과 세종이라는 거대 도시의 틈바구니에서 자꾸 밀려나고 있지만 아직도 그 숨결과 자존감이 살아 숨 쉰다.

이제 새로운 시대에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숙제를 잘 해결해서 거대도시와 특성화된 국가적 신도시와 win-win할 수 있기를 바랜다.

 

오늘은 우리 작은 아이가 아빠의 밀린 숙제를 해준 셈이다.

앞으로도 자주 우리 서로의 숙제를 도와주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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