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없는 서산 여행
서산9경 중 4경을 둘러보다
서산 9경
1경 해미읍성, 2경 마애삼존불상, 3경 간월암, 4경 개심사, 5경 팔봉산, 6경 가야산, 7경 항금산, 8경 서산한우목장, 9경 삼길포
2경 마애삼존불상
오전에는 공주 구석기박물관에서 개최된 어린이 그림대회에 참가한 후에 부리나케 차를 몰아 마애산존불상과 해미읍성을 찾기로 했다. 바닷가에 오니 바다에서 나는 식재료를 쓰는 음식을 먹어야겠다 싶어 차 안에서 맛집을 검색을 했건만,
넘의 동네 잘 알지 못하는 관계로 일단 "서산마애삼존불상"을 네비에 찍고 달려왔는데,
이 곳이 바닷가가 아니라 산골짜기다.
주변에 소문난 음식점도 없고해서 후다닥 삼존불을 구경하고 해미읍성 부근에서 끼니를 해결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아~ 그런데 용현리 계곡을 따라 들어선 삼존불상으로 가는 길목의 주차장... 사유지다.
사유지 소유자는 용현집이라는 식당.
속는 셈 치고 주차비 낸다는 기분으로 끼니 해결하자고 야외에 자리를 잡고는 음식을 주문한다.
아이들은 돈까스 1인분 8,000원
어른은 어죽 2인분, 6,000원씩이다.
우선 돈까스가 먼저 나왔는데, 1인분 시키길 잘했다. 큼지막한 덩어리 두 개가 나온다.
처음엔 양에서만 만족하려고 했는데 시장이 반찬이라 그랬는지 녀석들이 맛있다며 하나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운다.
제법 맛이 난다.
그리고 어죽, 이 집 전문이 어죽이란다.
솔직히 공주 왕촌 어가명가의 맛에 비하면 떨어지는 편이지만, 생각보다 얼큰하고 담백했다.
괜히 어정쩡하게 게장집이나 회집 들어가서 밥값 생각에 머릿속 복잡해져서 음식맛 제대로 못느끼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용현계곡도 물이 좋아서 여름이면 사람들이 많이 찾을 것 같다.
등산로가 연결되어 있는지 산행복장을 한 사람들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계단으로 이루어진 숲길을 따라 200여 미터를 올라가면 사찰같이 생긴 관리사무소가 사유지를 피해 올라와 있는 것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증산로로 이어지는 길이 있고 왼쪽 쪽문을 나서면 드디어 "서산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이 보인다.
처음에는 깍아지른 절벽에 있었나본데, 사람들이 석축으로 단을 만들어 삼존불 가까이로 접근을 했나보다.
처음에는 삼존불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스치듯 지나치고 말았는데 가만히 사진을 보고 있자니,
자연 그대로 바위의 생김새대로 지붕을 삼아 삼존불을 조각한 것이 참 절묘하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국보 제84호로 본존상 2.8m, 왼쪽 보살입상은 1.7m, 오른쪽 반가상은 1.66m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마애불은 부처를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입상과 반가사유상이 배치된 특이한 삼존형식이다.
백제 후기의 마애불로, 보통 삼존불은 6~7세기 동북아시엣 유행한 보편적 형식이지만 보주*를 들고 있는 입상 보살과 반가보살이 함께 새겨진 것은 일본, 고구려, 신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이라고 한다.
단정하고 유연하게 조각된 솜씨에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중용의 미를 느낄 수 있는 온화하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서민적인 불상이라 한다.
이 마애여래삼존상은 당시 중국의 불교문화가 태안반도를 거쳐 백제 수도 부여로 가던 길목으로 불교문화가 크게 융성한 곳임을 알게 해주는 것이라 한다. 태안의 삼존불상에 비해 조금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을 보인다.
*보주: 불가
중앙 본존(불교에서 신앙·예배·수행의 대상이 되는 불·보살·만다라 등을 가리키는 말)상을 중심으로 하면
오른쪽에 보주를 든 보살님이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원래 이 상은 부처가 태자였을 때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출가하여, 중생구제라는 큰 뜻을 품고 고뇌하는 태자사유상에서 유래/ 의자에 걸터앉아 왼쪽 다리는 내리고 그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은 자세로,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에 놓고 손끝을 뺨에 살짝 대어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을 표현한 보살상菩薩像)이 협시***하고 있는 특이한 삼존형식이다.
*마애불: 절벽의 바위면이나 거대한 바위 면에 선각이나 돋을 새김 기법으로 불상이나 보살상을 새긴 것
**여래: 부처의 열가지 이름 가운데 하나, 석가모니가 자신을 가리킬 째 가장 자주 사용한 칭호
***협시: 윗사람
::: 백제 특유의 자비로움과 여유 :::
장쾌하고 넉넉한 미소를 머금은 석가여래 입상
따듯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간직한 제화갈라보살 입상
천진난만한 소년의 미소를 품은 미륵반가사유상
이들 불상의 미소는 빛이 비추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고 해서
나도 정면 좌, 우로 사진을 찍어 보았다.
안내판에 따르면, 아침에는 밝고 평화로운 미소를, 저녁에는 은은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볼수 있다고 한다.
<정면>
살짝 머금은 미소가 따사롭게 보인다.
<왼쪽에서... 웃음 꽃이 더 활짝 핀 것 같다.>
해를 등지고 찍은 셈인데 웃음의 강도가 더 쎈 것 같다.
<오른 쪽에서... 과묵하신 모습 같다>
역광으로 찍은 셈인데, 그림자가 두렷하게 심어져서 그런지 근엄한 표정을 짓고 계신 것 같다.
예전에 비와 바람에서 삼존을 보호하려고 시설물을 설치하려고 한 모양이다.
그런데 자연 그대로가 더 낫기에 철거했다는 이야기를 살짝 들은 기억이 난다.
80도로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이 정면으로 들이치지 않아 미학적 우수함과 과학적 치밀함이 돋보인다.
내려오는 길에 바위 위에 연꽃무늬 받침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석등의 잔재
석등 바로 뒤에 있는 바위 위에는 옛 선인들이 글귀를 남겨 놓았는데
法師守漢 巨師最賢生舍利安壇 법사수한 거사최현생사리안단
한 블로거의 임의해석?으로는 '한나라를 수호하는 법사 큰 선행님 최현생의 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으로 해석하더군요.
글씨대로 해석한 것 같은데 조금 낯설다.
'수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법사, 큰 스승 최현생의 사리가 모셔진 제단'이 더 낫지 않을까?
흙 속에 묻혀 있던 것이 최근에 발견됐고, 위 연좌나 글씨에 대해 아직 밝혀진 것이 없다고 한다.
추측하기에 연좌와 글씨의 관련성도 확인되지 않았고, 더더군다나 삼존불하고는 연대차이가 많이 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글씨가 자꾸만 희미해져가는데 관리 좀 잘 되었으면 한다.
예전에는 숲이 울창하지 않았담면 이 바위에서 용현계곡이 훤하게 잘 보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경관이 수려한 곳이라 여겨진다.
4경 개심사
충남 4대 사찰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현재는 수덕사의 말사라고 한다. 그 말사라는 제도가 일본인들이 강제로 그 시절에 종교까지 탄압하고 관리하려고 만든 것인데 아직도 그 조직이 남아 있다니...
백제시대에 개언사로 창건되었다가 개심사로 이름을 바궜다고 한다.
대웅전의 기단이 백제 때의 것이고 현존 건물은 1475년(성종 6)에 산불로 소실되었다가 1484년(성종 15)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사찰에 들어서 대웅전으로 가는 길에 종무를 보는 사무소를 지나자니 다듬어진 것이 원래 모양을 많이 거스르지 않고 세워진 건물 기중이 인상적이다. 마루에 앉아 한참을 올라와 피곤한 다리를 쉬어본다.
開心寺 마음을 여는 곳, 인석들은 여기까지와서 찌그락짜그락 ㅋ
개심사하면 검색되는 것들 중에 바로 이 나무요~ 청벗꽃나무
이 나무 이 꽃이 무엇인고 한참 신기롭게 바라보니
이 지역에 사시는 분이신지 중년 여성분이 청벚꽃나무라고 알려주신다. 청벚꽃나무는 성격이 까다로워서 아무데서나 번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귀한 나무라고 한다.
연초록빛이 상큼한 담쟁넝쿨이 휘감아 돌고 주변에는 청벚꽃닢이 소복히 내려앉은 산사의 돌담이 밤이 되면 더 정겨울 것 같다.
일반 벚꽃과는 사뭇다른 모습과 빛깔이다.
청벚꽃
8경 서산한우목장
마애삼존불을 보고 개심사로 가는 길에 얼결에 맞닥드린 풍경이다.
정치인 누구의 소유에서 누구의 소유로 넘어가고, 지금은 지나는 길에 간판을 보니 농협중앙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것 같더만.
그런 과정이야 잘 모르겠다만,
차로 달리고 달려도 펼쳐지는 딴 나라같은 풍경에 식곤증으로 잠을 청할만한데도 녀석들이 한껏 웃음 꽃을 피우며 차창밖 풍경에 감탄사를 터뜨린다.
아래 사진은 개심사에서 나오는 길인데, 사실 들어기는 길에 소 떼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광경에 어른인 나도 지켜서서 바라보고 싶더라. 어디 차를 세워놓을 만한 곳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건만 나오는 길에는 언제 다시 오기 어려울 것 같아서 체면 불구하고 잠시 길가에 차를 정차시키고 한 컷 찍어봤다.
1경 해미읍성
여기도 어린이날 행사를 했나?
주차장이 가득 차 옛 해미초등학교 주변까지와서 진남문은 고사하고, 잠양루(동문)까지도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했다.
海美라는 한자를 쓴다고 한다. 바다가 아름답다는 의미.
조선시대부터 쓰던 지명이다.
1416년 태종이 서산 도비산에서 군사훈련 겸 수렵대회인 강무를 하다가 해미에서 하루를 머물다, 당시 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판단해서 덕산에 있던 충청병영을 이설하기 위한 대상지로 정해 1417년(태종 17년)부터 1421년(세종 3년)까지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후 충청지역 육군 최고 지휘기관인 충청병영이 들어서 병마절도사가 배치되어 육군을 지휘하였다. 1651년 청주로 이전하기깢지 병영성으로써의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충청도 5진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이 들어서게 되
조선 후기 속오군(束伍軍)의 최상부 단위인 "영"의 책임자인 營將영장*으로 무장을 파견해 호서좌영장과 해미현감을 겸직하면서 읍성**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영장: 지방내륙군의 중추 역할을 했던 속오군 등의 훈련과 지휘를 전담(專擔)하기 위해 두었다.
**읍성: 지방 관청과 사람들이 사는 곳을 둘러 쌓은 서으로 읍邑이라는 말은 성으로 둘러 쌓인 마을을 의미한다. 읍성은 평상시에 행정중심지가 되고 비상시에는 방어기지간 된다. <서산시 안내 팜플릿 중에서 재구성하여 옮김>
동문 문루에 올라 성안을 바라본 모습
조선시대 부농, 서리(말단관리), 상인의 집을 재현해 놓았다.
충청도 5진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의 현판이 걸려 있는 관청으로 들어가본다.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겸영장의 집무실이었던 동헌 앞에서 아이들과 '얼음땡 놀이'로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이루어졌던 엄숙한 곳에서 너무 설쳐댄거 아니었는지 ㅋ
인근 12개 군,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를 겸한 지위였다네.
*토포사: 도적(산적·화적 등)을 수색, 체포하기 위하여 특정수령이나 진영장(鎭營將)에게 겸임시킨 관직
해미읍성 내아로 자리를 옮겨본다.
건물의 모습이 위엄보다는 단아하고 안정적인 인상을 풍긴다.
관리와 가족이 생활하던 관사였다는군.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2000년 11월 현재 모습으로 복원하였단다.
언젠가 본 것 같다는 느낌, 퓨전 사극드라마 '삼총사'를 촬영한 곳이라고 한다.
G5 광각 카메라로 찍은 모습
G5 일반 카메라로 같은 자리에서 찍은 모습
웬 벌레인가 했는데 서까래에 핀 송진꽃이다.
송진이 나무 나이테와 갈라진 틈을 따라 나와 곱게 피었다.
진남문 앞에 전시된 조선시대의 무기, 성을 공격하는 무기와 더불어 다양한 화포가 전시되어 있다.
진남문에서 동헌 쪽을 바라본 풍경이다.
연휴를 맞아 사람들이 마구마구 나와 봄날을 즐기고 있다. 예전 심난하고 을씨년스럽던 모습과 달리 정비가 잘 된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해진다.
수문장 아저씨와 한컷, 어떤 주문을 받았는지
아이들이 옆에 서도 한 마디 말도 미동도하지 않고 같은 표정으로 자신의 임무에 열중!이시다.
::: 진남루 앞 풍경 :::
솔직히 누각이 내륙의 것에 비해 좀 촌스럽다. ㅎ
멀리 보이는 치성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고, 복원을 성의없이 한 것은 아닐테고... 균형의 미학적인 측면에서 어딘가 엇박자가 나는 듯하다.
충청병영에 충무공 이순신이 10개월 간 근무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충청도의 관찰사가 있던 공주에서와 마친가지로 이곳 해미읍성에서도 인근의 행정의 중심지였기에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여 박해를 한 곳이라고 한다. 정약용도 당시 열흘간 귀양을 왔었고 냎지방 13개 군현의 군사권을 쥐고 있었기에 해당지역 교도 1,000여 명이 해미읍성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사적 제116호
성곽길이 1,800m/ 높이 5m/ 성내 면적 203,592㎡
공산성 성곽이 밖의 옥녀봉 토성까지 합치면 더 되지만 석성만 5km가 넘는 것에 비하면 작은 규모지만, 산성말고 평평한 곳에 읍성을 지었다니 내 눈에는 색다르게 와 닿은 문화재였다.
한 15년 전에도 이곳에 왔었다.
그 때만해도 성곽 안은 휑하니 사람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고, 잡초가 무성했던 곳인데 많은 관심과 투자로 우리 문화유산이 제 자리를 찾는 것 같다.
성곽을 한 바퀴 돌아보고 싶었는데, 문화재 보호와 안전을 위해서 제한하고 있어 아쉬움이 있었지만 산성에 비해 아이들과 움직이기 편리한 나름 인상적인 문화재 탐방이었다.
바다가 있는 서산에 갔는데,
바다라는 고정 관념을 깨고
바다 없이도 재미있고 의미있는 역사기행을 한 것 같다.
좀 고루할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아이들이 즐거워하니 오랜 시간 운전을 했어도 흐믓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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