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
백무동-장터목대피소-천왕봉-로터리대피소-경남환경교육원 14km | 4:40 - (셔틀버스) 중산리
산행 전날 술은 고단함 그 자체다.
다음 날이 산행일이라 뺀들 거렸지만, 마음씨가 워낙 고와서(?) 주는 술을 사양치 못하니 마시면서도 내일이 걱정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리산으로 향하는 버스를 놓치는 꿈을 요란하게 꾼 바람에 새벽 2시경에 잠이 깨어지고 만다. 가난한 위와 장에 오랜만에 쇠고기가 들어갔다고 속이 이글거리더니 창자를 찌르는 듯 복통에 화장실을 두 번이나 들락거린다. 이러다 버스 안에서 큰 실수하는 건 아닌지 겁이 덜커덩... 혹시 몰라서 억지로 뒷간에 한 번 더 ㅠ_ㅠ.
지난달과 마찬가지로 평상시보다 1시간 일찍 출발한다. 확실히 해가 짧아진 것이 분명하다. 안개가 끼었다고 하지만 어둠이 한 달 전보다 짙다.
산행이 예정되어 있어 술을 삼가려는데, 그게 맘대로 되겠어?
어제 저녁부터 못 온다는 사람들의 메시지며 전화 때문에 좀 기운이 빠져 딴생각을 하는 찰라에 버스가 사람 태울 곳을 그냥 지나친다. 몇 백 미터를 걸어온 산악회원들이 입이 거칠다.
그럭저럭 버스에 25명이 올라선다. 그런데 생수가 배달되지 않았다네. 시원하게 얼려놓았는데 어제 저녁에 불참한다는 사람에게 그걸 맡기고 말았으니...
아무튼 내 컨디션도 좋지 않고, 출발부터가 뭐가 자꾸 삐걱거린다. 차분하게 잘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 이러니 맘 편하게 뭔가를 내려놓고 산에 다녀온다는 게 좀 그렇다.
안개가 자욱한 고속도로를 지나 백무동에 도착한다.
원래 코스는 하나인데, 버스 안에서 급작스럽게 도착점에서 거꾸로 깜냥만큼 오르는 B코스를 만들어낸다. 20명만이 원래 코스를 택해서 중산리를 향해서 발걸음을 내딛는다.
천왕봉으로 향하는 산행이 세 번째다. 24년 전에, 2년 전에, 그리고 오늘이다. 2014년 1월 백무동에서 천왕봉으로 원점회귀 하는 산행, 내가 20여 년 전에 지리산 종주를 했다는 생각에 이 코스를 만만하게 보고 페이스를 오버했다가 허기져서 퍼진 기억이 난다. 관광버스에서 내린 많은 사람들이 시원스레 오르지 못하고 꾸물거리는 것을 비웃듯이 따라잡는 맛에 허겁지겁 오르다 참샘 근처에서 다리에 힘이 빠져버리고는 오르고 싶다는 의지까지 꺾어진 쓰라린 기억.
그래서 오늘은 선두 근처는 얼씬 않고 오늘 내 몸 상태를 생각해서 발걸음을 내딛기로 한다.
그러니까 이 코스는 참샘까지 자신의 체력 완급을 잘 조절하면 소지봉을 지나서 장터목까지는 남은 힘으로 비교적 수월하게 산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
그리고 장터목에서 제석봉까지 잠깐만 고생을 하면, 펼쳐지는 풍경에 넋을 빼앗겨 고통보다는 감탄에 젖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아~ 그런데 나만 이런 건지. 오르기 얼마 시작하지 않았는데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만다. 생각 외로 습도가 높은 것 같고, 아침 안개가 심하더니 일교차가 벌어져서 그런지... 아님 어제 마신 술 때문인지 몸이 무겁다.
다시 여름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겠다는 무렵, 고도 1,100을 넘어서자 이제 기온이 만만치 않게 내려간다. 숨을 돌리려 쉬고 있을 때면 등짝의 땀이 식어 서늘하다.
재작년 참샘을 지날 땐 추위에 다 얼어붙고 눈에 덮여서 그랬는지 사람들이 대체 뭘 보고 샘이라고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오늘은 참샘의 참 모습을 본다. 의외로 많은 땀을 흘리는 사람들에게 물병을 채울 수 있는 고지대의 약수가 콸콸 쏟아진다. 시원한 물 한모금을 핑계 삼아 사람들이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뜨거운 심장을 식힌다. 참샘을 지나면서 막바지 가파른 길목에 “심장마비 주의!”라는 푯말이 있었는데 오늘은 볼 수가 없다. ㅎ
그렇게 2년 전 마의 구간을 지나서 고사목이 지키고 있는 고개에서 거친 숨을 내쉬며 보았던 겨우살이를 찾아본다. 아직 초가을이라 나뭇잎이 우거져 녀석을 찾는데 얼마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초록색의 두 덩이의 겨우살이가 아직도 그대로 살아 있다.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 2년 전 1월에 찍은 겨우살이, 앞으로도 계속 사람 손 타지 않고 잘 살아라~ >
이제부터 장터목까지는 그래도 수월한 능선 비슷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키 높은 산죽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1km 정도 되는 구간은 거의 평탄한 오솔길 수준이라 그간 쌓인 피로를 줄일 수 있는 최적의 구간이다.
참샘을 기점으로 일행과의 간격이 더 벌어지는 것 같아 쉼을 자주한다.
산죽 구간을 지나 이제 멀찌감치에서 장터목산장이 보이는 거북바위에 다다르자 도저히 속이 허해서 칼로리를 채우지 않고서는 걸음을 제대로 내딛지 못할 것 같다. 미니 초코바 5~6개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다. 징크스인가? 이 코스 정말 만만하지 않은 것 같다만, 나도 내 몸 상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정말로, 꾸준한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 스트레스라는 것 때문에 마음이든 몸이든 다 빼앗기고 나면 남는 게 없는 것 같다. 이렇게라도 산에 올라 이런 걸 느끼고 원기도 조금이나마 회복하니 다행이라는 생각.
내가 초코바로 허기를 채우고 있을 때 산죽 구간에서 잠깐 뵈었던 하얀색바탕에 파랑과 빨강 실선 격자무늬의 긴팔 셔츠를 입고 씩씩거리면서 오르시던 백발 할아버지께서 일행과 함께 도착해서는 500ml 대용량 캔 맥주로 목을 축이신다.
저 연세에도 참 정성이 대단하다는 생각으로 지나쳤는데, 천왕봉 정상에서 그 어르신을 다시 뵈었다. 장터목에서 후미와 함께 식사를 하고 이동하다보니 시간이 좀 지체된 탓도 있지만... 그 어르신 벌써 천왕봉 봉우리 아래 바위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약식으로 식사를 하고 계신다. 어떤 연예인이 산에 갈 때 인절미를 챙겨서 속을 든든히 한다더니 이 분들은 떡집에서 약식을 사 오셔서 드신다. 영양만점. 이것도 좋은 생각이다.
꾸준함은 무엇을 이기고, 즐기는 것은 꾸준함을 이긴다고 했다. 이 분 즐기는지는 모르겠다만 그 몸으로 꾸준하게 걸어오신 것은 분명하다. 한걸음 한걸음이 힘에 겨울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우리보다 먼저 정상에 도착하신 것이다.
몇 달 전에 계룡산에서 본 70대 노부부를 보면서 젊은 것들이 파도치듯 달리다 말다 하다가 남매탑에서 결국 삼불봉 오르는 것을 포기하더만, 끝까지 봉우리까지 오르시는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었는데, 오늘 또다시 백발 노인의 천왕봉 산행을 보면서 저분의 근간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이제 나이 들어 앞으로 나의 산행도 어찌해야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에 쫓겨 조급해할 것 같은데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꾸준함을 즐긴다.
그래 나도 그렇게 산에 오르자.
삶을 살자.
남과 비교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 남과 비교 당하기도 하겠지. 어쩌냐 내 형편껏 꾸준하게... 조급해하지 말고 넓은 시야를 가지고 하나씩 해 나가자.
자존감을 잃지 말고 말이다.
노인양반 이야기 때문에 장터목에서 제석봉을 지나 정상 천왕봉까지의 이야기를 빼먹고 말았군.
차안에서 일기예보를 보니 산악 정상에 1~4mm의 비가 내린다고 했다. 기상청 예보가 틀리기를 바라며.., 장터목에 도착을 하니 아니나 다를까 시간을 맞추어 구름이 밀려든다. 천왕봉에서 탁 트인 전망을 보기는 그른 것 같다. ㅠㅠ
바람은 땀을 식히는 것을 넘어 체온을 빼앗아 간다. 땀을 말리기보다 체온을 잡아야 할 판이다. 날이 춥다보니 소주 한 병이 금새 없어지고 만다.
점심 전을 펴고 시간을 잡아먹고, 술도 한 잔 마셨더니 근육이 풀어졌나보다.
장터목에서 제석봉을 지나서 천왕봉까지는 2km 좀 못 되는 거리인데, 몇 백 미터 정도는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아이고~ 하는 신음소리가 앞뒤에서 들려온다. ㅋ
어느덧 제석봉 부근에 다다르자 고사목이 널려진 이색적인 풍경이 발목을 잡는다. 멋진 풍경? 알고 보니 슬픈 이야기다.
‘살아서 백년 죽어서 천년이라고 무상의 세월을 말하는 이 고사목 군락지에 얽힌 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1950년대에 숲이 울창하여 대낮에도 어두울 정도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도벌꾼들이 도벌의 흔적을 없애려 불을 질러 그 불이 제석봉을 태워 지그처럼 나무들의 공동묘지가 되었습니다. 탐욕에 눈 먼 인간이 충동적으로 저지른 어리석은 행위가 이처럼 현재까지 부끄러운 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등반대장님 이야기로는 도벌꾼들은 당시 정권의 하수인이었다고 하던데, 그런 이야기까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100년도 못 넘기는 인간의 욕심이 생태계를 이렇게 바꿔놓을 수 있다니 씁쓸하다. 자칫 높은 곳이라 나무들이 기후를 견디지 못하고 저런 거구나 하고 오해를 할 뻔 했다. 그래서 그런지 군데군데 남아 있는 키 큰 나무(키 작은 나무는 인위적으로 식재를 한 것임)와 오른쪽 절벽 위에 그나마 남아 있는 나무를 신기하고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게 되네.
제석봉을 지나면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세모(▲)모양의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근육이 많이 피로해 있지만 조금씩 다가오는 봉우리와 그 언저리에 엷게 입혀지고 있는 단풍 띠를 보니 피곤이 금방 수그러든다. 다행이다. 온다던 비 예보와 달리 구름이 바람에 밀려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따스한 햇볕이 산 등허리를 비춘다. 천왕봉 봉우리 몸뚱이에 다다라 통천문을 지나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펼쳐지는 풍경에 도저히 쉬 발걸음을 내 놓을 수 없다.
풀이며 꽃이며 하나하나 보면 좀 촌스럽고 천박하게 보일 진데, 한 데 어우러지니 이런 천혜의 정원이 따로 없을 것이다.
이 멋진 정원보다... 사람들은 인증샷이 더 필요한 가보다. ㅋㅋ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는 정상석에는 인증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줄이 줄어들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 24년 전 >
이제 내려서는 길만 남았다.
조금 두렵기도 하다. 10km를 넘어서면 어김없이 시작되는 무릎의 통증 때문이다.
등반대장님의 10월 하순 1박2일 덕유산 종주 권유에도 냉큼 받아들일 수 없는 속사정. ㅠ_ㅠ
내려서는 길은 정상에서 밀려 내려온 구름인지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매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하산길이다. 언제 시작될지 모를 통증에 대한 날카로운 신경 씀씀이에 고단할 뿐 이다. 게다가 새벽에 잠을 설쳐서 그런지 졸립다. 그만큼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이다.
로터리대피소에서 계획대로 칼바위가 아닌 경상남도환경교육원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일부 일행은 셔틀버스 기다리는 시간이나 거니는 시간이나 그게 그것이라면서 연세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칼바위로 향한다.
셔틀버스는 1시간 간격으로 있는데, 내가 산행 개념도에 셔틀버스 시간표까지 집어넣었다. 로터리 대피소에서 제각기 남은 체력과 시간을 감안해서 코스를 잡아 내려간다.
어림잡아 시간을 보니 버스시간에 맞게 내려갈 수 있으리라...
사실 2.8km인데 2.3km로 잘못 본 것이다. 그러니 내려가면서 계속 투덜댈 수밖에 ㅎㅎ
어쨌든 1시간 안에 맞춰서 내려가기로 한다.
경상남도환경교육원~중산리탐방지원센터 구간 셔틀버스 이용
http://www.sancheong.go.kr/www/contents.do?key=267
셔틀버스도 줄을 서야 한다.
피곤함에도 벤치에 앉기보다 서서 줄을 선 덕택에 차에서는 앉아서 내려갈 수 있었다. 10여분 되는 거리다. 걸어서도 가뿐하게 내려갈 수 있다는 친구 녀석의 말! 차를 타고 내려가다 보니 2,000원 내고 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만...
그런데 그것보다 근원적인 것.
왜 이 구역 순환버스는 독점이냐? 2,000원, 현찰만 내야하는데 돈 통이 불전함 이다.
관람도 하지 않는 문화재 관람료 내는 것 보다는 낫지만 괜히 이런저런 불편한 생각이 든다. 셔틀버스가 내려준 주차장이 소형전용 주차장이라 대형버스 주차장까지 1.5km는 걸어내려가야 한다. 또 다시 욱~ 한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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