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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맹씨고택~설화산~외암민속마을

by 여.울.목 2016. 10. 12.

무난한 문화기행

아산맹씨행단~설화산~아산외암민속마을

산행 거리 5km | 2:00 | 2.2km/h





2016-10-12_10-40-51설화산.gpx



처음 설화산을 오를 생각만으로 방문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동하는 구간이 아산맹씨행단(사적 제109호)에서 아산외암미속마을(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이어져서 이런저런 역사와 옛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듣게 되었다.





아산 맹씨고택의 입구이다.
조선시대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1360~1438)의 집안이 살던 곳이다. 원래 최영장군이 살던 집이었는데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가 정란을 피하여 거처를 옮겨 살게된 집이다.

대문 앞에 써 있는 경고성 문구... 아산에 있는 현충사 - 아산현충사와 같이 아산에 있기에 아산 맹씨행단이나 아산 맹씨고택이라고 한다. 맹씨는 단일 본으로 아산이 아니라 '신창'맹씨라고 강조를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맹씨의 본을 아산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맹씨고택에 들어서는 첫 관문, 행랑채와 창고가 제법 규모 있다.



언젠가 1박2일 이라는 프로에서도 본 것 같다. 숫자가 쓰여진 광의 칸막이도 눈에 들어 온다. 한 나라의 재상이 살던 집이라 역시 집안을 들어서자마자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여러 매체에 노출된 맹씨고택 한 채만 본다면,
덩그러니 남아 있는 고택 한 채에서 검소하게 사셨나보다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남아 있는 것은 안채의 역할을 했던 건물이라서 그런 것이고 실제 안내문에도 나와 있듯이 7,851평방미터 약2,400평이나 되는 큰 규모의 대지이다. 당시 권력가들의 택지규모가 어떤지 잘 모르겠다만 평민들이 사는 곳하고는 역시 비교를 할 수 없겟지.


맹씨고택 앞에 세워진 시설 안내도
후문 밖으로 나가 구괴정까지의 농경지를 포함한 땅이 다 해당이 된다고 한다.




대문을 들어서 고택으로 가다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것이 은행나무다.
맹사성 정승이 1400년 경에 심은 나무의 뿌리에서 싹이 터서 원목 옆 사방에서 돋아니서 지금과 같은 거목으로 자라났다고 한다.
해설사의 말로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학문을 가르쳤다고 해서 유학자들이 은행나무를 심고 그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쳣다고한다. 맹사성도 그 뜻으로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하네.
가을이 더 깊어지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더욱 볼만하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 때문에 이곳이 맹씨행단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사전을 찾아보니 杏壇이란 뜻이 학문을 배워 익히는 곳을 이른다고 한다. 공자가 은행나무의 단 위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니 해설사 말이 맞는 이야기다.

 

 

맹씨 고택
맹씨 고택은 1220년(고려 충숙왕 17년) 2월 최영의 부친 최원직이 지엇다고 전하며, 실제로 최영이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1388년(우왕 14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따른 정란으로 최영이 죽은 뒤, 비어 있던 집에 맹사성의 아버지가 정란을 피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기록에 따르면 1482년(성종13년)에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하고, 1642년(인조20년), 1814년(순조14년)과 1929년에 각각 건물을 손질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일본인이 살면서 가옥을 많이 훼손하였다고 한다.
결국 남은 것은 사진에 보이는 건물이다.
건물에 부엌이 따로 없으니까 원래 부엌의 역할을 하는 건물이 따로 있는 규모가 있는 건축물 집단이었을 것 같다.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물이라니 이것이 사랑채였는지 안채였는지 내 우둔한 눈과 머리로는 가늠이 되질 않는다만, 맹사성과 최영이 직접 살았다고 하니깐...

긴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번 보수를 해서 무엇이 진짜 고려시대의 것인지 헷갈릴지도 모르지만,
낱낱
재료 짜맞추어 만든 구조물에 남아있는 고부재와 창호 등이 견실한 고법을 간직한 고려시대의 것으로 귀중한 건축물로 평가된다고 한다.
"工"자형 맞배지붕으로 건평은 90.72평방미터, 27.5평이란다.
언젠가 집을 보수하면서 집의 방향이 틀어졌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니 한옥은 조립식처럼 전체적으로 옮겨 놓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철콘 같으면 건물을 부수고 잔해는 폐기해야 하는데, 맹씨 행단 내에 있는 세덕사라는 신창맹씨 삼대의 위패를 모신 사우도 흥선대원군의 사원 철폐정책으로 없어지게 된 사원의 건축재를 이용해서 지어졌다고 하니 더 오래가고 친환경적인 것은 분명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뒤에서 본 모습이다.
건물 앞 아궁이의 연기가 온돌을 데우고 빠지는 굴뚝이 양쪽으로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의 마루, 대청문은 모두 활짝 열리는 구조인데 고려시대의 건축물이라서 아래 사진의 오른쪽부분만 사람들이 드나들도록 열고 닫게 되어 있고, 왼쪽에는 문지방으로 치자면 높아서 사람이 다니기 보다는 지금의 창호 역할을 하게 기본구조가 되어 있더군.



마루는 앞 뒤로 문과 창호로 뻥~ 뚫려 있고,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방 2칸씩 마주보고 총 4칸의 방이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2칸의 방은 큰방과 작은방으로 마로로 문도 나 있지만, 둘은 쪽문으로 연결이 되어 있더군.



건축물의 짜임새에서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는데,
해설사님도 잘 모르시는 것 같고, 다만 아래 사진처럼 기둥과 보가 만나는 부분의 포가 저리 휘황찬란한 것은 조선시대 이후로는 볼 수가 없는 형태라고 한다네.
검소하고 실용적인 것을 강조하는 조선시대에는 민가에서 저런 것은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여기저기 보수한 슨적이 나타난다.
기둥도 밑이 많이 썩었었는지 다른 나무로 이어 댄 흔적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집이란 사람들이 살면서 이렇게 고쳐가면서 사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콘크리트 기둥같으면 이어붙일 생각을 전혀 못했을 것 같은데 ㅋ

행단의 규모...
왼쪽이 고택이고, 오른쪽이 은행나무이고 그 사이에 따로 담장과 문이 있는 건물이 신창맹씨 선조 삼대의 위패를 모신 사우이고, 그 오른쪽으로는 밖으로 나가는 북쪽문이 일반집 대문 규모른 나 있다.



서쪽으로는 구괴정으로 가는 서쪽문과 구괴정으로 길이 있다.
현재는 고택만 남아 있어서 그렇지 내벽와 외벽으로 구성된 꽤 큰 규모의 저택이었던 모양이다.


구괴정으로 가는길에 구불구불 소나무가 참 운치있다.
구괴정까지 가볼 요량이었지만, 밭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보니 내가 괜한 사치를 부리는 것 같아서 차마 발길을 더 내딛지 못하겠더군.
가보지는 못했어도, 구괴정은 맹사성이 황희, 권진 정승과 함께 느티나무 세 그루씩 아홉그루를 심었기에 구괴정이라고 이름지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아무리 검소하고 청백리였다지만, 상류층 냄시가 난다. ㅎㅎㅎ
해설사님 말로는 맹사성 집안도 고려 때부터 뼈대 있던 집안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사형당할 위기에서도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살아나기도 하고... 그래도 이념 전쟁을 하지 않고 개인의 사리사욕을 내세우지 않았다는 청렴하고 지혜로운 분이라고 한다.


이제 설화산을 올라나 볼까.
맹씨 행단을 나와 좁은 개천을 따라 난 전형적인 농촌의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된다네.
멍하니 지나다가는 엉뚱한 길로 빠질뻔.
아주 앙증맞게 설화산 정상까지 '1,700미터'라는 이정표가 겸손하게 세워져 있다.
바로 포장길은 끝이나고 이 길이 맞나? 의심들 정도로 들머리는 여느 야산의 성묫길 같이 이어진다. 느티나무 묘목을 심은 밭을 지나 분묘 사이로 난 길로 의심쩍은 발길을 들이대니,
예상대로 산행길이 나타난다. - 숲으로 우거졌지만 탄탄하게 다져진 흙길

그 전까지는 대부분 야산에서와 같이 햇볕이 잘 드니 이런저런 지장물로 들머리를 찾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거든.

오르는 길에 이 동네 초입에 눈쌀을 찌푸리게 했던 채석의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계단식으로 돌맹이를 갉아먹은 것이 돌산이 공원묘지처럼 되어버린 것 같다. 묘지는 그나마 잔디라도 자라지, 채석장이라 그런지 풀도 잘 자라지 않으니 자연스런 암반이 노출된 것과 달리 사람에 의해 파헤쳐진 돌산의 속살을 보니 내 몸뚱이에 금새 뭐에 긁혀 생긴 생채기라도 생긴것 처럼 쓰라린 느낌이 든다.

길은 그리 험하지 않다.
약수터 가는 길보다는 가파르고 일반 등산로보다는 완만하고, 딱 우리동네 뒷산이다.
딱 여기까지만이다. ㅋ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맹씨행단쪽과 달리, 초원아파트 쪽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그런지 그쪽에서 오는 길과 만나는 부분부터는 등산로 자체가 다르다.
어찌나 사람들이 촐랑대며 댕기는지 길 위에 잡초하나 보이지 않고 넓다랐다.
아파트에서 바랍쏘이러 나온 사람들이 해발360미터 지점의 공터 운동시설이 마련된 공간에서 각자 집에서 싸들고 나온 간식과 보온병 음료를 꺼내 푸짐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거기서부터 설화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날까로운 비탈길이 이어지는 고개까지는 예전에 화전민이 살았는지 군데군데 평평한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초원아파트 아주머니들의 수다소리를 뒤로 하고부터는 길 자체가 암반이다.
그 암반길을 몇 십 미터가량 올라서면 분수령에 도착을 한다.
천안광덕산까지 이어지는 8.5km, 외암민속마을로 내려서는 1.4km의 산행길 등...
그 동안의 동네 뒷산과 달리 골산에서 보여주는 가파른 길이 시작되서 그런지 우리 일행 중 몇몇은 여기부터 240미터 남은 설화산 정상을 포기한다.



맹씨행단에서 설화산 정상까지 1.96km
설화산 정상이 있는 봉우리를 문필봉이라고 한다.
계룡산에도 문필봉이 있는데, 문필봉 주변에서는 많은 인물이 나온다고 한다.
연천봉 가는 길에 페쇄된 탐방로 봉우리에도 문필봉이 있고, 박정자 먹뱅이골 위로도 문필봉이 있고, 여기 설화산에도 문필봉이 있다.
아마 봉우리 끝이 붓 끝과 같이 뾰족하게 솟아 있어서 그런가 보다. 붓을 닮았고, 그 기세가 남다르니 그 기운을 받아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지. 실제로도 그런가 보다.
맹사성의 어머니의 태몽도 설화산이 입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었다네~ 외암리 쪽에서는 이간선생을 비롯한 많은 대학자들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설화는 바위에 눈꽃 모양의 큰 무늬가 있어 눈꽃이 핀것 같다고 해서 설화산이라고 한다.

아산시청 홈페이지 자료를 보니 이곳이 칠승팔장(칠정승 팔장군) 지지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
투장*이 성행해서 가뭉이 들면 투장한 곳을 찾아 파헤치고 기우제를 지내는 으시시한 관습이 내려오고 있다네.
*투장: 남의 산이나 묏자리에 몰래 장사를 지내는 것



정상에는 부지런한 사람이 매번 태극기를 갈아 다는지 깔끔하게 선명하게 가을 하늘에 펄럭인다.



정상에 서서 북쪽으로 난 너른 들을 보니 맘속까지 뻥 뚫리는 거 같더군.
설화산에서도 여러 길로 나뉘어진다.
왔던길을 비롯해서, 데이콤 위성기지국이 있는 외암2이, 오봉암, 외암 저수지...
그러고 보면 산이 교통이 저해요인 같지만, 인간은 자연의 일부니까 산이 옛날로 치면 교통의 요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오죽합면 지리산 정산 근처에 장이 서서 그 이름이 장터목이겠어.





멀리 8.5km가면 만날수 있다는 광덕산도 보이고,



광덕산 정상에서 볼 수 있는 야생화~




우리가 내려설 외암리 민속마을의 초가지붕이 어렴풋이 보인다.


외암리 민속마을까지는 다시 분기점까지 240m를 내려와서
완만하고 편안한 길을 따라 내려서면 된다.
외암리에서 오르면 조금 헷갈릴 것 같은 것이 트렉터로 내 놓은 길이 하도 많아서 잘못해서 다른 길로 들어설 수도 있을 것이다. 농사를 지으려고 낸 길은 아닌 것 같고, 풍수와 관련해서...

드디어 외암리민속마을이 보인다.
예전 60~70년대 농촌마을 같다. 이 마을로 들어올 때는 어른 1인당 2,000원씩 입장료를 내야 한다네.
어쩌다 입장료를 아낀 셈이되고 말았네. 마을에서 지푸라기 축제를 한고 한창 준비중이더군.



멀리 우리가 올랐던 설화산도 보이고...





일부러 꾸며놓은 면도 있지만 이것저것 예전의 농촌풍경을 한껏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더군.



우리가 하산하면서 지나친 곳은 실제 마을 주민들이 살던 자연부락이고,
입장료 받는 곳을 기준으로 들어서서 왼쪽으로 민속촌 비슷하게 꾸며놓은 곳에서는 퓨전공연이며 다도체험 등이 진행중 중이었다.



조선시대의 양반집 안채다.
부엌이 딸려 있고, 대청마루가 훤하게 뚫려 있는 것이 맹씨고택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




아산 민속마을을 나와 근처에 지중해라는 곳을 갔지.
지중해라는 커피전문점인줄 알았는데, 무슨 고층의 아파트 군락인 ..팰리스 앞의 한 블록 전체 건물이 작당(ㅋ)을 하고는 메마를 지중해풍의 외관으로 건물을 치장했다.
나름 괜찮은 발상이구나.
밤에 오면 더 환상적이겠군.

제과점이든, 커피전문점이든, 옷가게든, 중국집이든 다 저런 모양새다.
이색적이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