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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부여 성흥산성 - 가림성, 사랑나무

by 여.울.목 2016. 11. 6.

부여 성흥산성

가림성, 사랑나무

 


 

 

성흥산성

 

부여 가림성(扶餘 加林成) - 백제 당시에는 가림성이라고 불렀다.

1963.1.21. 사적 제4호로 지정

충남 부여군 임천면 성흥로 97번길 167182,526

 

사비천도 이전 백제 동성왕 23(501)에 쌓은 백제시대의 산성.

백제 수도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해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백제 동성왕 23(501)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령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 드리는 사당이 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18세기 중엽까지 사용되었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 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해발 268미터의 산 정상부에 돌로 쌓은 석성과 그 아래쪽에 흙과 돌로 쌓은 토성이 있다. 석성의 둘레는 1,350미터이고 높이는 4미터 가량 된다.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안에는 남, , 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 있다.

내성: 길이 1,325m, 면적 92,568,

외성: 길이 706m, 면적 38,173

성흥산성이라고 열심히 찾아왔는데, 안내판에 쓰여있는 지명은 온통 가림성이다.

백제시대에는 가림성이라고 불리었다고 하네. **산성이 아니고 가림성이라는 정식 명칭이 쓰였으니 군사적 요충지임이 분명하다.

최근에 이루어진 발굴의 흔적을 안내판에 담아 이해를 돕고 있다.

 

 




성흥산성 남문지로 올라가려면 이 거대한 바위틈을 지나야 한다. 성흥산 자체는 육산인데 특이하게 이 부분만 이렇게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일부 역암층도 보이더라.
가만보니 자연스레 이 입구가 하나의 출입문 역할을 한 것 같단 생각도 든다.





바위 틈에 누군가 벌을 키우고 계시넹...



이 거대한 바위 위에 이런저러 비석이 세워져 있었나보다. 지금은 박물관이나 아님 여기에 들오올 때 주욱~ 늘어 서 있던 비석군에 이 자리의 임자가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림성, 성흥산성의 남문 터이다. 남문터는 산성보다 더 유명한 저 사랑나무가 눈에 더 들어찬다.

 




::: 사랑나무 :::

하얀 커풀티를 입은 한 쌍의 남녀가 이 거대한 느티나무 뿌리에 앉아 자기들만의 의식을 거행하더만... ㅋ

눈치 없게도 우리 아이들은 그 주변을 맴돌면서 신이 나서 떠들어대고 ㅎ

2011년도 SBS드라마 '뿌리깊은나무'의 한 장면을 찍은 곳으로도 유명하더군.











사랑나무가 주는 벅찬 감동을 잠시 뒤로 하고 성곽길을 걷기로 한다.
성곽길을 따라 반시계방향으로 천천히 돌았다.
우리가 돌았던 코스는 성흥산성의 내성에 해당되는 길이었다.

2016-11-06_11-24-28_성흥산성.gpx







2011년과 2015년에 발굴조사를 했다는 성곽지다. 발굴만 하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저리 덮어놓기만 했다.
아무래도 자치단체에 금전적 여유가 없어서 복원을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외성으로 나가는 길, 동문터 성곽의 모습.
복원한지 얼마 안 되는 모양새다.



남문쪽에서 동문터를 지나 북쪽까지는 발굴조사 때문에 이런저런 중장비가 다녀서 길이 정비된 것은 아니지만 넓게 내어져 있었다. 이런 산 위에서도 물이 나온다니... 북쪽방면에 3개의 우물터 중 하나가 있는 곳에서 4차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다.



백제시대의 초축(처음 쌓음) 성벽과 통일신라 이후의 보축부(보강해서 쌓은 부분), 조선시대 수축 성벽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냥 봐도 불이 이곳으로 모여드는 계곡과 같은 느낌이 들잖아~

조선시대 수구* 및 도수로**를 확인했단다.

*수구: 하수도 저수지 따위에서 물을 끌어들이거나 흘려 내보내는

**도수로: 물을 끌어들이는 길

 



물이 나오는 곳 확대~



북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그냥 길만 남아 있다. 그래도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가 옛 성곽을 따라 그대로 이어진 것 같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이런 길 곳곳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돌무지가 이어져 있어 18세기까지 성으로써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북쪽에서 서쪽~ 남쪽으로 이어지는 복원 전의 성곽길은 등산할 맛 나는 그런 길이다. 땀 좀 뺐지.

아래 사진은 서문터의 석축이다.



간혹 길을 잃을 것 같으면,
언젠가는 복원하리라 맘 먹은 것 같은 빨깐색 플라스택 말뚝이 성곽길을 자~ 알(?) 안내해주고 있다.
아마 조금이라도 더 더운 날씨에 왔다면, 억센 풀숲의 기운 때문에 고생 많았을 것 같다.
그나마 근래에 성곽길을 따라 가지치기며 잡풀을 잘라낸 흔적이 역력하다.



드디어 남쪽 성곽쪽으로... 여기서부터 성곽을 제대로 복원했기 때문에 고생길이 이제 끝난 셈이다.
고생했다. 아그들아~



요렇게 남문터, 사랑나무로 성곽길이 이어진다.



안내문에서 소개한 내용처럼
멀리 보이는 저 물가가 금강이다. 금강 하구.
왼쪽 부분이 강경읍 쪽이 것 같고, 그 오른쪽으로 강 너머는 전라북도 익산이다.
그러니 웅진성과 사비성, 무왕과 익산 미륵사지...  그리 멀리 있지도 않는 곳이다.
그리고 강이 휘 돌아 가는 곳이니 강을 끼고 방어하기 좋은, 사비성을 지키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음도 분명하리라.

백가를 보내 지키게 할만하지?

백가는 ... 승자의 입장에서 역사가 쓰인다니까,

동성왕을 시해한 자로 알려져 있다.

또 어떤 학자들은 무령왕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동성왕을 시해하라고 시키고

그가 필요없어지자 뒤끝을 깨끗히하려고 토사구팽했다는 설도 있더라.

 

무녕왕과 관련된 그 백가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는 성흥산성, 아니 가림성이다.



금강이 여기를 휘 돌아 남쪽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저기 강을 건너면 논산시 석성면이다.



그렇게 한 시간 못되는 시간 동안 2km 조금 넘는 성곽길을 여유있게 사랑도 느끼고 가을을 느끼면서 한껏 가을 햇살을 받고 돌아왔당께롱~

임천면사무소에서 이곳 성흥산성까지 올라오는 길은 단풍터널이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차를 세우고 한컷!

차를 아예 임천면사무소나 임천초등학교에 세워놓고서는 여유롭게 이길을 따라 올라왔으면 더 좋았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