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0. 11:49~16:41 (4:52)
신원사-보광암-연천봉 왕복 6.1km
*술 좀 그만 드세요
토요일 저녁 산행친구와 함께 얼큰하게 술을 마셨다. 술자리에서는 일요일 산행 모의를 했다. 신원사-연천봉을 거쳐 갑사나 동학사로 하산 길을 잡아보자고 했다. 일요일아침. 일어나니 아 직도 입 안 가득 기분 나쁜 술기운이 넘쳐난다. 밤새 이 술 냄새에 고역을 치렀을 가족을 바라보니 미안스럽기만 하다.
꾸역꾸역 아침밥을 우겨 먹고 친구의 문자메시지가 있는지 살핀다. 시간도 벌써 10시를 훌쩍 넘겼다. ‘산성동 11시 10분발 310번 버스 탈 계획임’ 이라고 내 몸이 원하는 바와 달리 손가락이 움직여 문자를 보내 의사타진을 한다. ‘난 어제 술 땜에...’. 내 속 맘도 그런데... 어떻게 할까?
*아빠 같이 가요
“경식아! 집에서 소리 지르던지 게임하던지 동생하고 싸움만 하지 말고 아빠랑 산이나 갈래?”
녀석의 대답은 의외로 시원스럽다. “네 아빠. 갈게요.” 괜한 말을 꺼냈나? 아이 엄마도 공부해봤자 얼마나 하겠냐며 자연과 함께 얻는 것이 있을 거라며 내게 아이를 떠민다. 일이 이쯤 되자 내 몸뚱이의 의사와 달리 재빨리 산행 채비를 시작하는데, 시간은 10시 45분이다. 어떻게 옷을 입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먼저 채비를 갖춘 녀석에게 고모 댁에 가서 아이젠을 빌려오게 하고, 시간이 없어 버스정류장까지는 집사람의 호위를 받기로 했는데, 승강기에서 내려 걸어가는 동안 위아래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휴대전화기가 없다. 집사람을 다시 집으로 올려 보내고, 난 점심거리를 사러 아이들을 데리고 편의점으로 향한다. 편의점으로 막 들어서려는데 배낭 안에서 울려 퍼지는 전화벨소리...
딸아이와 집사람은 바이바이 손을 흔들고 집으로 돌아가고, 아들과 함께 가까스로 310번 버스에 오른다. 버스 제일 뒷자리를 전세 내고는 창밖 풍경에 심취한 울 아들. 아양을 떨며 과도한 스킨십을 곁들여 말을 건네도 미소만 짓고 단답형 말고는 성의 있는 대답은 하지 않는다. 산행이 걱정돼서 그런 걸까?
*진정한 산길이 좋아요
신원사 주차장은 흐린 날씨에도 만원이다. 관광버스도 2대나 된다. 동네 슈퍼에서 챙기지 못한 생수 한 병과 초코바 두 개를 챙겨 매표소를 지난다. 계룡산 안내도 앞에서 짐을 다시 정리하고 GPS를 켜는 동안 아이는 유심히 등산코를 쳐다본다. 연천봉까지 간다는 내 말에 눈빛이 초롱거리며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를 가능하고 있다. 제대로 가긴 갈는지 내심 걱정이다.
웬 걸 배낭을 집어 메자 아랫배가 살살 아파온다. 걸음을 걸을수록 더해진다. 신원사 화장실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화장지를 찾느라 배낭을 뒤집고 있는 내게 아이가 하는 말. “아빠 화장실에 화장지 있을 거예요.”
맞다. 경식아 화장지 있더라. 그래도 혹시 몰라서 그랬다. 어제 마신 술기운과 열심히 씨름하는 동안 삼촌과 통화도 하고 나름 혼자서 가상의 적과 눈싸움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의젓하게 초췌해진 아빠를 반긴다.
우리들의 코스는 신원사 매표소에서 금룡암까지 가서 고왕암을 스치는 계곡코스를 타지 않고 보광암 뒷길을 이용하기로, 내가 혼자 정했다. 보광사까지 1.5km정도는 포장된 도로를 걸어야 한다. 경식이가 그 지루하고 갈수록 급해지는 경사로를 맞이하면서 “아빠 저는 산길이 좋아요. 산에 왔는데 산길로 가야죠. 이런 길은 발바닥만 아파요.”
‘크크큭, 네가 쓴 맛을 보지 못했구나. 조금만 기다려다오.’
사실 금룡암을 지나 보광암을 오르는 길은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 정도의 가파름이다. 녀석이 그런 말 할 만도 하다. 요즘은 암자마다 대웅전을 짓나보다. 보광암이 아니라 보광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대웅전 앞 양지바른 곳에서 경식의 발에 아이젠을 끼워주고 있으려니 한 할아버지께서 부러운 양 몇 마디 건넨다만 우린 별 관심이 없다. 아이젠이 아이의 발에 잘 안 맞다보니 그 실랑이에 정신이 팔려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괜히 미안스럽네. 일부러 쌀쌀맞게 군건 아닌데.
*경식이 전망대
본격적인 산행길이다. 원래 코스는 소림원에서부터 연천봉-등운암까지 이어지는 코스였는데, 소림원에서 접어드는 길은 폐쇄를 했고, 그나마 보광사 뒤편에서 시작되는 길은 오늘 와 보니 정식 코스로 등재가 된 것 같다. 대부분 사람들이 타는 고왕암 쪽 계곡 코스를 버리는데, 그건 계곡이 말라 삭막할 것 같아 중간 중간 탁 트인 경치를 보여주고파 산등성이를 따라가는 코스를 잡았다.
처음엔 얕은 구릉을 지나니 콧노래가 절로 나오지? 불규칙한 바위 길에 접어들자 열이 나는지 이내 모자와 귀마개를 벗어 내게 맡긴다. 넘어질듯 하면서도 스틱을 잘 써먹으니 방학동안 축척한 에너지가 꽤 되나보다. 잘도 오른다. 점심 무렵부터 시작한 산행이라 부지런한 사람들은 벌써 하산을 하고 있다. 연신 “아이고, 우리아들 장하네~.” 지나는 어르신마다 돈 안 드는 칭찬을 던져주시니 녀석 힘이 나는지 잘 견뎌낸다. 하지만 어쩐다니, 그렇다고 힘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산행길이다.
잘 다져진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바닥에서만 생활하던 아이에게 불규칙하고 배려도 없는 거친 산길은 아이에게도 쉽게 양보란걸 해주지 않는다. 그저 겸손한 방문만을 허락할 뿐이지.
가파름이 갑자기 심해진다. “경식아 저기 산과 맞닿은 하늘 보이지? 이제 능선이나 봉우리에 거의 다다른 거야. 조금만 힘내면 멋진 경치를 감상할 수 있어.”
아직 힘이 남았는지 힘찬 발길질을 하고 있지만, 뒤에서 쳐다보는 내 눈엔 헛발질을 하거나 네 발로 기어가는 모습이 가엾게만 보이더라.
드디어 첫 번째 뷰포인트다.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방부목으로 전망대까지 마련했다. 봉우리에 해당되지는 않으니까 ‘○○대’를 붙이면 될 것 같아서 경식이와 초코바를 먹어가며 이 전망대 이름을 ‘경식이 전망대’로 하자고 합의를 했다. 핸드폰 등산 어플에 그렇게 흔적을 남긴다. 얼어붙어 하얀 이를 드러낸 것 같은 경천저수지와 노성 들녘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직 산길에 적응이 안 돼 바위 사이를 엉금엉금 기어 다니면서도 아비의 풍경 설명에는 제법 추임새를 넣어 장단을 맞춘다.
*아빠와아들 전망대
연천봉 말고 이 코스에는 ‘경식이 전망대’와 또 하나의 전망대가 있다.
발걸음 떼는 속도가 조금씩 무뎌진다. 힘들어 하는 모습이 역력한데도, 그냥 돌아가자는 말에, “왔으니까 정상까지는 가야죠.” 기특한 녀석. 지난 초여름 산행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잘하면 연천봉까지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든다. 힘든데도 여전히 앞자리는 내게 내어주지 않으려 용을 쓴다. 녀석도 나름 독기를 품은 것 같다. “정상까지 문제없을 것 같아요. 왠지 아세요? 치킨도시락을 먹고 나면 방전된 배터리가 다시 충전 될 거니까요.” 말이라도 예쁘게 하니 좋네.
어찌어찌 두 번째 뷰포인트에 도착했다. 여기에도 보기 좋게 전망대를 지어 놓았다. 저기 향적산부터 이어진 산줄기가 머리봉을 지나 천황봉을 찍고 쌀개봉을 거쳐 관음봉으로 달려가는 모양새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경치를 설명해주려 했건만, 아까와는 달리 추임새커녕 가져온 접의자에 앉아 이래라 저래라 나를 부려 먹는다. 어지간히 지쳤나보다. 그래도 이런저런 말로 살살 부채질하니 금 새 힘을 돋우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지난 전망대를 ‘경식이 전망대’로 했으니 이번 전망대는 ‘지수 전망대’가 어떠냐는 물음에. 단호히 No!
아빠와 함께 왔으니 ‘아빠와아들 전망대’로 하자고 한다. 네 맘대로 해라.
*이젠 강호동 아저씨 이해할 것 같아요
배터리 완전 방전 직전의 경식! 생각 같아서는 업어 주고 싶다만 녀석의 몸무게도 그렇고 여기까지 제 힘으로 왔는데 포기하거나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기엔 너무 아깝다.
핸드폰으로 현 위치를 보여주며 이제 다 왔다며 위로를 하건만, 여기가 끝인 줄 알았는데, “저기 보이는 봉우리가 연천봉이야”라는 나의 솔직한 고백에 울 아들 등운암을 얼마 안 남기고서는 등 굽은 새우만치로 멈춰 선다. 치킨 도시락과 내려가서는 따듯한 찐빵을 약속했는데도 체력의 정점까지 다다랐는지 몹시 힘들어 한다.
등운암은 몇 년 사이 벼락부자라도 만났는지 헬기로 커다란 화강암을 공수해서 석축을 쌓아 성곽 아닌 요새라도 만드는 걸로 착각할 지경이다.
따듯한 햇살이 가득한 대웅전 앞에서 점심 판을 펼 요량이었지만 어째 숙연한 분위기가 밥 먹을 분위기가 아니네. 하는 수 없이 등운암 입구에서 자리를 잡는다.
한껏 먹을 것 같던 녀석이 치킨 덩어리 위주로 배를 채우더니 먼저 자리를 뜬다. 햇살이 따듯하더라도 겨울 산의 식사는 힘들다. 움직임을 멈추니 체온이 내려가 옷깃을 꼭꼭 여미어도 춥고, 국립공원 내에서 불을 피울 수도 없어 좋아하는 라면도 못 끓여주고, 녀석은 보온병의 따듯한 물도 싫단다.
잠시 기분이 쳐진 울 아이에게 하산하는 사람들이 칭찬의 말을 건네자 뱃속에 들어간 음식물이 다시 반응을 일으켜 에너지를 채워주나 보다. 배낭 정리를 하는 내게 어서 연천봉으로 가자고 보챈다.
생각보다 쉽게 오른 연천봉. 멀리서 봤을 때는 새로운 봉우리를 올라야 할 것 같은 막연한 부담으로 짜증이 나는 게 분명하지만, 등운암까지 왔으면 연천봉까지 다 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위험하다 싶을 정도의 가파른 구간만 조심스럽게 오르기만 하면 된다. 생각보다 금방 봉우리에 오른다.
아이는 봉우리에 올라서자,
“아빠! 강호동 아저씨가 왜 1박2일에서 ‘도착을 했~습니다!’하고 소리를 크게 지르는지 알겠어요.”
산, 제 맛을 알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그 맛을 알다니 대견하다.
봉우리에서 또 뭔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기억이 가물거린다.
*낱말놀이
내려가는 길은 북쪽 길을 택했다. 음지라 아직 내린 눈이 그대로지만 남쪽보다는 위험하지 않다.
봉우리에서 뭔가 필(feel)을 받았는지 연신 흥에 겨운 소리를 외쳐댄다. 깍깍거리는 까마귀에게 시비도 걸어보고 제법 몰아치는 봉우리의 찬바람에도 움츠리지 않고 강렬한 눈빛을 토해낸다.
오를 때는 어찌어찌 올랐어도 자주 산에 오르지 않는 사람들은 내려갈 때가 더 힘든 법이다. 아까 네 발로 기어 올라온 그 곳곳을 내려가려니 발 디딜 곳 찾기가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이러다간 오름보다 내림에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
돌아가는 버스시간은 17:00 이다. 다음 버스는 18:00 깜깜한 밤이다. 지금까지의 추세로 보면 자칫 차를 놓치고 말 것 같구나.
조금 힘을 내서 파닥파닥 내려가자는 말에 성실하게 따라주는 아들. 고마워.
아이의 내려가는 고통을 줄여보려고 ‘아빠와아들 전망대’를 지나면서 끝말잇기를 시작했다. 몇 번 접어주니 신이 난 것 같은데, 그러다보니 내가 흥미를 잃고 만다. 이젠 열 고개 낱말 맞추기다. 나에게는 다섯 고개 만에 맞춰야 한다고 패널티를 부여한다.
그렇게 티격태격 정겨운 말을 나누며 ‘경식이 전망대’에 도착하니, 남은 내리막이 남향이라 오전과 달리 하산 길은 꽤나 질퍽거린다. 아이는 스틱을 잡고 조심스레 잘 내려간다만 이런 길에서 어쩔 수 없기에 두 번이나 뒤로 넘어져 파란 점퍼에 초콜릿색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난다.
다른 때 같으면 분에 못 이겨 울음을 짜냈을 텐데, 단지 걱정하는 건 엄마의 꾸중이란다.
“경식아 괜찮아. 엄마도 이런 상황에서는 넘어지셔서 옷을 버리셨을 거야. 너만 안 다쳤으면 돼.”
“아빠 정말 괜찮겠죠?”
어느덧 걱정스런 하산길이 끝나고 경식이가 싫어한다던 그 포장길을 만나더니, 이제는 산길보다 이 길이 더 좋다고 변심을 토로한다. 원래 사람 맘이 그런 거야.
*찐빵보다는 아이스크림
내려오는 길에 내가 고삐를 늦추지 않아 내내 힘을 썼나보다. 따듯한 찐빵보다는 시원한 아이스크림으로 속을 달궈진 속을 달래보고 싶다네. 아직 20분이나 남았기에 화장실에 들러 물티슈로 녀석 옷에 묻은 초콜릿을 닦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한 후 주차장 근처 슈퍼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찾는데, 겨울이라 얼음과자는 취급 안 한다네~.
실망한 경식. 도시락 살 때 끼워 판 사과음료라도 먹겠다기에 빨대를 꽂아주는데 내 손이 얼어 빨대를 버스 안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또 다시 실망하는 우리 아들.
30여 분 걸리는 버스 길. SNS에 오늘 일을 이러쿵저러쿵 올리다가 “오늘 재밌었니?”라는 물음을 주고, 그 대답을 적으려 말을 건넸더니만. 그새 잠이 들고 말았다.
경식아! 나중에 아빠 늙으면 네가 경치 좋은 산 좀 챙겨 다녀주렴. 약속할 수 있겠니? 왜 대답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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