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성판악 코스
2013.03.10. 05:53~14:25 (8:31) | 19.2km
3.8. 금요일
코감기가 수그러들 생각을 않는다. 그 영향으로 요럴 때마다 이놈의 만성결막염이 더 문제다. 딸아이의 생일을 대충 얼버무리고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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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토요일
새벽 3시. 눈(目)때문이라도 더 자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누워 있자니 몸이 자꾸 뒤틀 거린다.
새벽 4시 40분. 10분 지연 출발이지만 이런 시간에 열정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을 보니 흐뭇할 뿐이다.
무겁게 가라앉은 안개 더미 때문에 온 신경을 눈으로 끌어 모아야 한다. 눈에 모래가 들어간 듯 뻑뻑하다. 차를 세워 놓고 눈물을 넣을 수 없고, 안경을 쓰면 코와 관자놀이가 눌려 눈알이 튀어 나올 통증이 더 크니 인내심만 키울 뿐이다. 이판사판? 안개가 걷힐 기세가 아니다. 도저히 9시 30분까지 블루나래에 오를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든다. 배를 놓치면, 첫 날엔 천관산을 둘째 날엔 팔영산 이라도 올라보자고 친구와 농을 주고받았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다. 안개는 줄포 휴게소 부근을 지나서야 두꺼운 옷을 벗기 시작한다. 고속도로를 벗어나도 타고 가야할 국도도 만만치 않다. 시간을 줄이려면 국도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
그래도 다행히 여객선 터미널에서 개찰 전까지 30여분의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여객터미널 안은 같은 배를 타려는 사람들로 장터를 열었다. 거짓말 조금 보테서 7할은 등산객 이다. 다들 한라산에서 만날 사람들인가? 배는 바다 위를 1시간 40여분 동안 매끄럽게 스치고 지나간다. 부족한 잠을 채워보려 맥주도 모자라 고량주를 마셔대지만... 여행의 설렘이 더 큰지 쉬 잠을 이룰 수 없다.
인터넷검색 달인 총무님 덕에 동문시장 한 복판에서 돼지 모듬 구이로 점심을 거하게 해결한다. 좀 서먹했던 사람들의 사이는 한라산맑은물(소주) 한 잔에 좁혀든다. 목적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술이 오르기 전에 올레길로 나선다.
올레17코스 약 3km. 전체를 탐방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올레길을 찾아, 올레길을 따라 걷는 동안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쉬 흘려보내고 말았을 – 느리고 평범하게만 보이던 것들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떨어지면 지저분한 쓰레기로만 남는 목련이 꽃잎을 따 차를 만든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지저분한 선입견을 고처 세운다. 바람을 막으려 쌓은 돌담에 바른 콘크리트가 사람의 사는 이 터전에서는 그리 밉게만 보이지 않는다. 올레길은 이렇게 자연과 사람이 사는 곳을 자연스럽게 연결해주는 것 같다. 여느 관광프로그램을 따랐다면 그저 차를 타고 이동해 오솔길만을 걸었을 텐데, 이렇게 걸으니 찾아 걷는 이 길이 더 정겹게 가슴에 남는다.
숙소에서 한 시간을 뒹굴다 나온 제주는 바람의 도시다. 내일 산행이 걱정이다. 센 바람에 묻어오는 흙 알갱이가 따갑게 뺨을 때리는데, 한라산 한복판은 어떨지... 저녁은 보은사람이 만들고 보령사람이 날라다주는 해물탕이다. 좀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자리였기에 분위기는 짱인데, 낼 산행을 위해서 술잔 돌리고픈 마음을 어렵게 접는다. 생맥주라고는 삿뽀로 밖에 없다는 숙소 맞은편 ‘삿뽀로’주점에서 기어코 맥주병을 줄 세우고서야 ‘산지물 호텔’로 들어선다.
3.10 일요일
잠을 잔건가? 나를 위해 기꺼이 침대 아래편에 불편한 잠자리를 잡은 친구는 코를 골며 잘 자는데, 정작 난 제주의 밤이 아쉬워서 그런지 연신 뒤척이기만 한다. 방음이 안 되는 모텔, 옆방 모닝콜, 연이어 일행들의 핸펀 알람소리...
‘신제주’엔 밤이 없다. 끼니를 해결하려 나오니 밤새 놀다 허기진 젊은 청춘의 주린 배를 채워주려 웬만한 가게는 24시간 영업을 위해 붉을 열심히 밝히고 있다.
성판악까지 택시로 이동한다. 미터요금은 1만 5천 얼마... 이른 시간이기에 2만원에 거래를 마친다. 새벽에 실패한 밀어내기를 위해 깜깜한 화장실을 헤매고 있자니 친구가 스위치를 찾아 불을 밝혀준다. 내게 빛을 준 친구여~ 땡큐.
이런저런 볼일까지 다 보고 우리 일행이 오르기 시작한 시간은 05:45. 사위는 여전히 깜깜하다. 다행히 그 억센 바람은 밤새 피곤했는지 잠을 잔다. 준비운동에다 GPS-블루투스 연결이니 뭐니 하다 보니 일행과 5분여의 시간 차이가 났다.
일행의 렌턴 불빛을 만나기까지 한참을 걸은 것 같다. 이 사람들 이렇게 초반에 힘 빼도 되는 건지...
20여분이 지나 성널오름 부근부터는 제법 급해지는 경사 덕택에 헤어졌던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성널오름 근처를 지나면 다시 완만한 길로 접어들며 날도 천천히 밝아 온다. 온통 산죽 세상이다. 1시간 정도 못되게 걸으니 속밭대피소다. 아마 산죽밭의 한 가운데란 뜻으로 ‘속밭’이란 말을 쓴건 아닐까? 무인 대피소인 이곳은 추위를 잠시 피할 수 있는 지붕과 유리벽으로 된 10평정도 되는 건물이다. 어느덧 해가 제법 기운을 차려 사방을 잘 볼 수 있다.
폭설에도 거뜬히 견딜 수 있게 세운 산행안내표지가 인상적이다. 워낙 코스가 긴 편이고, 다른 곳과 달리 백록담까지 가는 길 내내 다른 곳에서 오는 길과 만나는 곳도 없다보니, 백록담까지 얼마이고 출발점부터 얼마를 왔는지, 내가 있는 곳의 지형세가 어느 정도인지 ‘백록담-현위치-탐방안내소’의 도해로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속밭’을 지나 1시간 30분 정도를 걸으면 진달래밭대피소가 나온다. ‘속밭’부터 사라악샘까지 40%구간은 완만한 길이다. 마침 한창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담느라 사람들마다 호들갑이다. 저 언덕을 오르면 더 잘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 보폭을 늘려본다. 나머지 60%는 어려운 코스라고 안내하고 있다. 중간 중간 녹지 않은 얼음도 있고, 길은 온통 엠보싱 현무암 돌덩어리로 자연스런 계단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총 11명인데, 예측컨대 올라가는 내내 2-3-3-3으로 소그룹을 지어 산행을 계속 했을 것이다. 진달래대피소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시간차를 보니, 이 구간에서 2-3그룹과 3-3그룹의 격차가 더 벌어진 것 같다.
진달래밭대피소에는 관리인이 머물고 있다. 라면이나 간식, 음료 등을 판매하는데, 그 금액이 다른 국립공원 대피소의 가격에 비하면 훨씬 싼 편이다. 등산로와 사이좋게 이어진 모노레일이 있어 짐을 쉬 나를 수 있어 단가를 낮췄나보다. 미리 알았다면, 대중교통만 이용하는 이번 산행길에 코펠, 버너...를 바리바리 싸올 필요는 없었을 것을.
진달래밭대피소까지가 어려운 코스라면 백록담까지의 1시간 조금 넘는 구간은 중급 코스라고 소개되어 있다. 공원관리공단에서 객관적인 자료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하지만, 육지 기준으로 치자면 ‘상급코스’로 표현한 구간은 보통 정도다. 반면, 진달래밭부터 백록담까지의 마지막 구간은 중급자 코스라고는 하지만 그동안의 누적된 피로에 막판 끝날 듯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이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구간이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구간이 더 힘겨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만큼 더 벅찬 감동을 주는 백록담이었다.
3월의 한라산은 특별한 색깔이 없다.
하얀 눈도, 맘 설레는 분홍과 연두의 섞임도 없고, 가슴을 파고드는 짙은 녹색도 아니요, 타오르는 단풍도 안 보인다. 멍하니 있자면 그냥 색깔 없는 회색 도시와 다름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백록담은 많이 마르고 얼어붙어 있고, 생명의 숨은 쉬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어쩜 우린 체력단련을 위해 온 것은 아닌가? 오해하기도 쉽다.
하지만, 따듯한 남쪽에서 만난 침엽수림의 신선함과 겨울에도 연두 빛 테두리와 짙은 녹색 잎으로 들어찬 산죽군락은 눈을 맑게 하고 활력을 준다. 사력을 다해 오른 백록담은 그 자체로 가슴을 통째로 흔들어 놓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정상은 잠시 서 있을 뿐이라고 세찬 칼바람으로 온 몸을 흔들어 댄다. 정복한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물렀다 가는 것이다. 잠시라도 함께 할 수 있게 하늘을 열어주고 바람을 숨죽이게 해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오를 땐 어마어마한 산봉우리 같던 주변의 오름도 아이들이 만든 모래집 같이 장난스럽게 보인다. 눈을 찡그리고 초점을 맞추면 멀리 보이는 바다. 그러고 보니 여기 서서 보는 제주는 사람 사는 세상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한라산과 바다다.
귀향을 위한 우리의 계획은 마치 성능 좋은 시계바늘처럼 척척 맞아 떨어진다. 하산 길은 서로 남은 이야기를 풀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여유 있게 도착한 제주항엔 어제의 용사들에 목, 금요일에 풀린 인파가 함께 몰린 것 같다. 섬에서 육지로 나가는 길이라 그런지 신분확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된다.
하늘은 맑지만 우리가 떠나는 것이 아쉬웠는지 바람(파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처음엔 놀이기구를 탄 듯 기분이 좋더만, 술기운에 든 짧은 잠이 깬 후로는 영~... 속이 제멋대로다. 속을 달래려 갑판으로 나가니 바람에 타고 드는 물방울이 따갑기만 하다. 이 격랑의 시간 속에서도 굳건하게 한 잠을 주무시는 몇몇 회원님들을 보니 참 대견스럽다.
육지는 춥다. 옷깃을 여미어도 스며드는 한기는 사정없다.
자칭 완도에서 전복회덮밥이 제일~ 맛있다는 ‘아시나요’식당. 정말 맛나더라. 시장이 반찬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반찬 말고도 밥도 맛있었다. 허겁지겁 밥술을 뜨고 집에 가고픈 급한 맘에 밖에 나오니 문득 눈앞에 펼쳐진 완도항 풍경이 왜 이리 아름답냐?
그래도 내 처자식보다는 못 미치기에 차에 시동을 건다. 왕복 600km가 훨씬 넘는 거리다. 산행보다 힘든 살인적인 운행이다.
밤 11시가 돼서야 집 현관에 들어섰다.
사흘이 지난 수요일.
장염에 시달리다 병원에 들어서니 의사 왈,
“몸살에 의한 장염입니다.”
여독 때문인지 모르지만, 몸살 날 지경이라도 참 좋은 사람들과 참 좋은 여행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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