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분주한 마음 틈으로 '제주'를 우겨 넣으니 참을 수 없는 평온이 몰려왔다
  • 비로서 허락한 소백산 비로봉 푸른 하늘과 초록 풀밭에 그리움까지 숨겨놓고 말았다
산행 이야기

무성산 - 홍길동성

by 여.울.목 2018. 1. 1.

한해 마무리 산행, 무성산 홍길동성

2:20 동안 가족과 함께 5.5km를 걷다



2017-12-31_11-13-36무성산.gpx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고맙게도 다들 함께 산행을 하고 싶다고한다.

케잌 하나에 촛불켜고 박수치는 것보다 함께 산행하길 바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잠시, 미세먼지가 갈등을 일으키게 했지만,
미세먼지의 농도가 조금 옅어지자 우르르 집을 나선다.

가족과 함께 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려 옛 추억이 있는 무성산을 찾기로 한다.

무성산 옛 이야기
http://yyh911.tistory.com/9
http://yyh911.tistory.com/21

무성산을 처음 찾은 것은 직장에서 였다.
제대로 정상도 찾지를 못하고 헤매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간신히 임도를 찾아 내려선 기억이난다.
그리고, 어쩌다 홍길동성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서는 혼자 찾아나서고,
산악회 사람들을 데리고 몇 번 찾고,
가족과 함께 한 것도 이 번이 두 번째다.


이렇게 한 번 두 번 산행을 되 짚다보니 문득 지나온 시간이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ㅎ

앞으로 스트레스 같은거 너무 받지 말고
깜냥껏 산행하면서 넓고 깊게 생각하면서 살아가야겠다는 다짐? ㅋ

욕심이란 것이 참... 그렇네

버리면 되는데, 손에 쥔 것 그냥 놓으면 된다는 것 알고 있는데,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처음 시작구간은 조금 가파르지만 가족과 함께 하기에 무난한 산이다.


아이들 때문에, 우선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간다.

차량통행이 금지된 임도인데 차단하는 쇠사슬이 풀리고 말았다.
그래도 룰을 알고 있기에 얌전하게 주차를 하고 홍길동성을로 향한다. 이정표에는 홍길동성까지 1.2km라고 하는데, 아마도 직선거리를 써 놓은 것 같다.

사실 1km 정도 가파른 길을 걷고서야 비스듬한 등성이 코스가 나오고,
몇 십 미터 더 가면 '무성지맥' 능선에 다다라, 본격적인 능선 산행을 할 수 있다.
그 능선만 해도 1km는 훨씬 더 되고, 대부분 이런 길이 그렇듯 이정표라는 것에 대해서 방향을 알려주는 것에 만족을 해야지
거리를 가늠하는 데 일희일비해서는 안 된 다는 것이다.


산행 초반의 가파른 구간 내내 어제 내린 비로 떡갈나무잎과 범벅이 되어 오름에 만만치 않은 장애가 되었는데,
아이들에게
가파른 길을 걷다 만난 능선길이 반갑기만 하다.

제법 길이 넓다랗다.
예전에 조금 정비하느라 억지로 길을 낸 흔적이 난다. 길을 내느라 지반을 약하게 해 놓은 곳의 바위가 굴러 작은 산사태를 낸 곳도 있더군.
길동이 엉아가 있었으면 간단하게 해결되었을 텐데 나무 몇 그루가 같이 뽑히는 바람에 한 동안 사람 다니는데 애로가 있었을 것이다.

일기예보로는 기온도 그리 춥지 않을 것이고
낮은 산이라 쉽게 생갔했던 것과 달리 정상부 능선에 다다르니 어제 내린 비에 눈이 전혀 녹지 않았다. 아니 비가 아니라 눈으로 대신 내린 것이 분명하다.


조금씩 정상부에 다다를수록 바람이 매섭게 파고든다.

아이들은 '뽀드득' 소리가 나는 눈길이 마냥 재밌다고 한다만
두덮게 깔린 떡갈나무잎 위에 내린 눈 때문에 내리막 능선 구간에서 아이젠을 꺼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름 악천후인데 아이젠을 신는 것 자체가 재밌는지 쉬지 않고 재잘거린다.


드디어 홍길동성이다.

돌덩이 크기가 대부분 어른이 잘 해야 하나 정도 들 수 있는 정도다.
그런 돌들이 세월의 풍파 속에 무너져 내렸다. 그래도
 아직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곳곳에 설 자리를 튼 나무와 수풀 때문에 산성의 다른 구간을 둘러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추운 날씨에도 토끼발자국을 따라 팔짝팔짝 뛰어가는 녀석들의 천진난만함 속에 어느덧 홍길동 전설이 어린 무성산 정상에 도착~

공식 명칭은 '무성산성'인가 보다.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12호(사곡면 대중리 산39-6)

몇 년 전까지만해도 간단한 등산로 안내판이 총천연색을 자랑하고 있더니,
그 새 햇볕에 바래고, 갈라지고 터져 흉물스럽게 남아 있다.
그나마 금속에 음각으로 새긴 안내판만이 살아 있어 그 내 용을 옮겨본다.


사곡면 대중리와 우성면 한천리 사이에 있는 높이 614m 무성산 정산부에 있는 돌로 쌓은 산성이다.

성은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쌓았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동쪽 경사면을 에워싸 만들어져 성 안 지형은 서고동저의 형태다. 전체적으로 성벽 안팎을 수직으로 쌓아올리고 내부는 석재로만 채워 쌓는 방식(협축식)으로 축조하였다. 남아 있는 성벽 중 상태가 가장 양호한 서쪽 성벽은 높이가 3~4m에 이르는 구간도 있다. 이 구간에서는 다듬은 돌이 보인다.(지금은 관리가 안 되어 다 무너져 내린 것 같다.) 사용재료가 다른 점으로 미루어 일부 구간은 쌓은 시기가 다른 것으로 보고 있다.

성벽 전체 둘레는 530m, 부속 시설로 성문 터 2개소, 건물터 4개소, 저수 시설 1개소 등이 있다. 방어력이 취약한 지점에 치성(곡성)이 5곳이나 확인 되었다. 성안에 관련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홍길동이 성을 쌓고 할동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어 홀길동성이라고도 부른다. 홍길동이 살았다고 전하는 동굴도 있으나 지금은 입구가 막혀 있다.


성 내부의 관련 유물은 커녕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얼마 지나면 너덜 지대인줄로만 알 겠다. 한 겨울인데도 여기저기 힘차게 자리잡은 수풀의 기세가 엄청나다. 한 여름엔 사람이 제대로 지날 수도 없을 것 같다.

무너져 내려 뭉게진 돌덩이는 지나는 사람들이 탑으로 올려놓았다. 그나마 가장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서쪽부분도 이제 대부분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 산 꼭대기까지 올라와 석축 몇 미터 정도가 아니라 건물을 짓고 성문을 세우고, 음수시설을 갖추고 치성까지 설치할 정도라면 상당한 권력이 작동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그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보니 길동이 엉아의 일이 함께 어우러졌는지도 모른다.

무성산과 홍길동에 관한 설화의 대표적인 것이 '길동이 여동생과 차별과 천대를 불평해 세상에서 종적을 감추고 무성산 석굴에 살며, 서로 힘겨루기를 하면서 성을 쌓았다'눈 것이다.
그 밖에 홍길동동굴, 걱정봉, 짝바위, 장수바위, 공깃돌바위 등에 홍길동 설화가 어려있다고 한다.
실제 홍길동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서에 나온다. '연산군일기'와 '중종실록'에 강도 우두머리로 나온다고 한다.
충청도는 홍길동이 도적질한 뒤로 회복하기 어려워 세금을 거두기 어렵다는 보고가 있었고,
홍길동은 1500년(연산군6) 10월에 잡혀 처형되었다고 한다.

전설과 허구(소설)만이 아니었다. 일정부분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였다.

2016년에 읽은 책의 내용이 생각난다.
인물로 본 공주역사 이야기 라는 책인데, 홍길동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다행히 기억이 나서 더듬더듬 관련 페이지를 펼쳐 본다.

허균이 공주 목사로 근무했다고 한다.
보통 관찰사가 공주 목사를 겸했는데 따로 목사를 임명하기도 했는데 허균이 그런 경우였다고 한다. 
사실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 1607년(선조40) 공주 목사로 부임해 근무하다 1608년(광해군1) 8월 파면되었다고 한다. 

'허균은 성품이 박하고 품행이 무절제하다'는 암행어사의 보고 때문에 파면되었다고 한다. 

1612년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완성했는데, 공주 목사로 있을 때 무성산 일대에 퍼져 있는 홍길동의 행적과 설화를 수집하고 줄거리를 구상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한다.
소설의 중요한 소재인 적서 차별에 관한 행적도 공주 근무 때 두드러졌다고 한다.
파면 후 부안으로 내려가 시를 잘 지었던 기생 매창과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 등과 교류했다고 하니 전반적으로 이야기를 엮을 수 있는 배경은 충분하다.

허균의 스승이 뛰어난 문인이었지만 서자였던 '이달'이라는 인물이었고,
공주에서 근무할 때 명문가의 서자들을 불러들여 교류했다고 한다.(칠서의 옥 주역 중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등)
선조 초기 서얼 1,600명의 집단 상소가 좌절되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살인강도를 벌이다가 역모죄로 모두 처형되었다. 이 때 이들의 진술이 대북파가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행위의 도구(계축옥사)로 활용되어 칠서와 친밀했던 허균도 조사받았지만,
허균은 대북파 영수 이이첨에게 투항해 출세가도를 달리다 광해군 9년에 인목대비 폐모를 앞장서 주장하다 능지처참을...

자세한 내용은 "인물로 본 공주 역사 이야기(김정섭 저)" 221쪽~224쪽 참조

홍길동에 대한 이야기가 그저 전설이고 근거도 없이 꾸며낸 이야기도 아닌데다
공주 지역과 연관이 깊다는 것!


홍길동성을 등지고 남쪽으로 무성지맥을 따라 내려오다 얼마 가지 않아 갈림길을 만난다.

무성지맥이 흘러가다 홍길동 동굴을 가는 길로 갈라진다. 이제 능선을 벗어나 산등성이를 따라가는 길이라 길이 가파른 축에 속한다.

대한민국 야산은 이제 숲의 천이 과정을 거쳐 참나무가 산을 뒤덮고 만 것 같다. 떡갈나무 잎과 눈이 어우러져(?) 아이젠과 스틱이 없으면 넘어지기 쉽상이다.
조심조심을 당부하며 아이들에게만 장비를 챙겨주고 자신만만하다가 네 번이나 미끄러져 넘어지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ㅎ

200m나 내려왔나? 바로 홀길동 바위가 보인다. 바위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짐 때문인지 몇 년 전에 바위 위에 있던 쉼터도 철거하고 없다.
홍길동 설화를 생해서 그런지 막히기 전에는 꾀 넓은 공간이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냥 산사태로 굴러내린 바위 덩이만 바라보다 되돌아 선다. 어쩔 수 없잖아? ㅋ


홍길동 동굴을 지나 조금은 부담스러운 내리막을 조심스레 내려서면,
금새 임도를 만난다.
임도 조성 사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10여 년 전에 생겨난 임도다.

임도 덕분에 산악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이 여기를 많이 찾는다고 한다.

맑은 하늘과 귀를 찌릿하게 하는 찬 바람이 미세먼지가 걱정되는 날이라고 의심하는 것이 의심스런 날이었다.
오히려 아이들이 조금 추운 날씨를 즐기는 것 같아 다행이다.



임도를 걷는 것 조차 질릴 즈음 임도 곁으로 한천약수터가 보인다.
걸죽한 막걸리 들이키듯 시원한 길동엉아의 약수를 삼켜보는 울 아들~

임도 200m를 걸으니 다시 원점이다.
생각보다 정상부의 날씨가 매서웠는데도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니 맘이 편하다.

2017년 한 해를 이렇게 가볍지만 가족과 함께 훈훈하게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