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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주한 마음 틈으로 '제주'를 우겨 넣으니 참을 수 없는 평온이 몰려왔다
  • 비로서 허락한 소백산 비로봉 푸른 하늘과 초록 풀밭에 그리움까지 숨겨놓고 말았다
산행 이야기

인제 자작나무숲, 원대봉

by 여.울.목 2019. 1. 19.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

원정임도(등산코스)→자작나무숲→원대봉→원대임도→자작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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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까 말까. 갈 수 있을까? 어찌어찌 만든 토요일이라는 시간이 왜 이리 사치스럽냐.
더군다나 값지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큰 아이와 함께 하기로 한다. 같이 가기로 한 아이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새벽 5시 반을 조금 넘겨 깨우니 일어나는 녀석이 대견스럽다.
찬바람 들라 꼭꼭 옷깃을 여미고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가 출발하자 녀석이 배가 아프다고 한다. 아니 토할 것 같다고 한다. 속으로 우이 C~’ 짜증이 난다. 화를 내고 싶다. 어떻게 만든 시간인데,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던 시간인데, 버스가 출발한지 20여분이나 지났나? 녀석이 토할 것 같단다. 미리라도 말했으면 못 간다고 하차라도 하지... 가도 가도 끝없는 인제 가는 길 요 녀석을 어쩐다냐.

 

겉옷을 벗겨 좀 헐렁하게 해준다. 검정비닐봉지를 준비한다.
억지로 참는 녀석을 보니 짠한 마음이 짜증을 밀어낸다. 녀석의 손을 잡아 주고 한 손으로 배를 살살 문질러준다.
자면서 가끔씩 미간을 찌푸린다만 다행히 잠을 잔다.
버스는 오송 휴게소에서 잠시 멈춘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아침 요기 거리인 김밥을 받아 든 녀석의 눈과 마주친다. 우리 둘 다 환한 미소를 발산한다. 다행이다. 입맛이 살아난 걸보니 잠시 모르는 사람들과의 여행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짜증을 내지 않는 내게 칭찬한다.
그리고, 다시 평온을 찾은 녀석으로 돌아와서 얼마나 고마운지. 녀석을 보면서 지금 새로 바뀐 환경에 열심히 적응하느라 전쟁을 치르는 나를 생각해본다.
나름 견디느라 미간을 찌푸리며 참는 녀석을 보니 울컥해진다. 나도 잘 이겨내리라.
이것만으로도 오늘은 참 멋진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내리는 휴게소마다 따라 나서 이것저것 군것질에 얼굴 가득 미소가 퍼진다.
차 안에서는 데이터 공유로 녀석의 지루함을 달래준다. 가끔씩 게임 휴식 중에 내게 말도 건준다. 아빠보다 어른 같다.
어른도 가끔 길을 잃는다.

 

먼 길을 달려왔다.
11시가 다 된 시간이라 그런지 주차장은 차들로 가득하다.
자작나무 숲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등산보다는 관광객으로 가득하다. 산림청에서 관리하는 곳인데, 등산로 입구마다 공사장에서 쓰는 비닐테이프로 출입금지를 해 놓았다.
1번 무전기 그냥 가자는데 원칙에 충실한(?) 선배님들 임도를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
두 번째 등산로 입구. 입이 댓발 나온 1번 무전기를 대신해서 내가 스틱으로 금줄을 들어준다.
사실 통제하는 이유가 산불 때문이 아니다. 곳곳에 결빙구간이 생겼다. 근데 여기 오는 사람들 9할 이상이 관광객이라 미끌거리는 신발로 오르다 다칠 것을 우려해서 금줄을 친 것이다.
아이젠까지 챙겼는데... 당연히 올라야지.

 

등산로는 군데군데 임도와 만난다.
임도와 만날 때마다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간지럽다. 이런 편한 길을 두고 쟤들 왜 저런 길로 가지? 그런 말.
그리 험하지는 않지만 오르락 내리락 동네 뒷산을 여러 개 엮어 만든 등산로다. 여전히 땀을 흘리게는 한다만 그닥 거칠지는 않다.
울 아들 말이 봉화대보다 쉬워요.” 그래 봉화대에 비하면 껌이지 .

 

하지만 내겐 이 등산로이 어찌나 힘이 들던지.
1월 내내 새로 맞이한 사람과 조직과 일들... 엄청난 스트레스였나보다.
끙끙 앓듯이 내 근육이 힘을 짜내는 것 같다.
녀석의 닳아버린 운동화에 아이젠을 챙겨주느라 우리 부자만의 오붓한 산행은 원대봉 바로 전까지 내내 이어진다.
녀석에게 이런저런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챙피하지만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었나보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대신 녀석의 말을 듣고 주제를 맞추어 말을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녀석과 한화 이글스 올 시즌에 대한 전망을 한참 이어간다.

 

어느덧 자작나무숲 군락지에 다다른다.
산행 입구에서 보았던 자작나무와는 차원이 다른다.
소나무나 떡갈나무로 주종을 이루는 우리나라 산만 보다가 하얀 나무숲을 보니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우선 우리는 원대봉을 오르기로 한다.
허접한 원대봉... 멋진 점심 식사. 원대봉에서 조금 빗겨내려와 점심 자리를 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음식을 나눠 먹는 사이 우리아이도 어른들과 한 무리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 같더라. 왜 아빠가 사람들과 함께 산행을 하는지 조금은 이해했을 것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이제 환상적인 자작나무숲 여행을 하자.

 

자작나무 숲을 내려오면서, 아니 내리막은 금새 끝이 났다.
오히려 아이가 기나긴 임도를 질려하고 힘들어 할 정도였다.
어쩌다 우리 둘이 걷게 된다. 음악을 틀고 오면서 음악 이야기를 한다.
엄마한테 전화도 하고, 동생에게 공부 안 하고 뭐하냐고 핀잔을 던지기도 한다.

매년 한 번이라도 이렇게 함께 산행을 하고 싶은데,
이제는 녀석의 나이만큼이나
고입이나 대입이라는 사회적인 단계 때문에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겠지?

 

뒤풀이하기로 한 식당.
너무 허접한데도 사람으로 미어터져서 홍천까지 내려와서 어렵게 맛집 군락지역을 찾아 들어간다.
아들이 아빠의 사회생활 일부를 조금은 이해하는 것 같다.
선배님들이 들려주시는 용돈을 받아 든 녀석 속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래도 인사성 바르고 반듯하니 아빠도 함께한 우리 산악회 선배님들도 흐뭇하게 생각하신다.

뭣 때문인지 모르지만... 힘들지만 멋진 하루였다.

 

산행 후에 감기.
혹시 독감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내가 많이 힘들었나 보다. 아이를 보면서 내가 한 뼘 더 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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