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전화도 없으련만 혹시라도 걸려올 일 걱정에 퇴근하자마자 전화기의 전원을 끈다.
뭔지 모르지만 몸이 힘겨워하는 것 같다. 마음인가? 한바탕 산에서 살풀이를 해야 가뿐해질 것 같다.
그런데 일정이 묘하게 꼬였다. 연수 동기생들이 소백산에서 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얼떨결에 수락을 하고 보니, sanjoa 모임과 겹친다.
양다리 걸치다가 가지랑이 찢어지겠다. 그냥 내 갈길 가보자꾸나. 이런저런 일로 머릿속도 복잡하거니와 몸도 둔해져서 내 깜냥만큼 산다름질 치고 싶었다.
토요일 새벽 어렵사리 잠과의 전투에 승리하고, 휴대전화기를 살려낸다. 몇 개의 톡과 산행 독촉 문자, 뉴스 속보가 한꺼번에 쏟아진다. 머리 아파~
그래도 새벽 밥상 차려주는 마눌님, 땡큐. 다행히 눈은 내리지 않는다.
헐~ 하지만 기상청... 얼마나 힘들까? 천기를 누설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서울에 도착하니 진눈깨비가 처량하게 내린다. 다행히 불암산 산행을 시작할 때는 날이 개기 시작했다.
가는 길: 공주-서울고속터미널–7호선–노원역–4호선–상계역
오는 길: 장암역-7호선–서울고속터미널(좌석 매진)-3호선-남부터미널
2014.02.08. 09:55~14:44
상계역 부근 시작 불암산~수락산 장암역 부근으로 하산 10.69km 04:49
상계역을 빠져 나와 머리에 그려 둔 지도를 따라 무조건 북쪽으로 길을 향한다. 들머리를 찾느라 헤맬 필요가 없다. 배낭을 짊어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 일정한 방향으로 향한다. 불암산 공원 앞에서 산책 나온 사람들 때문에 헷갈려 잠시 망설이지만 이내 산행 짬밥으로 들머리를 찾아 들어선다.
<좌: 상계역은 지상에 올라와 있다, 우: 불암산 정상 바로 밑 거북바위- 닮았네>
해가 뜨지 않았지만 겨울치고는 그 정도면 산행하기 참 좋은 날씨였다. 불암산 능선에 접어들기 전까지 말이다. 정암사 이정표를 기점으로 아스팔트길로 곧장가면 정암사고 오른쪽으로 비포장 산행로 향해야 등산로다. 거칠지는 않지만 능선까지 만만치 않게 몰아붙이는 오르막 탓에 제법 쫒아 오던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불암산 능선 바로 전이 깔딱고개다. 깔딱? 헐떡대며 고개에 덧댄 계단 밟고 능선에 들어서니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다. 능선에 불어 닥치는 바람이 날카롭기가 이를 데 없지만, 몸에 달아오른 열기 때문에 피장파장이다. 불암산 정상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태극기가 서 있는 둥글지만 오르기 힘든 바위는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이 올라서 있기 힘든 곳이다. 산 하나를 두고 동쪽으로는 남양주, 서쪽으로는 상계동이 보인다. 상계동. 우리나라 법정 동(洞 )기준으로 가장 많은 인구가 모여 사는 곳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여백이 남아 있는 남양주에 비해 서울 상계동은 빈틈이 없다. 그냥 바라봐도 답답할 정도다.
<좌: 남양주, 우: 상계동- 날이 안 좋아 잘 안 보이지만 상계동은 골짜기 까지 집이 빼곡하다>
북쪽으로는 수락산이 나를 유혹하고, 북서쪽으로는 시커먼 구름에 가려 도봉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산 정상이라 내린 눈이 녹지 않아 온 신경을 곤두세워 조심스레 정상에서 내려온다.
<좌: 불암산 정상, 우: 수락산 가는 길에 멀찌감치서 본 불암산>
이제 능선을 따라가며 이런저런 생각이며 경치도 구경할 요량인데, 한 아저씨가 수락산가냐고 내게 말을 건넨다. 나도 처음이라 답했는데도 자꾸 나를 따라 붙는다. 그 뿐 아니라 자꾸 시키지도 않은 말을 계속 늘어놓는다. 쉴 타이밍을 건너뛰면 떨어지겠지 하는데도 계속... 게다가 내가 길을 잘못 들어 다시 되돌아오는 어리석음을 범했는데도 여전히 웃음 지으시며 말을 던진다.
하는 수 없이 속도를 줄여 함께 가지로 한다.
30여년 넘는 직장생활을 마치고 다행히 위암을 2기 직전에 발견해서, 그 후로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 산행을 시작하셨다는 아저씨의 말씀은 장장 9km 내내 3시간 하고 40여분 동안 이어지고 모자라 지하철까지 이어진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전국의 산을 다 누비고 있다고 한다. 단풍철이면 그 물결을 따라 설악부터 두륜산까지 함께 9박10일 이상의 산행여행.
산행만 하면 힘들고 금만 물리니까 중간 중간 주변 관광지도 둘러보고, 맛있는 것도 먹어가며, 그것도 대중교통만 이용해서 움직인다. 가끔 시간을 줄이려 택시는 이용하시지만...
처음엔 돈 좀 있으신 분의 배부른 소리인가 보다 폄하하면서 건성으로 들었건만, 조금씩 내가 열어주는 만큼 두 세배로 마음을 열어 산에 대한 열정을 토로하시는데 참 대단하시다.
-무릎은 아프지 않으세요?
-내가 그쪽하고 같이 가려고 오늘은 이리 오버 페이스 하는 거지, 혼자 다닐 때는 천천히 자연을 누리면서 다니기 때문에 관절에 무리가 안 가요. 앞으로 80세까지 20여년 가까이 산행이라는 호사를 누려야 하잖아요.
한 주를 등산 2~3일 관광1일, 나며지는 영화관람. 안 본 영화가 없다고 하시네.
불암산 하산능선과 수락산 등산능선 일부는 그리 어렵지 않은 코스라 잘 따라 붙었다고 치자, 본격적으로 수락산 암반 능선에 다다랐을 때는 오랜 산행으로 지칠 때도 되었건만, 가파른 길에도 굴하지 않고 내 걸음을 놓치지 않고 따라 붙으신다. 내 근육도 지쳐가데... 이 양반 내공이 장난이 아니다.
결코, 빨리 간다는 것만이 산행의 전부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솔직히 난 이 분과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뭐가 어떻게 지났는지 잘 모르겠더만, 내 뒤를 바싹 붙어 불암산 수락산의 풍경과 어느덧 짙어지는 눈발에 연신 감탄사를 쏟아 낸다. 계절마다 자연이 주는 선물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누구보다도 충분히 느끼고 계시다네.
<좌상: 불암산에서-멀리 뿌옇지만 보이는 수락산 전경,
우상, 좌하: 보기에도 불안한 바위 덩어이들, 우하: 실제 보면 더 멋진 수락산 정상 전경>
눈이 제법 쌓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이젠을 신기엔 아직도 암릉 코스가 껄끄럽다. 균형을 잡으려면 발바닥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수락산 정상에 도착하니 추워지고 눈발도 더 거세진다.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내리는 눈을 맞으며 20년 차 나는 두 산행 동무가 도시락을 꺼내 시시덕대며 끼니를 때운다.
내려오는 길은 많이 가파랗다는 기억만 날 뿐이다. 이 길로 오르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려니...
장암역. 종점이자 시작점. 군자역까지 난 버스표 예매도 해야 하는데 계속 말을 건네신다. 예의상 계속 폰을 만지작거릴 수도 없고... 쫌~ 적당히 하시지. 아무튼 토요일 오후라 내려가는 버스는 족족 매진이다. 내려갈 일이 걱정인데 이야기는 계속된다.
아저씨와 헤어지고 땀으로 젖은 거추장스런 몸뚱이와 달리 맘은 새로운 것을 생각하느라 그리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제대로 내 속도도 못 내고 경치구경도 맘대로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어찌 보면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던 내 산행에, “앞으로 남은 40여년의 풍요로운 산행!”이라는 말머리를 던져준 의미 있는 산행이었다.
집에 오니 집사람이 “그래 통성명은 하셨어요?” 아~ 그렇군. 하지만 통성명 안 했어도 맘은 통하지 않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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