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3개월 동안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밀어왔던 산행이다.
어느덧 주말엔 산행보다는 집에서 뒹구는 습관이 몸에 쉬 베어들고 만 것 같다.
새롭게 산행을 시작하는 마음... ㅋ 그래서 의미를 두고 산행을 시작해보고 싶었다. 소백산을 가볼까? 계룡산 천황봉?
하지만,
대부분 토요일에 산행을 하고 일요일은 뭔가 좀 정리를 하면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이번 주는 아이 생일에다 초가집 체험이 겹치는 바람에 토요일을 어영부영 보내고 말았다.
결국 일요일까지 시간이 밀리고 말았다.
갈까 말까, 몇 번을 머릿속에서 되새김질하는지 모르겠다. 날도 좋은데 아이들과 함께 봉화대나 오르고 말아야 하는지.
김밥 한 줄과 인절미 200g정도를 배낭에 꾸려 넣고 산행을 시작한다.
시간이 벌써 11시에 가까워져서 어디 멀리 떠나기는 어렵고, 대신 다시 산행을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삼을만한 곳, 公州大幹을 선택했다.
마트에서 산행에 필요한 주식과 간식을 구매하고는 느릿느릿 옥룡동주민센터 쪽으로 걸어간다.
산행요약
12.4km | 4:43
옥룡정수장-봉화대-웅치(능치)-주미산-우금치-두리봉-공주경찰서
* 지난 공주대간 이야기 링크
효자 이각 정려비각
옥룡동에서 시작하는 산행은 공주시옥룡정수장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옥룡정수장 쪽으로 접어들자 ‘효자 이복 정려비각’이 눈에 들어와 걸음을 잠시 돌린다.
원래 옥룡동 큰거리에 방치되어 있던 비석은 옥룡동의 큰 거리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1978년 옥룡동 노인회가 중심이 되어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정려(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비는 주로 조선시대에 있었는데, 이 비각의 내용은 고려시대의 것이라 주목할 만하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공주목(公州牧) 인물조에 고려시대에 아전(비각 안내문에는 ‘향리’로 기록됨)을 지낸 효자로 기록,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호서읍지(湖西邑誌)》《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가던 중 어머니가 병이 들자 매일같이 읍내에서 밥과 국을 얻어다 따뜻하게 봉양하였으며, 마을 사람들은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국을 끓이면 이복의 어머니 몫으로 한 그릇을 따로 떠놓았다고 한다. 한번은 이복이 어머니에게 드릴 국을 얻어 고개를 넘어가다가 넘어져서 국을 엎지르고는 굶주린 어머니를 생각하며 서럽게 울었다고 하는데, 이 일이 알려져 사람들이 이곳을 '국을 엎질렀다'는 뜻의 '갱경(羹傾)골'이라 불렀고 이것이 지금의 '국고개'로 변하였다고 전한다.
《디지털공주문화대전》에서는 ‘국고개’를 지금의 충남역사박물관 고갯길이라고 알려주고 있지만, 다른 자료나 학창시절 선생님께 들었던 ‘국고개 이야기’의 고개는 윤정형외과가 있는 큰 사거리와 만나는 고갯길로 되어 있다. 《디지털공주문화대전》의 ‘도로’ 편에서도 ‘국고개’를 설명하면서 큰사거리 길과 만나는 고갯길로 설명해 놓을 것을 보면, 국고개 행사가 충남역사박물관을 중심으로 개최되기 때문인 것 같다.
*디지털공주문화대전 ‘도로’편
공주는 1918년에 시가지 정비계획을 통해서 기존의 작은사거리와 대통교에 있던 시장이 큰사거리와 제민천변(미나리깡 매립)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중심시가지가 ‘작은사거리 → 큰사거리’의 변화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국고개길을 큰사거리와 만나는 길로 설명하고 있다.
아무튼, 산행을 시작해보자.
2~3백여 미터를 아스팔트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니 옥룡정수장이 나온다. 사람들의 잦은 출입 때문에 골치를 앓았는지 등산로를 가리키는 표지를 친절하게 세워 주었다. 정수장을 끼고 돌아가니 이제 제대로 오르막이 시작되고, 그 오르막의 끝에 다다르니 능선길이 열린다.
공주대간은 크고 작은 산들이 이어진 줄기로 오르막과 내리막이 쉴 새 없이 반복된다. 그래서 산행 초보자들의 경우 완주하는데 힘에 겨워한다.
이제 오솔길을 따라 남쪽으로 걷기만 하면 된다. 사람 사는 곳을 빙 둘러친 산줄기다보니 지나면서 만나는 가지길 - 옥룡사거리, 대웅아파트, 주공아파트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월성산 봉화대까지 대간은 거의 오르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금 힘들 것 같으면 잠시 숨을 고르도록 틈을 주거나 완만한 경사로 살살 달래면서 오르기를 권한다.
어느덧 재킷이 내 숨통을 막는 것 같아 걸으며 재주껏 벗어 배낭에 말아 넣는다. 이내 차가운 기운이 채 여미지 못한 옷깃을 타고 칼같이 몸속으로 파고든다. 그래도 따듯한 햇살 때문인지 이내 체온이 평온을 찾는다.
▶ 육각정 1.65km
쉼 없는 오름에 잠시 숨을 돌려야 할 것 같다. 숨을 고르기 위해 핑계거리를 찾던 중 쉼터가 눈에 들어온다. 육각형 모양의 정자와 간단한 운동기구 두 세트 정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주변 조망은 시원하지 않지만 나무그늘 덕에 더운 여름에 땀 식히기 적격인 곳이다.
조금의 내리막이 이어지더니 바로 경사지가 이어지네.
석 달만의 산행이라서 그런지 벌써 근육에 탈이 났다 보다. 오름에 경직되었던 다리가 내리막길에 풀렸다가, 다시 시작되는 봉화대 비탈길에서 제 힘을 발휘 못한다. 쉬고 싶다.
아~ 오늘은 여기서 그만 접어야 하나?
▶ 월성산 봉화대 2.65km
코 호흡을 포기한지는 한참이고 육각정을 지날 때만하더라도 들숨은 코 호흡이었건만 이제 입으로 뭐든지 다 빨아들이고 내뱉을 것 같구나.
봉화대에 가기 전에 봉화대와 거의 비슷한 높이의 봉우리가 하나 더 있다. 아이와 함께 상의를 해서, 봉화대와 함께 나란히 있으니까 형제봉으로 하자고 한 귀여운 봉우리다. 형제봉 전망 데크에 서면 멀리 금강 상류 지역과 계룡산 줄기가 시원하게 보인다. 오늘은 시야가 그리 시원치 않다만 희미하게 다른 톤으로 보이는 계룡산줄기도 나름 매력 있어 보인다. 북쪽으로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는 봉화대는 완만한 ‘U’자형 능선을 20~30미터 지나면 나온다.
<멀리 회색톤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산맥이 계룡산 줄기다>
<4대강 사업의 흔적-모래더미-이 아직도 남아 있고, 멀리 금강 상류로 왼쪽은 세종, 오른쪽은 반포면 일대>
<봉화대에서는 공주시내가 잘 보인다>
‘봉화대’라는 아담한 정상 표지석 옆 석축에 올라서면 남쪽의 형제봉과는 달리 공주 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강 상류와 계룡산 쪽을 조망하는 형제봉과 공주 도심을 바라 볼 수 있는 봉화대가 나란히 서서 각자의 몫을 사이좋게 나누어 가진 것 같다.
학창시절 이곳 봉화대에 올랐을 때 한창 발굴 작업을 하는 것 같더니 지금껏 특별하게 진행되는 것은 없는 것 같다. 봉화대는 형제봉과 달리 둘레가 80m정도로 남북직경 33m, 동서 13m의 남북으로 긴 타원형의 형태로 비교적 너른 규모의 평지로 되어 있다. 논산 노성 쪽과 북쪽 정안 방향의 봉수대로 불빛과 연기 신호를 보내주기 위한 시설이 들어기 충분했을 것 같다. 디지털공무문화대전을 찾아보니 2003년에는 월성산 주변에서 보루나 망루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희귀한 형태의 백제토성도 발견되었다. 월성산이라는 이름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최근 10년 새에 월성산이라는 푯말이 들어섰는데 왠지 낯설기만 했다. 정부에서 발행하는 지도에도 그냥 봉화대로 되어 있더만. 게다가 월성산이 공주의 鎭山이라고 안내되어 있던데, 정말 그런가? 조금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봉화대는 제법 널리 알려진 편이라 여기저기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의 시민들이 벤치에 앉아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 웅치(熊峙), 곰티, 능치(陵峙), 능치고개 3.2km
계속 남쪽으로 능산로가 이어진다. 이제 봉화대를 내려서면 다시 급한 경사가 시작된다. 바로 밑으로 효포초등학교에서 세운 봉화대 가는 길 푯말이 서 있다. 지난해부터 산의 나무를 어찌 하려고 했는지 리기다소나무를 죄다 베고 새로운 묘목을 심었다. 때문에 공주생명과학고 제2농장과 효포지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조금 더 내리막을 가면 지도에 ‘능치고개’라고 표기된 곳이 나온다.
산악자전거를 타시는 분들도 이 고갯길을 자주 이용하는지 나뭇가지에 리본을 달아 놓았다.
언젠가 이 고개에 왕릉이 있을 거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에게 해주신 분이 계신다는 소리를 집사람에게 들었다. 내 이 능치라는 지명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자 유래를 찾다보니 그 분의 말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사실과 거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됬다.
<간벌 작업으로 능가산 아래가 훤히 보인다>
<내 서 있는 곳이 봉화대 쪽이고 반대편 산이 능가산인데 그 사이 'V'자료 움푹 파인 곳이 웅치다>
이 고개가 능치 고개가 된 것은 공주방면(서쪽)으로 내려가면 공주터널이 지나고 있는 바로 위 금학동 쪽의 구릉지대에 능치고분군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공주능치고분이라고 하는데, 금학동과 신기동(효포)의 경계지점에 해당되는 능치에 위치하고 있다. 금학동 뒷산인 산맥과 월성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맥이 합쳐지는 곳 1km 반경에 백제시대의 고분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대개 돌방무덤 형식이라고 한다. 너무 일찍 알려져서 유실과 도굴이 심하다고 한다. 예전에 한 번 둘러본 적이 있는데 어떤 능의 형태와 같은 제대로 된 문화재로서의 모습이 쫌... 그냥 뭔가 있었을 것 같은 너른 구릉지대에 사적지에 둘러 쳐 놓는 낮은 철제 난간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이 능치고개에 왕릉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고분군 근처에 있는 고갯길이라서 붙여진 이름으로 여겨진다.
여러 자료를 찾아본 결과 이 고갯길 명칭은 웅치, 곰티, 능치, 능치고개로 섞여 사용된 것이다. 120년여 전까지만 해도 이 고갯길이 주로 웅치, 곰티로 불리어졌다.
주변 형세를 보자니 논산 노성 방면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웅진성 - 공주로 들어가기에 가장 합리적인 경로가 바로 이 고갯길이다. 웅진으로 들어가는 고갯길 - 그래서 웅치라 불리어진 것 같고, 사료에도 ‘웅치’라는 명칭이 쓰이고 있다.
웅치(熊峙) : 공주의 남쪽에 있는 재로, 능치(能峙)라고도 한다. 공주일대에서는 초기 남쪽 농민군들이 집강소 활동을 벌일 때 이인접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동학농민혁명 종합정보시스템동학농민혁명 문헌사료 1894년8월21일(음력) 각주]
**이렇게 고갯길 이름을 찾느라 여러 자료를 들춰보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
내가 걷고 있는 公州大幹 길이 1894년 9월 재봉기를 한 동학농민군의 주요 격전지였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대간길이 당시 전투의 戰線이었다.
동학운동
1894년 2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광범한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하여 발생한 민란은 동학교도와 결합되고 반침략과 반봉건을 지향하는 개혁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동학군은 전주성까지 점령하였다. 이 무렵 무능한 조선 정부는 청에 구원을 요청하고, 일본도 출동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북접은 이미 무정부 상태인 공주와 청주 이남의 여러 지방을 휩쓸어 버린다. 하지만 무력봉기를 꺼린 교주 최시형의 영향과 두 차례에 걸친 패전을 겪는 과정에서 전봉준은 강화안을 제시해서 전주화약이 성립되서 1차 봉기는 마무리되고 집강소라는 민정기관이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사실상 담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신정권을 세웠다는 소식에 척왜를 외치며 다시 봉기한다. 남접과 북접이 항일구국투쟁이라는 명분으로 공동 전선을 펴게 된다. 이 2차 봉기의 마지막 격전지가 공주 우금치 지역이다.
<1차전투: 10.23~25 | 이인, 효포, 웅치 전투>
공주지역은 이미 재봉기를 준비하여 회덕과 진잠의 무기고를 탈취하는 사건까지 벌어진다. 8월에는 대접주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1만여 명이었으며, 공주는 감영만 점령되지 않았을 뿐 대부분지역이 농민군에게 장악되었던 것이다. 9월에 전봉준이 재봉기를 선언하고 북상을 위해 논산으로 집결했는데 그 수가 4만여 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때 공주의 이유상이라는 유생과 농민군들이 논산의 연합부대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관군과 일본군이 서울 쪽에서 내려오면서 북쪽지역의 농민군과 전투를 벌였고, 농민군은 목천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10월 24일에 먼저 공주에 도착해서 진을 치게 된다. 조선 관군이 약3천2백 명, 일본군은 2천여 명 병력이었다고 한다.
공주는 이 공주대간이라는 산줄기가 배 모양으로 감싸 안고 있는 지형이다. 그래서 대간 길에 있는 주미산이라는 명칭이 [배舟 꼬리尾] 란 뜻이란다. 그리고 산줄기가 금강에 닿은 교육청 부근(공주생명과학고 맞은 편)의 산 이름이 정지산 이다. 그 산줄기가 물가를 만나서 잠시 쉬어 간다는 뜻이란다.
아무튼 공주는 이렇게 최고 높이 300여 미터의 그리 높지는 않지만 배모양의 가파른 산줄기로 동서남이 둘러 쌓여있고 북쪽으로는 금강이 자리 잡고 있어서 한 번 웅크리고 들어앉으면 쉽게 침범하기 어려운 지형이다.
그러다보니 백제의 도읍지, 충청도의 관찰사가 있는 감영이었고 조선 인조 때는 이괄의 난을 피해 임금이 내려온 곳이기도 하다.
동학농민항쟁 때도 농민군이 먼저 이런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려 애를 썼지만, 관군과 일본군이 먼저 자리를 잡고 말았다.
목천 전투 패배에도 농민군은 10월 25일 이인과 효포를 점령하고 웅치를 사이에 둔 월성산과 능암산으로 전면적인 공격을 시도 한다. 농민군 3천여 명, 관군 310명, 일본군 300여 명의 대립. 봉화대와 능암산은 웅치를 가운데 두고 마주보는 낮은 산이었지만 가파르고 지형이 위에서 아래를 향해서 싸우기 유리했기에 7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점령에 실패하고 경천으로 후퇴한다.
우금치 전투 전 10월23일에서 10월25일 간 벌어진 1차 전투의 격전지가 바로 여기 웅치, 능치고개다.
내 건강을 위해서 시작한 대간 산행길이 이런 역사의 장이었다니 새삼 새로운 묵직하게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게 된다.
▶ 공주생명과학고 뒷산 4.5km
이제 다시 걸음을 재촉해보자.
고개를 지나 낮은 봉우리지만 가파른 길을 오르니 역시나 주변을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인지 산불감시를 위한 하늘색 FRP초소가 세워져 있다. 지금은 나무가 제법 무성해져서 주변이 그리 잘 보이지는 않지만 예전엔 이곳에 농민군을 상대하기 위한 진지가 구축되었을 것이다.
이제 올랐으니 다시 조금의 내리막을 맛보고 나면 금학동 e-편한세상 쪽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고 이제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자면 수원지생태공원에서 올라오는 길이 합쳐진다.
커다란 계단식의 오르막을 힘차게 오르면 케언(돌무덤)과 멋진 소나무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 봉우리에 다다른다. 봉우리가 암석으로 되어 있어서 봉화대 이후로 숲길만 이어진 길을 걸은 보답으로 확 트인 조망권이 보너스로 주어진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서 바라본 봉화대는 역시나 뾰족한 모양을 한 것이 도도한 여인네의 콧날 같다. 웅치전투의 치열함을 간직하고 있는 효포 쪽으로 뻗은 봉화대 산자락... 눈길을 돌려 다시 남쪽으로 향하면 시계방향으로 내가 지나가야할 병풍 같은 산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생명과학고 제2농장 뒤편 봉우리, 이름은 없지만 암벽으로 되어 있어 조망이 참 좋다>
<지나온 봉화대 봉우리와 왼쪽의 키작은 능가산>
<여기서도 멀리 계룡산이 보인다>
<서쪽으로 몸을 돌려 보면 병풍처럼 둘러친 대간길이 보인다. 가장 높은 봉우리가 주미산 정상이다>
그리 무겁지는 않지만 그래도 배낭이다. 내려놓고 점심 전을 편다.
이 뷰포인트를 지나치면서 만나는 능선 길에서 매번 느끼는 건, 길을 걷는 것이 마치 토성의 성곽을 걷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사람이 일부러 이렇게 흙을 빗어 올리기는 힘들 것이다. 주미산까지 내내 이어지는 이런 성곽길은 아마도 120년 전 농민군들이 우금티를 선택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남쪽으로 길게 내려와서 능선은 거의 직각으로 오른쪽(서)으로 머리를 돌린다. 그 남쪽 끝은 생각보다 기~ㄴ 오르막이다. 이제 봉우리에 다 다다른 것 같은 생각이 들면 다시 올라야 하는 길이 또 있네. 그 남쪽 끝점에 Oruxmaps 어플 지도에 ‘끝점’이라고 포인트를 찍는다. 온 몸에 피로물질이 가득 찬 것 같다. 지쳐서 이제 쉬어야겠다. 통나무를 잘라 만든 의자에 걸터앉아 주미산 쪽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귀를 종긋 세워본다.
<겨울준비로 낙엽을 떨군 나무 사이로 뾰족히 솟은 봉화대와 겹겹이 지나온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 주미산 7.7km
어디서 올라오고 어디서 내려가고 라는 의미가 별로 없다. 능선길이다만 오름과 내림이 극단적인 경우가 많고, 높이조차도 거기서 거기인지라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묻는 것이 현명한 물음일 게다.
다시 길은 잠시 내려가다 오르기를 반복한다. 철마산 측량 삼각점을 지나 다시 힘을 내서 오르막을 더 오르니 주미산 정상이 보인다. 다른 정상처럼 ‘여기가 정상이구나~’ 이런 느낌보다는 가던 길 멈춰 서서 경치도 바라보고 끼니도 때울 수 있는 그런 조금의 평지다. 그런 곳에 몇 년 전에 공주시에서 전망 데크를 설치했다. 가만히 지도를 들여다보니 주미산은 공주생명과학고 제2농장 뒷산에서 시작되는 병풍같이 가파르게 이어진 산줄기의 끝자락에 해당 된다.이곳이 동쪽 능선에서 바라본 병풍의 가장자리요 가장 우뚝 솟은 곳이었다. 옆으로 돌아서니 이렇게 얌전하게 보일 뿐이다.
아까도 잠시 주민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만, 주미산에 도착했으니 다시좀 해볼까나?
여기가 배의 끝부분이라고? 주미산 [배舟 꼬리尾]
금학동 수원지 생태공원과 이인면 주미리의 경계에 있는 381m
공주의 정남쪽에 있고 서쪽 두리봉(망월산), 동쪽 월성산(봉화대)과 함께 공주시를 둘러싼 모습이 커다란 배의 형상이고 배의 꼬리에 해당한다고 산 명칭이 주어졌다고 한다.
공주대간은 금강까지 뻗어내려 공주산성까지 이어졌으나 시가지 개발과 함께 국고개가 깍여 내려갔다고 한다. 아~ 그래서 완벽한 배 모양이 아니었나 보구나.
정상에 누군가 쌓아 놓은 아담한 돌탑과 시에서 세운 정상석이 서 있고, 산중턱에는 가보지는 못했지만 공주 주미사지(公州舟尾寺址:충남기념물 38)가 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니 능치고개(웅치) 아래로 삼문사라는 암자가 있고, 산 밑에는 사공이 배를 부리는 형상의 사공바위가 있다고 하는데, 사공바위? 글쎄 그게 사공바위였나? 이번 주 일요일엔 아이와 함께 다시 찾아가서 자세히 바라봐야겠군.
주미산 정상에서 바로 수원지로 가는 옛길이 있다. 몇 년 전 희미한 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길을 잃고 좀 헤맸기도 했지. 주미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말 그대로 ‘내려오는 길’이라는 선입견은 버려야 한다. 이제 내려가는 길만 남았다는 말 때문에, 이 길 때문에 ‘윤구라’라는 별명이 생겼다. 내려가는 길이지만 3곳 정도 만만치 않은 오르막이 인내심을 요구하게 만든다.
내려가는 길에 두 곳정도 수원지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제 수원지가 금학생태공원으로 조성이 되면서 예전에 길을 뚫고 다녔던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친절하게 길을 잘 닦아 놓았으니까. 가을이면 봉화대 아랫자락과 이곳 내려가는 길에서는 산밤을 줍는 재미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주미산 데크에서 볼수 있는 주변 전망>
▶ 우금티 牛禁峙 9.32km
주미산에서 내려오면 남북으로 이어진 도로를 만난다. 산과 산 사이를 조금이라도 쉬 넘자니 도로를 낸 모양이 조각칼로 깊숙이 파놓은 것 같이 고갯길을 내려 앉힌 느낌이 든다. 고개 이름이 우금티 이다.
한자로 牛禁峙.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 우금(牛禁)과 우금(牛金)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옛날에 도둑이 많아 해가 저물면 소를 끌고 고개를 넘어가다 도둑들한테 빼앗긴다고 해서 관에서 해가 지고 나서는 소를 몰고 고개를 못 넘게 했다 하여 우금(牛禁)이라고 불렀댄다. 다른 이야기는 고개에서 금송아지가 나왔다고 해서 우금(牛金)이라고 불렀다 다네.
<우금티 너털: 4차선으로 확장하면서 터널을 세우고 위에 흙을 올렸다>
4차선 도로를 내면서 다행히 우금티터널을 만들어 흙을 덮어 주미산에서 우금티를 끼고 견준산으로 이어지는 대간길이 살아났다. 공주대간 능선 중 이곳을 일대가 동학농민운동의 마지막 주된 격전지였으며, 전적지(사적 387)로 지정되어 있다.
<2차전투: 우금치 혈전, 11.08.~ 11.11.>
10월25일까지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논산에서 약 1주 동안 전열을 재정비한 뒤 11월 8일 공주를 향해 최후 결전을 감행한다. 관군은 동학농민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이인과 판치에서 퇴각한다. 농민군의 공격에 놀란 관군과 일본군은 대간 줄기를 따라 금학동, 봉수대, 웅치, 효포, 우금치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한다. 동학농민군은 동쪽부터 서쪽 봉황산까지 30~40여리(13~16km)에 걸쳐 깃발을 꽂아 군세를 과세했다고 하는데, 대간길이 13km 정도니까 공주시내 전체를 둘러쌓은 것이다. 우금치 진격을 위해 우금치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는 방어선을 교란시키려고 효포 지역의 두 봉우리에서 공격할 듯 기세를 취기까지 했단다.
9일 오전 10시 마침내 동학농민군은 우금치를 향해 진격을 한다. 우금치 진지에 불과 몇 미터까지 돌진하였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월등한 화력에 막혀 오르다 밀리기를 40~50회를 거듭하였지만 농민군의 시체만 쌓여갈 뿐 끝내 고개를 뚫리지 않았다고 한다. 8시경 철수를 시작함에 따라 공주전투의 막이 내리기 시작했다. 두 차례에 걸친 공주 전투는 동학농민형명 전 기간에 걸쳐 4만명이 넘는 최대 규모였으나 다음 두가지 요인으로 패하고 말았다.
①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무기의 절대적인 열세에는 어쩔 수 없었다. 일본군은 대포와 사거리가 수백미터가 넘는 카트링식 기관총과 스나이더 소총(최대 2,000m 사거리의 미국제 무기), 무라타 소총을 높은 진지에서 아래로 쏘아댔고, 1초에 한발씩 발사되는 소총에 비해 농민군의 화승총은 불을 붙여 발사하는데 30초나 걸리고 사정거리도 1/10에도 못 미치는 100보 정도에 그쳤다. 게다가 화승총과 창의 비율이 1:10 이었다고 한다. 당시 김윤식은 일본군 1명이 농민군 수천을 상대할 수 있고, 경국 1명은 수십 명을 상대할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화승총과 근대식 소총의 차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②전술의 부재란다. 잘 훈련된 일본 정예군이 유리한 지형을 먼저 선점해서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데 무리하게 전면전을 펼쳤다는 것이다. 아마도 세성산과 홍주성 전투에서의 패배로 고립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성급한 전면전으로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햇살은 따사롭지만 아직 대지의 차가운 기운을 이겨내기에는 힘이 부치나보다.
대나무살로 만든 사람모양의 조형물이 비바람에 쓰러져 고개 가장자리에 눕혀진 모습이 120년 전의 그날 농민군 같이 눈에 들어오니 가슴이 시려진다. 이 고갯길을 넘어보지도 못하고 그 많은 선조들이 고개 언저리에서 피를 흘려야 했다.
패배의 역사라 그런지 사람들은 이곳의 일을 들춰내기 싫은가보다. 관심도 없나보다. 그나마 고개를 넘어 세워진 동학혁명위령탑은 유령이라도 나올 만큼 누더기가 되어 쓸쓸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다.
<동학혁명 위령탑>
<누군가 기념비문에 맘에 안 드는 구절이 있었는지 갈아내어 글씨를 알아 볼수 없는 부분이 있다>
<지금은 4차선 도로지만, 저 아래(이인 방면)에서 농민군이 이 고갯길을 넘으려 그 많은 희생을 치렀음에도...>
▶ 두리봉 11.15km
이제 씁쓸한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대간에 오른다. 견준산은 주미산과 마주보고 서쪽에 있는 낮은 산이지만 높이와 달리 능선까지의 짧은 거리가 무진장 가파르다. 두 다리보다는 두 팔로 스틱에 의지해서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우금치에서 두리봉을 거쳐 대간의 마지막인 공주경철서까지 내 걸음으로는 1시간 정도다. 얼마 남지 않은 거리건만 이미 몸은 천근만근이다. 견준산 오르는 길은 짧은 거리지만 하늘색 FRP 산불감시초소가 나올 때까지 내 두 다리를 후끈 달아오르게 한다.
다행이 이후로는 두리봉까지 점잔은 능선길이다. 지나면서 나뭇가지 사이로 힐끗 보이는 두리봉의 생김새는 지친 산사람의 가슴을 턱 막히게 한다. 예까지 왔으니 돌아갈 수도 없고... 저길 또 올라야 하느니.
두루뭉술하게 동그랗게 생겼다고 두리봉이라고 하는 것 같다만, 어감과는 달리 막바지 악을 쓰게 만드네. 석 달만의 산행인데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금강대교에서 바라본 두리봉, 천안방면에서 오다보면 저 봉우리가 반갑게 인사를 해준다>
천안방면에서 공주로 들어오다 보면 높이에 비해 유난히 오똑 솟아있는 두리봉이 보인다. 생김 만큼이나 올라서면 주변 경치를 한꺼번에 바라볼 수 있는 횡재를 얻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모양새다.
<내고향 공주>
<강건너에 신관동 시가지까지 보인다>
<서쪽으로는 한산소, 공주보, 우성지역의 너른 평지>
두리봉에 서서 동쪽을 바라보면 공주대간 품안에 내 태어나고 살고 있는 고향땅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에 설치된 망원경으로 내 태어난 집을 찾아본다. 그 옆으로 내 다녔던 학교와 뛰어 놀던 뒷동산도 여전히 나를 바라보면서 정겨운 웃음을 던져준다.
뒤로 돌아서면 금강줄기가 휘어 돌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 강줄기를 공주보가 잠시 멈춰놓고 있는 모양이 통행세라도 받을 요량인가보다. 가까이는 한산소, 검상농공단지와 공주-서천 고속도로 넘어서는 우성 지역의 너른 들판이 넉넉하게 인심을 쓰고 있다.
이제 산행을 마무리해야겠군.
경찰서를 지나면서 산행 앱 Oruxmaps를 종료시킨다.(12.39km) 그러고서 천천히 걸어 내려오면 송장배미란 곳을 지나게 된다. 삼거리였던 곳이 얼마 전에 도로가 나면서 사거리가 된 그 곳에 ‘송장배미’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동학농민군의 시련은 우금치 전투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퇴각하는 농민군에 대한 관군과 일본군의 소탕은 ‘학살’ 그 자체였고 약탈까지 일삼았다고 한다. 길에 버려진 무기와 시체가 눈에 걸리고 발에 채였다니 얼마나 참담했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
관군과 농민군에 밀린 동학농민군이 익사했다는 용못은 점점 길을 내느라 규모도 작아져서 송장배미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마저 없다면 어찌 그날을 한 번이라도 떠올릴 수 있을까? 길을 닦다가 해골이 많이 나왔다는 하고개, 점심 먹다가 일본군에게 몰살당한 동학농민군이 즐비해 공동묘지가 되었다는 승주골, 은골, 방축골...
고부민란으로부터 1년여 걸친 농학농민운동은 실패했지만 참가했던 농민군들이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되었고, 3·1독립운동으로 그 정신이 계승되었다고 한다.
산행 시작부근인 봉화대 지역부터 산행이 마무리되는 이곳까지 120년 전 동학농민군의 넋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금성여자고등학교 앞 송장배미(용못)>
<공주경찰서, 송장배미 쪽에서 공주시가지로 넘어오는 고개, 하고개>
민란으로까지 번질 정도로 궁핍한 백성들을 제대로 보듬지도 못하고 외세의 도움을 요청하는 바람에 외세 침략의 발판이 되고만 뼈아픈 우리의 역사. 씁쓸한 패배의 기록이지만 올바르게 인식하고 다시는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우리 지역적으로는 보수적 지역풍토의 한계가 있다면 과감하게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자료를 찾다 우연히 보게 된 호남지역의 언론보도에서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기사글 중, “동학농민운동 전체 과정에서 가장 큰 상징성을 갖는 공주에서 당시의 역사가 외면 받는 이유를 지역적으로 보수적 풍토가 강해 진압한 곳이라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군의 서울 진격을 막아 나라를 지켰다는 자부심이 더 우위라는 이야기입니다.”라는 우금티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의 인터뷰를 보면서 나를 포함한 우리가 정말 그랬나? 내게 물어본다. “왜 우리가 전라도 사람들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가?”하며 반대운동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참된 교훈을 얻으려하기 전에 ‘감정’이 아니라 ‘이성’으로 한번쯤 차분하게 되돌아보는 계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 이렇게 석 달만의 산행을 무사히 마친다만 생각의 무게는 어쩐지 더 무거워지는 것 같다.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효자 이각 정려비각 / 동학운동 / 주미산 [舟尾山] (두산백과)
동학농민혁명 종합정보시스템동학농민혁명 문헌사료 1894년8월21일(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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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뉴스 2012.12.07.자 특별기고
전북일보 204.08.05.자 기획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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