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1쇄 2017/03/31
69쇄 2019/11/25
손원평
㈜창비
약국서 잇몸 영양제를 구매할 때 약사가 한 말이 생각난다.
원래 인류의 약은 인간 몸의 기관과 비슷한 것을 섭취하면서 시작했다고,
그 당시 잇몸 영양제가 치아를 닮은 옥수수에서 추출했다고 어쩌고.
아무튼, 알렉시티미아-감정표현 불능증을 가진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다.
장편소설.
선천적으로 편도체 크기가 작은 경우 유독 공포를 잘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후천적으로도 트라우마을 겪을 경우 나타나기도 한다고 한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얼마나 ‘보통’으로 살아가기 힘든지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주인공은 그 편도체를 아몬드로 묘사한다.
아몬드 크기와 모양을 닮았나보다.
아마도 그래서 그런지 그의 엄마는 아몬드를 먹인 것 같다. 더 커지라고.
주인공은 여러 아몬드 중 캘리포니아산이 최고라고 하더군.
하지만 난 아몬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견과류 봉지에 든 것 중 꺼리는 것 중 하나이다.
괜히 먹으면 위에 부담 가는 느낌이다. 부담이 가더만.
그래서 그런지 견과류 아몬드도 아닌데, 집안 여기저기서 굴러다니는 책을 보고서도 쳐다보지도 않았지.
책 표지도 아몬드색이다. ㅎ
방학 맞은 작은 아이에게 책 좀 읽으라고 이런저런 타박을 하는데 큰아이가 읽을만하다고 우리 둘 사이에 놓고 간 책이다.
아이가 읽어야 할 책인데 어찌 내 책상 위에 두 주 동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내칠 힘도 없었거니와 아몬드에 대한 조잡한 내 편견과 혹시나 비극 같은 소재가 꺼려져 망설이다...
한 페이지를 넘겼다.
몽땅 읽고 말았다.
오십에 읽는 논어보다 깊은 감동을 주는 것 같다.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감정 불감증으로 남들 보기엔 무덤덤하게 보이는 그래서 고통받고 별종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주인공의 성장 소설이다.
소년에게 뉴스에서나 보던 비극이 갑작스레 현실로 다가온다.
그것도 크리스 마스 이브, 생일날.
그 난리통에 우연찮게 한 가정의 아들 역할을 잠시 대신 한다.
그 일을 계기로 불량끼 가득한 실제 아들과 엮인 주인공의 학창 생활 - 보통 사람 같았으면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불감증으로 괴롭힘에 대한 고통의 무감각은 불량아 곤이의 관심과 대화로 맺어진다.
물과 기름 같은 둘의 엮임에서 묘하게 서로 상대를 순수하고 투명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안에 있는 무언가를 보아주기 시작한다.
다독거림의 시작이다.
어른들, 아니 사회가 사회화라는 라벨링을 통해 감정까지 바코드 인식하듯 공산품처럼 쉽게 인식해서 분류해버리는 ‘보통’.
그 보통이 얼마나 어려운 수준인지 그려내고 있다.
곤이와 이성 친구를 알게 되는 과정에서 조금씩 ‘감정’이라는 것이 꿈틀댄다.
물론 그들 주변에는 비슷하지만 다른 아픔을 겪은 또 다른 어른들의 보살핌이 바람직한 방향을 잡아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소설이 갖는 만능적인 그 무언가도 있다만, 주인공이 이런 상황에서 흔하게 그려지는 천재는 아니다.
보통을 추구하는 아이다.
하지만 소설이기에 보통을 능가하는 이야기 꼭지.
어찌어찌 이야기는 클라이막스로 향한다.
점점 커져가는 그의 아몬드. 곤이를 ‘친구’로 느낀다. 감정.
주인공은 세상을 등지고 어둠 속으로 도망친 친구 곤이를 위해 영화같은 희생을 한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그 죽음은 감정 없는 삶의 끝이고,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만.
끝 무렵엔 이 아저씨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곤이의 아빠는 다시는 아이를 놓치지 않겠다고 한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의식을 찾는다.
책이 절정에 치닫는 암울함에서도 해피엔딩을 예감하고 있었지만,
과정이 리얼하다.
책을 쉬 놓을 수 없었다.
멋진 작가다.
해피엔딩이라서 맘이 편하다.
솔직히, 책 읽는 내내 머릿속과 가슴 속 묵직한 것들에 연휴 마지막 날이라는~ 이젠 무언가 해야만 한다는~ 답답함에 책 소재의 답답함이 더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해피엔딩이라서 맘이 편하다.
이 과정에서 뭐래도 하나 짐을 던 것 같다.
어느새, 어설프게도 내 보호자의 보호자가 되어버린 나.
주인공과 아이들의 시간과 내 시간은 같이 흘러가고 있다.
조금은 다른 방식과 다른 환경, 시간이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171쪽,
‘곤이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단순하고 투명했다. 나 같은 바보조차 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세상이 잔인한 곳이기 때문에 더 강해져야 한다고... 그게 곤이가 인생에 대한 내린 결론이었다.
어딘가를 걸을 때 엄마가 내 손을 꽉 잡았던 걸 기억한다. 엄마는 절대로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가끔은 아파서 내가 쓸며시... 우린 가족이니까 손을 잡고 걸어야만 한다고... 나는 누구에게서도 버려진 적이 없다.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내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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