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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주한 마음 틈으로 '제주'를 우겨 넣으니 참을 수 없는 평온이 몰려왔다
  • 비로서 허락한 소백산 비로봉 푸른 하늘과 초록 풀밭에 그리움까지 숨겨놓고 말았다
여행 이야기

공산성~정지산

by 여.울.목 2017. 6. 25.

공산성~정지산 유적

4.6km  1:50




오늘은 공산성 토성구역으로 들어가 공산성 성곽보다는 왕궁터를 가로질러 금서루로 나오기로 했다.

금서루를 나와서는 정지산 유적지를 돌아보기로 했다.

공주를 둘러쌓고 있는 산 모양새가 배의 모양이다.

그 배가 금강에 닿아 잠시 멈추는데, 그 산이 정지산이다.


아이가 따라나선다기에 등산보다는 평지보다는 조금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문화유산 답사길을 선택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군사와 행정의 요충지였다.

그러기에 성곽도 토성부터 석성, 그리고 다양한 문화재가 곳곳에 널려 있다.


정지산은 1996년도에 발굴이 되었으니까 그리 오래 된 것은 아니지만,

주변의 송산리 고분군과함께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오늘 우리 딸아이와 함께 걸은 구간이다.



2017-06-25_10-12-16_공산성_정지산.gpx





더운 날씨임에도 투정 한 마디 않고 따라다닌 아이가 참 대견스럽다.

아이를 생각해서 군데군데 쉴만한 곳에서 죄다 쉬었는데도 2시간 정도 걸렸다.


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둘러보면 더 여유롭고 가치있는 걸음이 될 것이다.




 

 


들머리로 잡은 지역은 공산성의 토성구역 부분이다.

올라서자마자 공산성의 가장 높은 지역에 다다를 수 있다.

오른길은 밤나무 농원을 지난다. 이제 밤꽃도 서둘러 땅으로 귀환을 하기 시작하고 있더군.

공산성과 옥녀봉성 사이에 이렇게 움푹 들어간 곳. 아무래도 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골짜기에서 뭔가 발굴작업이 한창이다.

지난 봄에 한 번 들렀는데, 발굴한 유물은 창고에 모두 감춰놓아서 그냥 밭전자로 田 파 놓은 발굴터만 구경하고 온 기억이 난다.

골짜기 사이로는 신관동 신 시가지가 보인다.



광복루에 올라서서 금강을 바라보는데,

나무가 울창해서 조망이 그리 좋지 않다.

하지만 그만큼 시원한 그늘이 있어 공산성을 걷는 내내 그늘 아래서 시원하게 걸음걸이를 할 수 있었다.



광복루(문화재자료 제50)와 백범 김구

지금은 무성한 나무에 가려 숨겨진 듯하지만, 광복루는 공주의 신구 도심을 한눈에 들어오는 가장 높은 전망대라고 한다

원래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었다

충청감영에 소속된 군사가 주둔하던 중군영의 출입문이자 누각으로 해상루라고 했다. 그런데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될 때 중군영도 폐쇄되었다. 그러다 일본 데라우찌 총독이 공주를 방문기념으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웅심각이라 바꾸었다.


광복 직후 19464월 공주를 찾은 백범 김구와 이시영 선생이 나라를 되찾은 것을 기리는 뜻에서 광복루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목재건물은 일반 시멘트콘크리트보다 이동성이 뛰어난 것 같다.

쓰던 목재를 옮겨다 그대로 재현한 건물을 본 기억이 많다.






명국삼장비(유형문화재 제36)

1562년 일진왜란을 일으킨 왜가 1597년 다시 정유재란을 일으켰는데, 충청도에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공주에 명나라 군대가 파견되어 주둔하게 되었다.

당시 제독 이공, 위관 임제, 유격장 남방위라는 세 장수가 공주에 머물며 군대를 지휘했는데, 공주사람들이 이에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명군이 떠나자 1599년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 후 비석은 홍수로 매몰되었다 1713(숙종39) 다시 세웠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일본인들이 왜구라는 글자를 지우고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묻어두기도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지금위치에 세워졌다.


사실 명나라 군대가 조선땅에 들어와 제 몫을 다했다는 소리는 그닥 들어보지 못했다.

아마도 사대부들의 숭명사상에 못이겨 힘 없는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송덕비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단지, '왜구'라는 글자를 지워 땅에 파 묻었다는 일본인들에 대한 항일 감정 때문에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는 것 같다.


처음 이 비를 보았을 때는 뭔 삼국지 이야기를 하는 줄 았았다. ㅎ 






임류각

공산성에는 백제 왕이 살았기에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 많았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임류각이다. 

삼국사기에는 “500(동성왕 22)에 연못을 파고 기이한 금수를 길렀다고 하고 흐르는 금강 물을 내려본다는 뜻으로 임류각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높이가 15미터나 되고 화려했고, 금강과 산세도 감상할 수 있는 종합 조경 건축에 해당되었다.

왕과 신하들의 연회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에 공산성 발굴 조사 과정에서 임류각 터를 발견하고, 1993년에 문헌 기록과 발굴 조사결과를 근거로 2층 누각으로 복원하였다. 현재 임류각의 단청 문양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장신구와 무덤방의 벽돌에 남겨진 무늬를 많이 활용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주춧돌은 동성왕 당시에 사용된 것이라며, 42개 중 9개는 없어졌다. 자가 새겨진 기와와 백제 토기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 건물터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가치가 크다.



아래 사진은 사료에 따라 임류각을 복원한 것이다.


아래 사진이 임류각이 있었다는 터

사실, 거대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고 하기엔 터가 너무 좁다.

내가 생각할 때는 '강당지'라는 터가 아무래도 임류각 터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단지 流라는 한자가 있는 기와가 발견되서 그런가본데,

건물이 부서지면서 건물 파편이 여기저기 널려져서 그럴 것 같은데... 아무튼 상상보다는 증거가 있으니 그렇다고 여겨야지.




임류각에서 포장된 길 말고 오솔길로 내려오면 아래와 같은 건물터를 여러군데 만날 수 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행정의 중심지였기에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은 '강당 터'의 모습이다.


공산성 강당지

1989년 발굴조사를 통해 발견된 건물터다. 통일시라시대 8~9세기경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에 9주의 하나인 웅천주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만들어진 관청 건물로 보인다.


평면적이 910( 275)이상으로 규모가 크며, 건물 기초부에는 백제시대 바닥면을 다진 층이 남아 있고 기둥을 받친 40개의 주춧돌 중 19개가 원상태로 복원되었다.





강당지에서 조금더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면 공산성 12각 건물지를 만난다.


공산성 12각 건물지

12각형의 특이한 모양의 건물이 있던 터. 1990년 발굴 때 출토된 기와와 토기 등으로 8~9세기 경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막돌로 원형에 가깝게 건물 평면 기단을 만들고, 그 안에 12각형 모양으로 주춧돌을 3줄로 배치한 후 건물을 올렸다.

12각 건물은 가뭄이나, 전염병, 전쟁 때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라고 한다. 12각은 하늘을 상징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하늘에 대한 제산공간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공산성 쌍수정(문화재자료 제49)

1734(영조10)에 인조를 기리기 위해 이수항이 세운 정자이다. 인조가 이괄의 난(1624)을 피해 6일간 공산성에 머물며, 두 그루의 나무 밑에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인조는 자신이 기대고 있던 쌍수에 정삼품의 작위를 내렸다. 관찰사 이수항이 늙어 없어진 나무의 자리에 쌍수정을 지었다.

 


무능했던 임금이었지만 군왕의 힘이 엄청나기는 했나보다.

아래 사진은 쌍수정에서 바라본 왕궁추정 터 전경



왕궁터는 백제시대 당시의 건물양식과 음식이나 물품을 보관하던 부속건물 터를 안고 있다.


벽주 건물지

도랑을 파고 여러 개의 기둥을 세워 벽체가 건물의 상부구조를 지탱할 수 잇게 하기 위해서 였다. 

벽주건물은 지붕에 기와를 사용한 기와집의 출현을 보여주며, 이런 방식은 웅진시대에서 시작해서 사비시대까지 공주, 부여, 익산지역을 중심으로 사용되었고, 일본까지 전해졌다.


 

목곽고

식품이나 물품을 보관하던 시설이다. 암반현지반의 지표 쪽은 4.6m*4.2m 아래는 3.8m*3.3m로 조금 좁아지는 구조로 깊이가 2.9m라고 한다. 비와 바람을 막기 위해서 기와를 얹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도 같은 양식의 사비시대 목곽고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왕궁터 제일 끝에 있는 백제 연못 터


백제 연못

왕궁 터에서 발견된 인공연못빗물을 받아 연못 겸 방화수로 사용평면원 원형이고 단면은 대접형태이다화강암 지반을 지름 약 9.5m 정도로 넓게 판 후 자연석을 쌓아 올렸다바닥면에는 40~50cm 정도의 판석을 깔았다벽석 뒷면은 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m 너비로 점토를 두텁게 채워 보강하였다물을 끌어들이거나 내보내는 시설은 보이지 않음.

연못 안에서 많은 양의 백제시대 삼족토기와 그릇받침 등 토기와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백제 연못에서 쌍수정을 바라본다.

녹음이 우거져서 이런저런 문화재가 그 안으로 숨어든 것 같다.


이제 왕궁터를 나와 공산성의 남쪽 성곽을 타고 금서루 쪽으로 내려선다.



지나는 길에 두 겹으로 올려 쌓은 석성을 볼 수 있다.

성곽 대부분이 이런 식인데, 수풀로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데 지금 이 각도에서는 잘 보인다.

내 어릴 적만해도 아래층 성곽만 있었는데, 복원과정에서 위로 한 층 더 올린 것으로 생각된다.




오른편으로 나무와 나무 사이로 멀리 정지산 유적지가 보인다.




드디어 금서루에 도착!

주차장이 있기에 제법 많은 관광객들이 눈에 들어온다.

예서 보니 이분들 대충 공산성의 어느부분만을 보고 가는지 짐작이 간다.

내 지나온 길에는 토박이들 말고는 없는 것 같던데.



공산성 비석군

이 송덕비들... 대부분이 백성의 주린배를 더 조여 만들었을 텐데 ㅎ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그냥 지나치리오~

우리 아이 뭔가 입에 물려줘야지 내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움직거리지.

공산성의 명물 움직이는 휴게음식점이다.




이제 정지산으로 가기 위해 금강대교 앞을 지나야 한다.

금강대교 앞을 씩씩하게 지키고 있는 곰 동상

어릴 때 여기까지 오려면 한참을 왔어야 했는데,

그러니 우리 아이는 이 더운 날 얼마나 힘들까.


그래도 좋은 추억으로 남겠지?




금강대교를 건너지는 않고, 바로앞 횡단보도에서 왼쪽으로 강을 따라 서진을 한다.



그래 그렇게 금강대교를 약올리고 왼쪽으로 꺽어 서쪽으로 쭈~욱 걸으면 앞에 보이는 평평한 산이 정지산이다.

강변을 따라 대로를 내면서 산을 깎아야 했는데,

유적이 나와서 일부러 암반도 없는데 산을 지탱하는 공법으로 터널을 뚫었다.


그 뒤로 보이는 산은  제비꼬리를 닯았다는 연미산이다.



정지산 유적지의 입구는 처음 찾는 사람들에게 헤매기 딱 좋게 되어 있다.

뭐라 설명 못하겠다.

노인병원 옆으로 그냥 쭉욱 올라가면 된다.


아님 내가 올린 지도캡쳐 사진과 궤적을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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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정지산 유적(사적 제474)

정지산 구릉지대에 자리 잡은 유적으로 1996년 국립공주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국가적 차원의 제의 시설로 추정된다. 국가 중요시설에만 사용된 8잎의 연꽃잎이 새겨진 수막새가 발견되었고, 화려한 장식이 부착된 장고형 그릇받침 등 국가 제사와 관련된 유물이 나왔다.


무령왕릉 출토 매지권에 기록된 신지申地, 유지酉地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어, 왕비의 시신이 사후 무령왕릉에 안치되기까지 2~3여 년간 수습되어 보관된 곳일 가능성이 높게 제기되고 있다. 특히 건물의 기둥을 받쳐주는 초석이 없는 건물로 제작되어 영구적인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과 유적지 내의 대벽건물지에서는 얼음을 보관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이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기와건물지와 1,2,3호 대벽건물지, 목책열로 배치되어 있다.

기와건물지는 정지산 유적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건물로 추정된다. 8*6.4m 규모에 3열의 기둥으로 이루어 졌으며,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기둥이 많고 일반 건물과 달리 기둥을 받쳐주는 적심석과 초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구조적으로 지상에 떠 있었으며, 높이는 구다지 높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벽건물 1,2,3

네 벽이 들어갈 곳에 사각형 모양으로 땅을 파고 큰 기둥 위치를 다시 파서 기둥을 세운 후 그 사이에 작은 기둥을 촘촘히 박아 벽체를 만든 건물이다.



정지산 유직저 전경


정지산 유적지 전망데크에서 공산성을 볼 수 있다.

사진의 오른편 평평해 보이는 산이 공산성이 있는 곳이다.

저기 왕궁에서 여기의 방향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매지권에 기록된 신지申地유지酉地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 다시 산길을 따라 국립공주박물관까지 걸어간다.


여기까지 3.4km를 왔다.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었고,



그러니까 

앞으로 1.2km 20분 정도 산길을 걸으면 된다.




산길은 잘 정비되어 있다.

연인과 함께 팔짱을 끼고 갈 수 있을 정도로 잘 닦여져 있다.




생각보다 쉽게 박물관으로 내려선다.


중간에 송산리고분군과 갈리는 길이 있던데, 우리는 박물관으로 종착지를 잡았다.



몇 주 전에 왔을 때는 석수가 초록 이끼로 덮혀 있더니,

그것이 꽃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나보다.

오늘 보니 화사하게 활짝 피었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박물관 안은 다음 기회에 다시~ 


오늘 아이와 함께 하는 즐거운 답사?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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