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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주한 마음 틈으로 '제주'를 우겨 넣으니 참을 수 없는 평온이 몰려왔다
  • 비로서 허락한 소백산 비로봉 푸른 하늘과 초록 풀밭에 그리움까지 숨겨놓고 말았다
산행 이야기

초겨울 계룡산 자연선릉_2008.11.30.

by 여.울.목 2014. 8. 29.

초겨울 계룡산 자연선릉
2008.11.30.

 

초겨울

목요일 저녁에 심하게 술병을 빨았나보다. 금요일 저녁까지 한 끼니도 못 때우고 골골거렸다. 금요일 저녁에 잡힌 약속... 그냥 넘겨 버렸다.

토요일은 근신이다. 부모님과 가족들과 간단히 외식을 하고 저녁에는 큰형님 식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일요일 아침,

아직 목요일의 여파가 남아 몸이 무겁지만, 그보다 내 몸을 자꾸 비틀고 기지개를 펴도 시원치 않은 것이 산에 오르고 싶은 내 몸뚱이의 반응 때문인 것 같다.

지난, 지지난 산행에서 등산로를 잃고 헤맸던 기억에 이번에 기필코 사람 많은 곳으로 길 잃어 헤매는 짓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계룡산 동학사 코스를 떠올렸다.

낮부터는 따듯할 거라는 일기예보를 듣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서는 나에게 굳이 아내가 자켓을 건넨다. 현관문을 나서니 자켓을 덧입고 나온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2008년 11월의 마지막 날 이다. 11월의 마지막 날 때문이기 보다는 내일이 12월이라는 생각에 좀 숙연해진다. 아침 10시인데 날이 추워서 인지 동학사 주차장은 아직 메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오늘은 관리공단 홈피에 나와 있는 정코스 대로 가보려고 맘을 먹었다.

동학사주차장-동학사-은선폭포-관음봉고개-연천봉-관음봉-삼불봉-남매탑-동학사-동학사주차장 총 11.8km 7시간 코스다.

이중 시간상 연천봉까지의 0.9km 40분은 제외하기로 했다.

항상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다.

동학사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 주차료 4,000원을 징수한다. 쩝~

건강을 생각해서 나온 터인데 돈 몇 천원이 왜 이리 아깝게 느껴지던지...

단돈 2,000원이라도 아껴 볼 양으로 코스를 거꾸로 잡았다. 아니 동학사 매표소 전 천정탐방지원센터로 올라갔다. 결국 큰배재와 남매탑으로 본래 코스와 만난다. 처음보다 거리가 좀 늘었다.

10:00 라이벌

산악회에서 많이 왔다. 산악회, 아무래도 묻지마 관광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만, 정말 산을 좋아하는 동호인들 이다.

어떨 결에 50줄 아저씨 일행과 경쟁이 붙었다. 아직도 내 맘 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이놈의 승부욕... 아니 무슨 일이든 들어붙는 열정이라고 과대 포장이라도 해볼까?

아침 산속 차가운 기온 탓에 꼭꼭 여미었던 옷깃은 이제 내 몸 속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땀줄기로 하나씩 풀려 나간다.

그렇게 10여분 만에 내가 겉에 입은 자켓을 벗어 가방에 넣는 동안 두 50대 아저씨도 앉아 배낭을 여는 것 외에 쉬지도 않고 열심히 가신다.

대부분 저 나이면 아무리 잘 가시더라도 어느 정도 가시면 나이 탓을 하면 올라오던 길을 쳐다보며 바위에 걸터앉기 마련인데... 정말이지 내가 계속 앞서기 힘들다. 그냥 선두를 내주었다. 그렇게 계속되는 산행, 나도 끝까지 따라 붙는다.

그러다 큰배재를 얼마 안 남기고 한 아저씨가 먼저 바위에 털썩, 조금 더 힘을 내서 다른 한 분을 따라 잡는다.

10:40 번개 1호가 생각난다.

장군봉을 돌아 나무 계단을 지나 내려왔던 지난 2008 새해맞이 번개 산행이 생각난다. 이리로 내려와 저리 천정탐방지원센터 쪽으로 내려갔었다.

막판 스파트에 많은 이를 제치고 큰배재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차가운 공기에 덥혀진 몸뚱이를 식힐 동안 그 아저씨들 벌써 나를 따라 잡고 처음 쉬었던 것만큼 쉬고는 다시 길을 제촉해서 간다.

결국 내가 진 게임인 셈이다.

10:55 남매탑

열기를 식히고 맘을 가다듬고 정진했다.

남매탑이 있는 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정말 많다. 어디서 언제 이렇게 모여든 걸까?

과음으로 힘 빠져 있던 내 근육이 과욕으로 더 지쳐 좀 쉬어야 할 것 같다.

문득 아내와의 데이트가 생각난다. 유난히도 산을 못타는 아내를 농담 반 진담 반 구박하면서 끌고 올라왔던 때가 생각난다. 벌써 10년하고도 몇 해가 지났구나...

'우리 아그들이 빨리 자라야 아내와 함께 다시 오붓하게 오를 텐데...' 개콘에서 처럼 분무기로 물을 듬뿍 뿌려줘야 하나?

하늘 이 참 맑다. 나만 느끼는 게 아닌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연신 절벽과 맞닿은 하늘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11:15 이 맛에 산다.

좀 쉬었더니 살만하다. 보온통에서 차를 따라 너무 식어버린 몸을 따스히 하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지루한 돌계단. 이걸 쌓은 사람도 있는데 오르는 난 뭐냐. 철계단을 지나니 탁 트인 삼불봉 이다.

다들 탄성이다. "이 맛에 산다." 꺼내온 음식에 간단한 반주를 즐기는 사람들... 집에 남기고 온 가족들에게 멋진 풍경을 보고는 자랑삼아 전화 하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흔적을 남기고 싶어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그리 넓지 않은 봉우리에는 사람들의 옷 색깔 때문에 뒤 늦게 단풍이 한창이다.

참 좋다. 어제 그제 내린 비와 바람 때문에 하늘이 깨끗하게 세안을 했다.

지난 눈 덮인 계룡산도 좋았지만 멀리까지 탁 트인 전망... 정말 굿이다.

12:10 자연선릉의 매력에 빠지다.

이상하게도 내 기억에 자연선릉은... 관음봉에서 삼불봉 방향 뿐이다. 이렇게 삼불봉을 지나 관음봉으로 가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계룡산 이쪽 저쪽을 다니다 보니 이제 조금씩 산의 생김새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 주에 오른 우산봉과 신선봉, 여름에 올랐던 갑하산... 길을 잃고 헤맸던 삽재-도덕봉코스... 예전에 산에 올라 손가락질하며 여기가 어디고 저기가 어디고 하던 어른들이 이상하게만 보였는데,

이제 내가 그런 어른이 되고 만 것이다.

거꾸로 접어드는 선릉 정말 매력적이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천황봉의 거친 산줄기가 왜이리 아름답냐.

햇볕이 들지 않는 음지는 어제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아 하얗고 힘차게 호랑이 등줄기인양 뻗어가는 천황봉-쌍개봉 능선...

빨랑 저 능선도 개방이 되어야 할텐데...

그래 이 경치에 대한 느낌은 매번 다니던 방향에서는 잘 못 느끼던 감흥이다.

길이 좁아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다른 일행인데도 한 일행이 된 것처럼 움직이다 잠시 쉬어가는 공터가 나오면 또 추월을 하고 또다시 한 일행을 이룬다.

햇볕이 너무 따스하다. 하모니카를 부는 아저씨, 너무 좋은 소리에 사람들이 발길을 멈춘다.

관음봉...

삼불봉 못지 않게 몸살을 앓는다. 다들 자리를 잡고 싸 온 음식을 먹는다.

나도 얼마 전 구입한 보온도시락을 꺼내 허기를 채운다. 아 근데 지난 과음의 후유증으로 아직 속이, 속이 아닌가 보다. 시원하고 매콤한 김치만 먹힌다.

그러고 보니 술 한 모금 안대고 산행을 했다. 하루를 술 한 모금 입에 안대고 지난다는 것도 참 힘든 것 같다. 많이 마시는 것도 문제지만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는 게 더 문제가 아닐까?

내려오는 길에 잔으로 파는 동동주와 어묵국물이 절실했지만 꾸~욱 참았다. 대견하다.

의외로 내려오는 길이 길었다. 동학사에서 주차장까지만 해도 근 2km나 된다.

13:30 산행을 접으며...

주차장은 어느새 만원이다.

과음, 과욕으로 주말을 보내는 구나. 오늘은 좀 종아리에 통증이 있는 것 같다. 아직도 50대 두 아저씨가 생각난다. 자기 페이스 그대로 지켜가는 두 분 진정한 인생의 선배였습니다.

4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자랑할 일이 아니다. 후유증도 심하다. 지금 모살을 앓고 있다. 무리하지 말자.

그래도 좋았다. 다음 주에 또 가 볼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