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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주한 마음 틈으로 '제주'를 우겨 넣으니 참을 수 없는 평온이 몰려왔다
  • 비로서 허락한 소백산 비로봉 푸른 하늘과 초록 풀밭에 그리움까지 숨겨놓고 말았다
산행 이야기

액땜 산행

by 여.울.목 2017. 2. 14.

선잠

다행히 전날 술은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얼마 전부터는 산행 일정이 있으면 술을 마시든 않든 선잠을 자게 된다.

일정이 1시간이나 늦춰졌는데도 잠은 일찌감치 달아나 버렸다.


점심꺼리를 넣지 않으니 홀쭉해진 배낭이지만 이것저것 넣다보니 그래도 배가 불룩 솟아오른다.

창밖을 보니 눈이 많지는 않지만 살포시 세상을 덮었다.

아이젠을 챙겨야겠다.




그놈의 아이젠Ⅰ

그놈의 아이젠 때문이다.

한 5년 쯤 되었나? 그 때는 눈도 잘 안 오던 시절이라 연휴를 맞아 설경이 펼쳐진 계룡산 소식에 아이젠을 차고 1번 무전기와 계룡산 장군봉 코스(맞나?)를 찾았다. 관리공단 단속반원의 눈을 피해 라면을 끓여먹으려 샛길을 기웃거리다 적당한 장소를 발견했는데,

IC8, X을 밟고 말았다. 호젓이 밥 먹기 좋은 장소가 응가하기 좋은 장소인가?


눈과 계곡물에 수백 번을 닦아댔는데도 찝찝하다. 1번 무전기는 키득키득 웃기만 하고...

시간 이 꽤 흘렀는데도 그놈의 아이젠을 보면 자꾸 X 생각이 난다.

아이젠 버리기도 뭣하고, 지금도 들고 다니는데 그놈은 꼭 비닐봉투에 넣어 따로 보관하는 습관이 들었다.


그런 그놈을 차 트렁크에 놓고 내린 것이다.

그놈을 꺼내서 아이젠케이스에 집어넣다가 스마트폰을 놓치고 말았다.

처음엔 보호필름에 거미줄처럼 자잘한 금이 갔겠구나 생각했는데, 액정이 말 그대로 “아작” 났다. 보호필름을 떼어내면 유리가루가 우수수 떨어질 것 같다.

그걸 고치러 갔더니 A/S기사가 “아이고야~” 한탄을 한다. 15만원이 그놈 때문에 순식간에 날아갔다.




우쨌거나 감정을 숨긴 채 셔틀버스 시간에 맞춰 아파트 입구로 나갔는데, 언 놈이 입구 한 가운데다가 토악질을 한 것이여~ 기분 더럽더군.




갑사로 가는 길

시산제까지 함께 치르려 좀 쉬운 코스를 잡아서 그런지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셔틀버스에 올랐지만, 당초 온다는 분들 중 10여 명은 아예 연락두절이다.

날씨가 무척이나 매섭다는 일기예보 탓에 많은 사람들이 따듯한 아랫목을 선택했나보다. 아무튼 차는 버렸어도 시산제 장소로는 바로 오실 것 같다.


오늘 탐방코스는 “천정골~남매탑~삼불봉~금잔디고개~갑사” 이다. 갑사로 가는 길이네.

고등학교 1학년 때 현대수필로 교과서에서 볼 수 있었던 “갑사로 가는 길”이라는 글이 문득 생각난다.

이상보. 「갑사로 가는 길(1972)」 -눈 내린 토요일 동학사에 들렀다가 갑사로 넘어가는 중 계명정사에서 보게 된 오누이탑. 남매탑에 어린 전설, 신라 선덕여왕 때 당승 상원대사가 움막을 치고 수도할 때 사람을 잡아먹고 고새하던 호랑이를 구해주고, 호랑이는 보은한답시고 경상도 상주 처자를 물어다 주고, 스님은 부부가 아닌 남매의 연을 맺었다는 이야기... 그러면서 그들은 어느새 갑사에 도착을 했다는 수필.


사실 우리는 수필에 나온 동선을 따라 가지는 않는다. 사찰의 자릿세가 만만치 않아 천정골 탐방소를 들머리로 잡는다.

코스 자체가 거칠지 않아 다들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다. 남매탑 전설 속의 호랭이가 이 추운날 장가를 가는지 해는 떠 있건만 눈송이가 햇빛에 부딪쳐 비늘처럼 반짝이며 땅으로 내려앉는다.


밤새 내린 눈이 고작 이것인지 땅위에 가죽처럼 깔려 있다. 게다가 녹았다 다시 얼어버린 표면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위장시켜 놓았다. 오르는 동안의 대부분은 아이젠을 발에 채울 정도는 아니지만 발을 딛을 때마다 무게 중심이 뒤꿈치를 지나 앞꿈치로 옮겨와 땅을 찰 때, 헛발질 하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난다.


갑사로 가는 길은 조금씩 선두와 후미의 간격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수월하게 큰배재까지 다다른다.




그놈의 아이젠Ⅱ

큰배재에 오르자 바람이 칼이다. 다들 배낭에서 재킷을 꺼내 입는다.

고개에서 쉴 타임이지만,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것 같아서 일행을 기다리는 것은 남매탑 앞에서 하기로 한다.


그렇게 큰배재에서 남매탑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는데, 우리보다 조금 앞서가던 일행이 칼바람에도 불구하고 길에 주저앉아 아이젠을 발에 채우는 것이다.

시큰둥하게 쳐다보고는 내 갈 길을 씩씩하게 간다. 음지라 그런지 길이 장난이 아니다. 삐끗 잘못하면 길 아래로 떨어질 것 같더군. 그래도 얼결에 선두를 맡은지라 고갯길 막바지로 치닫는데 이걸 어쩐다냐 중심이 기우뚱하더니 오른 쪽으로 휙~ 자빠지고 말았다.

바지를 털려고 손을 움직이는데 오른손이 움찔.

장갑을 꼈는데도 오른손 손목근처의 손바닥의 허물이 벗겨져 피가 난다.

IC~ 그놈의 아이젠 일찍 채울 것을 ㅠ..ㅠ


그놈의 아이젠 뭣이 귀하다고 안 채우고 걷다가 이러고만건지.


남매탑 앞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자니 제법 피가 나고 쓰라리더만. 지금은 며칠 지났다고 상처가 쪼그라들었다만 - 그래도 손바닥 껍질이 질기고 두꺼운데 그거이 벗겨질 정도니, 유도로 치면 한판 패를 당한 셈이다.




단체 사진을 찍고 대부분 먼저 길을 떠나고, 아이까지 동행한 나머지 일행이 아이젠도 없이 용감하게 오르고 있다는 비보에 나를 포함한 서너 명이 남는 아이젠을 모아 일행을 기다린다.

추위에 어쩔 수 없는가 보다. 발가락이 시려 통증이 올 정도로 추워지기 시작한다.

기다린 사람들과 달리 늦게 도착한 일행은 그 와중에도 거친 숨을 돌리고 가려고 배낭을 열어 전을 펼치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체온이 달아나기 전에 삼불봉으로 향한다. ▼가까이는 장군봉능선, 멀리는 갑하산부터 이어지는 우산봉



▼천황봉부터 쌍개봉을 거쳐, 관음봉~자연선능




천진보탑

시산제를 준비하러 일찍 내려가야 하는데, 먼저간 일행들 때문에 애둘러 삼불봉을 내려와 금잔디고개를 넘어서니 먼발치에 아군이 보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새 신흥암에 다다른다.

수정봉 아래 신흥암에 있는 천연의 바위탑 천진보탑(충남 문화재자료 제68호).

웬만한 사람들은 그냥 바위 덩어리로 생각하고 지나가건만 우리의 박 위원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관찰을 한다.

몇 달 사이에 거금을 들여서 천진보탑까지 지그재그로 데크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눈에 잘 띄였는지 모르겠다.

천진보탑은 천연의 바위탑으로 갑사 창건과 관련된 전설이 서린 곳이다. 게다가 인위적으로 조각을 하지 않은 탑 윗부분에 3층 석탑이 새겨져 있어 많은 불교신도들의 신앙과 기도의 대상으로 유명하다.

라는 말을 하자~ 녀석의 눈이 더욱 반짝반짝 빛난다.

아무래도 따로 시간을 내서 기도도량을 찾을 모양이다.


▼신흥암 전경, 신흥암 뒤로는 아찔하게 서 있는 수정봉



* 천진보탑과 수정봉, 문필봉 능선에 대한 글 ☞ http://yyh911.tistory.com/81



액땜

그럭저럭 걸어 대성암을 지나자 더 이상 ‘그 놈의 아이젠’이 필요 없을 콘크리트 포장길이 나타난다. 아이젠을 풀어 헤치며 시계를 쳐다보니 이제 11시다.

조금 더 걸어 시산제를 지낼 장소에 도착하니 이제 막 시산제 상을 차릴 태세다. 정신없이 달려가 일하는 척 하다 보니, 스마트폰 산행기록 어플의 정지버튼을 누르는 것도 깜박 했구나.

움직임이 제대로 기록될리가 만무하지… ㅉㅉ


이런 정신없는 녀석. 하루 종일 나사가 풀렸구나...


그래도~

나 빼고는 모두들 아무 탈 없이 산행 잘 마무리하고,

경건하게 시산제도 잘 마치고,

즐겁게 화합의 장을 가졌으니...






내가 대표로 액땜을 한 셈이다.

쓸 데 없이 돈 들어갈 일/ 산행하다 다칠 일/ 정신없어 이것저것 흘리고 다니는 일...

한꺼번에 액땜했으니 올 한 해 산행은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만이 남은 것이다.


이리 생각하니 맘도 편하고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