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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주한 마음 틈으로 '제주'를 우겨 넣으니 참을 수 없는 평온이 몰려왔다
  • 비로서 허락한 소백산 비로봉 푸른 하늘과 초록 풀밭에 그리움까지 숨겨놓고 말았다
산행 이야기

숨어 있던 계룡산의 모습_2013.05.04.

by 여.울.목 2014. 9. 3.

*버텨야 했는데

버틸 만큼 버텨보려고 했는데 1차에서 바로 무너졌다. 자리를 옮겨 맥주까지.

6, 입안은 텁텁하고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우선 휴대전화를 충전시켜야 한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집사람이 일어나 뭐가 이쁘다고 아침까지 차려주네.

갑사-수정봉-자연선릉-관음봉-문필봉-갑사(원점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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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독이 올랐다

휴일 이른 아침, 차와 사람들 대신 안개가 무겁게 가득 차 있다. 이 안개 때문에 산에라도 제대로 오를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이 된다. 갑사 주차장에 들어서 썰렁한 기운에 자켓을 여미고 차문을 여는데 입구 쪽에서 한 사내가 다가온다. 주차비를 내란다. ‘기가 막혀~’ 이 시간에 나와서 얼마나 번다고. “아저씨, 대체 몇 시부터 근무하시는 거예요?” “7시부터요.” 영수증에 찍힌 시간 79. 4천원을 던져주고 갑사로 갈 길을 다잡는다. 어허~ 그런데 이 인간들 돈독이 올랐나 갑사 매표소에도 사람이 나와 있다. 2천원.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겸연쩍은 미소를 짓는 아저씨...

이른 시간에 생각지도 않게 6천원을 뜯기고 나니 기분이 무지하게 나쁘다. 내 기필코 가까운 시간 내에 좀 더 부지런을 떨어 무료입장을 해보리라.

6천원이 자꾸 머릿속에서 어른거린다. 똥이라도 푸지게 싸고 가야 속이 풀릴 것 같은 묘한 기분, 그래서 그랬는지 숙취로 아랫배가 요동치니 신흥암 재래식 화장실에서 드디어 볼일을 본다. 술이 깨려는지 콜이 더 심하게 쿵쾅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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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의 숨겨진 모습, 수정암릉

푸지게 볼일 보고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지고 두통도 땀방울과 함께 몸 밖으로 도망쳐 나오는 것 같다. 신흥암 뒤편에 천진보탑이 소나무와 사이좋게 서 있다. 인위적 조각이 가해지지 않은 이 탑의 상부에는 3층 석탑이 조각되어 있으며, 많은 불교신도들의 기도의 대상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또 특별한 날에는 방광(放光)을 하는데 그 빛이 하늘을 꿰뚫는다는 전설이 서려있다네.


<천진보탑 | 보탑을 지켜주는 잘생긴 소나무>
가지말란 건지 가란 건지, 입산통제라는 소형 현수막이 이곳으로 가면 등산로가 있지요~’라며 길을 안내하는 것 같다. 가파르기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간혹 길을 잃어 너덜지대에서 능선을 바라보고 무작정 오르기도 하고, 오랜만의 산속에서의 방황이 즐겁다. 계룡산의 숨겨진 모습을 보니 미칠 정도로 기분이 좋다. 이 맛에 산을 찾는 거다. 다른 방향에서 보이는 삼불봉과 자연선릉, 관음봉, 연천봉... 맛이 다르다. 이미 5월인데 치맛자락은 분홍빛 꽃과 연두색으로 곱게 치장을 하고 있지만, 봉우리와 능선부근은 진달래만이 쓸쓸히 봄을 맞이하고 있구나. 15년 쯤 되었나? 동기 몇과 함께 아슬아슬한 바위를 뛰어다니던 토요일 오후가 생각난다. 천진보탑을 보느라 길을 달리 잡아 그곳은 비켜갔지만 노송 옆에서 그 암릉을 바라보자니 추억을 타고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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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봉 쪽에서 바라보는 풍경, 낯설기보다는 경이로왔다>  


*누가 그린 수묵담채화일까? 문필봉

수정봉 코스에서 좀 헤매다 보니 시간이 꽤 지체되어 점심 가족행사 시간이 좀 걱정되었지만, 자연선릉을 따라 따사로운 햇살을 머금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가니 생각보다 빨리 관음봉에 도착했다. 내 뒤를 제법 내 뒤를 잘 쫓아오던 두 청년이 구름이 가득 찬 신원사 방향을 바라보면서 다음엔 버스를 타고와 횡단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참 대견한 청년들일세~.’ 흐뭇한 맘에 그들에게 관음봉에서 바라보이는 이곳저곳을 설명해 준다. 갑자기 이 좋은 느낌을 주체할 수 없어 산꾼 친구에게 전화해서 감탄사를 전하고는 저녁 약속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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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선릉 | 갑사를 품은 계곡 | 수정봉 능선>
관음봉에서 연천봉까지는 문필봉의 산허리를 감아 돌아가는 탐방로다. 연천봉 쪽으로 보이는 세 개의 봉우리, 한 폭의 수묵담채화다. 그림이 나를 그리로 이끈다. 생긴 모습은 정겹지만 정식 등산로가 아니라 스틱은 필요 없는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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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필봉을 가려면 | 벼랑을 내려와 | 누군가 도을 닦았을 거 같은 터도 지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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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전에 연천봉에서 관음봉으로 이 길을 걸었는데 봉우리를 기어 오른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 있어 한걸음씩 걸을 때마다 다음엔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내가 강한 열정을 불어 넣어주는 이놈의 죽이는 풍경... 봉우리 사이에 집터 같은 흔적도 보인다. 지도엔 우물표시도 있는데 예전에 누군가 여기서 도를 닦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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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필봉에서 보는 풍경;    쌀개능선 | 관음봉과 그 뒤로 삼불봉

                                             녹음에 쌓인 갑사계곡 | 문필봉 돌탑 뒤로 연천봉>

*
연천봉 계곡

수정봉 코스를 지나면서 생각보다 시간은 많이 단축된다. 11시까지는 하산을 마치고 점심 약속장소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좀 여유가 생긴다. 갑사-연천봉코스는 주로 하산길로 잡는다. 메마른 계곡과 반복되는 돌계단이 어찌나 지루했던지... 이제 시간에 대한 사슬에서 자유로워지자 선입견으로 가려져있던 내 시선이 달라진다... 수수한 색을 품은 꽃이며 겨우내 품었던 눈이 삐죽삐죽 모여들어 맑은 계곡물이 초록 사이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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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아래쪽은 어제 내린 비로 분홍꽃잎이 맑은 물위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다. 올해 들어 참 더딘 것 같은 봄이지만, 이미 사람들 마음 깊은 곳까지 파고들고 말았다. 10시를 넘기자 봄을 타는 사람들이 제법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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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이 맑은 계곡물에서 노닌다>

*
본전 빼고 잔돈 두둑이 남은 산행

아침 일찍 시작한 산행, 잠시 6천원에 맘 상했다만 오늘 계룡산 좋아도 너~무 좋더라.

바쁜 시간? 이렇게 오전에 산행을 마치는 것도 괜찮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