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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주한 마음 틈으로 '제주'를 우겨 넣으니 참을 수 없는 평온이 몰려왔다
  • 비로서 허락한 소백산 비로봉 푸른 하늘과 초록 풀밭에 그리움까지 숨겨놓고 말았다
산행 이야기

공주 | 일락산-봉황산

by 여.울.목 2018. 2. 26.

공주 | 일락산-봉황산

4.2km 1:17



삽재에서 시작해서 수통골을 한 바퀴 돌려는 당초 마음은 이런저런 핑계 속에 묻혀가고... 

그냥 그렇게 게으름의 끝장을 보려다가 아들녀석의 손을 붙잡고 집을 나선다.


오늘 걸으려는 길은 서쪽의 공주 구도심을 두 겹으로 애워싼 나성과 같은 산 줄기 중 안쪽에 해당하는 길이다.

우금티에서 시작해서 일락산과 봉황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시어골이라는 골짜기 마을을 사이에 두고 두리봉으로 이어지는 공주대간길과 남쪽으로 가면서 점점 각도를 넓힌다. 대간길은 송장배미 근처인 지금의 경찰서 쪽으로, 봉황산 자락은 구도심으로 넘어가는 하고개로 내려와 한 줄기 4차선 도로에 각기 발을 담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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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벼운 산행의 들머리는 우금티다.

우금티는 견준산 기슭에 있는 고개로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격전을 벌인 곳이다.
공주를 중심으로 항일 전쟁을 하던 동학농민군은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다 결국 패하고, 동학농민전쟁은 끝나고 만다.

아래 사진은 동학군의 넋을 위해 1973년 세워진 위령탑이다.
어릴적 소풍을 와서는 왜 맨날 여기만 오는지 투덜거리기만 했던 전적지다. 패배의 역사라고 여겨져서 그런지 아님 내가 관심이 없어서 기억을 못하는지 계기 교육이 제대로 되지 못한 학창시절이었던 것 같다. 

우연히 듣게 된 - 노래를 찾는사람들 2집의 ♬이 산하에♬에 나온 "우금치"라는 노랫말을 듣고는
이 우금치가 내 사는 곳의 우금치인가?
늦게 나마 다시 바라보게 된 우금치다.

1994년 이르러 우금치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반봉건·반외세 기치를 걸고 마지막 항전을 이루어냈던 장소로, 한국 근대사의 한고비를 이루는 무대가 된 뜻깊은 장소인데 너무 초라하기만 하다.
위령탑이 금방이라도 무너질듯하더니 다행히도 공주시에서 보수공사를 한다고 한다.

언젠가 위령탑 비문 곳곳이 훼손된 것을 본 적이 있다.
1894년의 우금치전투 기념하기 위해 1973년 천도교 공주교구에서 세운 위령탑인데, 비에 붙여진 비문 중 '동학혁명'이 5.16과 유신으로 이어진다는 내용과 이곳에 잠든 넋을 달래기 위해 탑을 세운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누군가 그 곳을 뽀족한 것으로 긁어 낸 것이다.
공사를 하면서 그 비문의 내용을 그대로 입간판에 옮겨 놓았는데, 여기에도 여지없이 갈날을 들이댔다. ㅎ
잘은 모르지만, 동학혁명이 5.16과 유신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억지스러운 것 같다. 그것도 많이.

오늘 산행의 마무리는 그 때 전투로 무참히 죽임을 당한 농민군들의 시신이 방치되었다는 송장배미 쪽으로 이어져 마무리 된다.




우금티...

여길 지날 때마다 느끼는 것, 대나무로 만들어진 민초들의 조형물이 수년째 쓰러져 방치되어 있다.
일부러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려고 그러는지, ㅠㅠ
 좀 다시 일으켜 세웠으면 좋겠구나.



들머리, 그냥 사진으로 바라보기엔 그저 그런 경사인데 실제 참 가파르다.
다행히 그 가파름은 중간중간 숨쉴 틈을 준다.


산줄기의 꼭지점을 이은 능선을 따라 가는 길은 걸을만한 길이다.
능선까지는 닿는데 고생은 해야지만 ㅎ

능선길을 걷다보면 참 평온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좌우로는 가파르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충분히 공주라는 도시를 두겹으로 에워싼 나성의 역할을 할만하다.
그러니 전투가 숨통이 트이는 견준산기슭 고개에서 벌어진 것이지.

어느새 소나무를 몰아내고 자리잡은 참나무가 활엽을 내려놓고는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니,
산의 지형이 알몸처럼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우금치에서 한 20분이나 걸었을까?

두리봉으로 가는 길과 공주교대 뒷산 일락산으로 나누어지는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산줄기는 두 갈래로 나뉘어 금강 언저리까지 공주 시내를 감싼다.


일락산 정상에서 바라본 공주 도심

하늘의 점은 날아가던 새가 그대로 찍힌 것이다.
왼쪽 골짜기 동네가 시어골이고 시어골 아래로 공설운동장과 문예회관이 이어진다.
가운데 중계탑이 몇 개나 세워져 있는 산이 봉우리가 봉황산이다.
오른쪽이 공주 구도심이고,
구도심 바로 뒤로 공산성,
공산성 뒤로 금강이 흐르고
금강 너머가 신관동, 금흥동 신 시가지다.

이런 각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신기하다? 참 색다르다.

일락산 정상에는 아무런 표지가 없다.
그저 벤치와 운동기구 몇 개가 있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 말씀으로는,
일인들이 일락(日落) 해 떨어지는 서산의 뜻을 지들 나라 망국의 뜻이라며
한 때 산 이름을 바꿔버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 옛날 이야기는 잊어먹지도 않는다. ㅋ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봉황산까지는 이제 내리막 길이다.
내리막의 정점에서는 또 다른 각도에서 공주 구도심을 바라볼 수 있다.
일락산과 봉황산 중간의 가장 낮은 지점이지만,
지금도 차를 끌고 오르다보면 밀리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는 고갯길이다.
바로 시어골과 공주시내가 연결되는 고개다.


'말랭이샘' 마루나 봉우리라는 말의 사투리라고 한다.
사전에서는 마루는 제주의, 봉우리는 경북의 방언이라고 하는데...
그냥 우리 동네에서 쓰이는 말의 처소를 생각해보면,
'말랭이'가 동네가 두루 잘 보이는 곳을 말하는 것 같다.

고개를 넘어 또는 숲을 나와, 산허리를 돌아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

샘물은 아직도 잘 관리되어 사용하고 있다.
샘터에는 예전에 보았던 마중물 쓰던 펌프도 있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두런두런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정겨운 공간도 그대로다.

다른 한쪽에는 구도심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정자 한 칸도 마련되어 있더군.


말랭이까지 잘 따라오던,
아니 나를 잘 이끌던 녀석이 조금씩 체력방전 사태를 맞이하는지 뒤쳐지기 시작한다.
힘내라 울 아들!

말랭이가 있는 동네를 뒤로 하고 이제 봉황산으로 오른다.
봉황산은 말랭이 정도까지만 왔으면 거의 다 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단지 동네 뒷산이라도 산은 산이기에 가파름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동네 뒷산이라 그 가파름이 길지 않아서 다행일뿐이다.

어릴적,
내가 살던 중학동에 택지개발이 있었다.
만만한 야산을 불도저로 까 뭉개고 포크레인으로 긁어내어
얼마 동안 공터로 되어 있다가
얼마 동안은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다가
얼마 후에는 불란서식 스라브지붕을 한 양옥 집들이 빼곡하게 지어졌었지.

그 얼마 간의 시간 동안 너른 공터에서
불장난도 하고, 단풍나무를 잘라 칼싸움도 하고, 야구도 하고, 대나무를 쪼개 스키도 타고...

유난히도 기억에 남는 것이 보름날 언저리에 분유깡통에 못으로 구멍을 내고
철사로 긴 손잡이를 만들어 "개불여~ 쥐불여~"를 외치며 나무를 넣어 불을 붙여 깡통을 돌리던 놀이다.

지금 같으면 위험천만의 일인데
그땐 아이들 모두가 다 했다.
조금씩 잔꾀를 내어 플라스틱이나 비닐을 넣어 태우다 화상을 입기도 하고 ㅋㅋ

그 때 깡통을 돌리면, 반대편 봉황산에서도 깡통을 돌리더라~
힘차게 휙휙 돌리다 봉황산까지 힘차게 깡통을 던진다.

그니들도 우리 쪽으로 불깡통을 휙 던진다.

--- --- ---

그 봉황산이 그리워 가끔씩 이렇게 찾는 것이다.

그니들이 깡통을 돌리던 암벽구간을 찾아갔는데 긴 시간 동안에 이제 나무로 뒤덮히고 말았더군.
그리 그 공간을 찾으러 다니다 발견한 기도터,

누군가 얼마 전까지 기도를 했는지 정갈하게 정리가 되어 있더군.
한 쪽에 던져진 몽당 싸리비가 어찌나 재밌던지
빗자루 다 닳만큼 정성을 빌어온 분 소원성취하소서~


봉황산 정상~!

녀석이 배낭에서 물을 꺼내 단 숨에 비워버린다. 힘들지~

해발 148m의 봉황산(鳳凰山)
봉황동(鳳凰洞), 반죽동(班竹洞), 교동(校洞)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지명유래집』충청편에, 봉황산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봉조포란형(鳳鳥抱卵形)의 형국을 하고 있어 길지에 속한다네.
조선시대에는 충청감영(관찰사 집무하던
 선화당(宣化堂))의 주산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그 놈들의 신사(神社)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래서 그 분도 기도터를 열심히 닦으셨나보다. ㅎ

이제 그 기운이 다 한 건지 공주의 위상이 대전이나 세종의 위세에 눌려 자꾸 흐릿해지고 있다.
자꾸만 사람들이 메트로를 찾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런저런 시설을 집중시켜 더욱 더 블랙홀처럼 사람들을  빨아들인다.

봉황산을 내려서면서 반죽동이나 봉황동을 천천히 걸어 내려서다보면 군데군데 빈집들이 많이 보인다.

예전엔 사람들로 버글버글하던 이 동네가 너무나 정막하다.



하고개로 내려서는 길에 만난 단군성전이다.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니,1981년에 시민들이 봉황산에 단군성조신단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역 주민이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천제를 지낼 수 있는 신단을 세우려고 하자 공주향교가 부지를 제공하고 봉사단체가 지원하여 비로소 제천행사를 할 수 있는 신단을  마련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2001.10.03.준공)

공주 단군성전은 공주시민들의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금하여 건립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한다.

<STB상생방송 누리집에서 일부자료 발췌>

규모는 꽤 큰데 누가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지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지나면서 바라본 이 건물, 뭔 종교색체도 느껴지고도 하고. 아무튼 공주시민의 성금으로 지어진 것이고, 민족의 정기를 다시 세우고자 한 것이라니 잘 가꾸고 활용했으면 좋겠구나.
이 건물을 지으면서 단군을 숭배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생각해서 반대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 단군성전 맞은편에 교회건물이 있다. ㅎ

공주에 살면서 이곳을 지나기는 처음이라 가타부터 첨언을 하기 어려운 입장이다.
시간이 되면 조금 더 이런저런 이야기를 살펴봐야겠다는 생각~ 

오늘 산행이야기 여기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