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0
서울편2 유주학선 무주학불
2017/08/21
유홍준
㈜창비
지은이가 서울에 대한 이야기를 4권으로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먼저 두 권의 책을 냈는데, 다 읽고 나니 새삼 어떤 책을 먼저 읽을지 한참을 망설였던 기억이 난다.
9권의 시작이 종묘라는 좀 묵직하고 우울한 이미지라서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반면 10권은 내자 몇 번 다녀온 한양 도성에 관한 이야기라 그런지 적극적으로 파고 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은이는 머리말을 통해서 앞으로 세 번째 서울이야기는 인사동, 북촌 등 묵은 동네 이야기를, 네 번째에서는 한강과 북한산 이야기를 담으면서 풍납토성 등 서울이 학장되면서 편입된 지역의 이야기도 넣을 예정이라고 한다.
내 입장에서, 오로지 내 입장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객관적 시점에서 9권에서는 창덕궁과 후원, 10권에서는 한양도성과 덕수궁을 빼고는 나 같은 사람들 수준에서 그닥 필요치 않는 수준까지 자세하게 자료를 인용한다든지 길게 기술해서 지루함을 준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아무래도 책의 분량 같은 편집의 기술적인 면이 많이 스며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딱 내 수준이라는 생각에 창피스럽지만 뭐 어떠냐.
제1부 서울 한양도성
먼저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까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태조는 나라를 건국하자마자 수도 이전을 추진한다.
당초 남경(한양 인근)에 도읍을 정하려다 신하들이 올린 계룡산 신도읍 계획에 관심을 갖게 되어 계룡산 신도읍 공사를 실시한다. 하지만 하륜의 반대로 대신들이 다시 검토하여 보고한 바에 따르면 계룡산 도읍은 풍수가 아니라 도참설에 입각한 것으로, 결국 한 달 동안 진행되었던 공사가 중단되고 다시 한양으로 신도읍지를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상황을 볼 때 하륜이 당시 경기도지사 지위였고 정치적인 근간이 경기도라 반대한 것도 하나의 큰 요인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때 한양 신도읍에 대한 무학의 조언이 ‘도성을 쌓아 도읍으로서 격식을 갖추라’는 것으로 도성 축조의 근간이 되었다는 말씀.
어찌저찌하여 들어선 계획도시에 대한 저자의 표현 - 저자는 옛 지도를 보면서 느낀 점을 한 문단으로 서울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다.
짙은 녹색의 산줄기는 서울의 골격이 되고, 푸른 물줄기들은 도시의 살과 근육이 디고, 붉은색으로 나타낸 촘촘한 도로망은 실핏줄처럼 펴져 있어 마치 산천의 맥박이 뛰는 것만 같았다. 서울의 자랑은 이처럼 자연과 인공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는 탁월한 로케이션에 있다.
서울은 자연환경을 고려한 입지를 찾아내 신도읍을 조성한 아주 드문 예라고 한다.
서울의 입지적 강점은 현대사회로 들어서면서도 도시 팽창에 대하여 얼마든지 뻗어나갈 들판이 있어 여전히 서울이 수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이 로마나 아테네 같은 고도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
책과 다른 이야기... 행정수도 세종시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지은이 같은 분들의 이런 서울 예찬이나 한성백제부터의 역사성 등을 근간으로 한 정치‧문화‧경제‧교육 등 사회 전반의 기득권을 가진 서울이라는 권력은 세종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단지 부동산투자(투기)의 마지막 보루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18.627km
한양도성은 인왕산 자락의 자연 암반과 절벽을 성곽으로 삼아 평지는 토성, 산지는 석성으로 계획되었고, 축조 과정에서 공사실명제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공사는 농한기에만 실시되었고, 압록강 두만강 지역은 국방상 임무를 고려해 동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태조 5년(1396년) 1차 공사에 대부분 도성이 완공되었는데, 동대문 지역은 습지라 말뚝을 박고 돌을 채워 기초를 다져야 했기에 미완성이었다네. 습지라 오늘날까지 보수를 거듭하고 있다니...
세종 때(4년, 1422) 한양도성의 전면 보수를 한다. 이 때 비오면 무너져 내리는 토성을 석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한양도성이 전란에 아무런 역할을 못했다는 비판에 대해서 저자는 크게 두 가지로 원래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1. 한양도성은 전란을 대배한 성곽이 아니라,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위해 두른 울타리다. fortress가 아니라 city wall이다. 전쟁을 대비했다면 해자도 파고 겹겹의 방어시설을 구축했어야 했다. 비교적 견고한 바리케이드 정도라고 한다.
당시 전쟁에 대비한 방어체제는 산이 많다는 지형의 특성상 산성을 중심으로 했다. 평시 도성 안에 살다가 전시에 선성에서 전투태세를 갖춤. 명산에 산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 요충지가 되는 길목 야산에 쌓은 것이 우리나라 산성의 특징이라고 한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들어 간 것도 피난보다는 전투태세를 갖추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명을 하는데, 원칙론이 그랬다는 것이지...
2. 또한 통일신라 이래 중아집권체제가 견고해 내란의 위협의 거의 없었던 나라였기에 도성을 전쟁을 대비한 요세로까지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 끊임없는 전란으로 도성 자체가 국방상 요충지였다.
일본- 전국시대, 경제력을 갖춘 다이묘들 경쟁적으로 내란을 일으켜 성주들은 천수각을 중심으로 한 성채 필요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수도 한양 방어체제에 대한 각성
남한산성 수축, 강도성(강화도 산성) 방비 강화 – 여전히 일본의 침략에 대비, 중국 침입에 대비한 산성은... ㅠ ㅠ
병자호란
병자호란 후 삼전도맹약에 ‘조선은 앞으로 기존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성곽을 쌓지 않는다’는 조항 때문에 도성조차 정비를 못했다고 한다. 70년 후 숙종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양도성 정비, 북한산성 축성했다고 한다.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잇는 4km 탕춘대성을 한 해만에 축조했다.
한양도성은 근대의 물결 속에서 도시 팽창과 함께 허물어지기 시작 18.627km 중 10.5km만이 남았다가 유네스코 등재 위해 2016년 기준 70% 13.1km옛 모습 찾았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북악산 개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저런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꺼내 옥신각신한다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정말로 앞으로 노무현 대통령만큼 친 서민적인 대통령이 또 나올 수 있을까?
65쪽에 인용된 황지우의 시가 참 대단하다.
내가 맘에 드는 구절만 뽑아 보았다.
풍경 뻬레스트로이까-북악산 개방에 부쳐
...
하여 차출된 팔도 머슴애들의 사투리를
잘짜 맞춘 성곽이
산허리를 재봉틀질한 것 같은
역사의 긴 문장이 되고
그 쉼표마다 돌아서 내쉰 한숨이
이렇듯 위업이 되었음에랴, 하지만,
...
북대문 숙정문
사대문의격식을 갖추면서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평소에 굳게 닫아 두었다고 한다. 풍수에 따라 창의문과 숙정문을 지맥을 상하지 않기 위해 통행금지를 했다네. 가뭄이 심할 때 북쪽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은 닫아두었다고 한다. 풍수상 숙정문 지역 음기가 강한 곳이라 그리했다고 함.
한양도성에 대한 외국인들의 반응 - 최소한의 개입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어내는 미학
언제 날 따듯해지면 아침 일찍 나서서 하루 종일 순성놀이를 해보고 싶다.
제2부 자문밖
부암동‧신영동‧구기동‧평창동‧홍지동을 자문밖이라고 한다.(북소문 창의문의 별칭 자하문 밖의 줄임말)
이 동네들은 조선시대에 도성 중 외진 곳이었다가 관청과 세도가들의 별서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한 곳이라고 한다. 서울태생 지은이에게는 남다른 곳이라 그런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꽤 소상히 펼쳐놓았다.
창의문은 통행문이 아니라 사방팔방 방위에 맞춘 형식적인 문이라 처음엔 문루도 없었다고 한다. 풍수보다 북악산 북쪽 삼각산이 천연 방어벽 역할을 했기에 통행이 뜸해 다른 도성의 문 밖과는 다른 풍경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총융청 사령부와 종이 만드는 관청과, 왕실의 절이 들어서고, 자연경관도 뛰어나 세도가들의 별서가 자리 잡는다. 그 중 흥성대원군의 석파정 – 유주학선 무주학불,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는 뜻의 글귀로 낙관에 세긴 문장이다. 그런데 왜 부제로 이 문구를 선택했는지 모르겠다. 서민들과 거리가 먼 것 같아 그런지 맘에 와 닿지는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을 시절 찾았던 경호구역 안 백석동천과 그 일대 개방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제3부 덕수궁과 그 외연
사실 그리 많이 가 본 궁궐도 아닌데 친숙하다는 느낌이 박혀있다. 아마도 그 첫째 이유가 ‘덕수궁 돌담길’이라는 친숙한 단어 때문일 것이다. 또 서울시청과 근접해 있고, 아이와 함께 서울시립미술관을 몇 번 찾았기에 그런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선왕조 마지막에 등장한 궁궐이었다는 내용을 접하고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즐기러 찾았던 궁궐이 암울한 우리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었더군.
덕수궁의 이력은 이렇다.
태조가 사랑했던 신덕왕후 강씨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못내 아쉬워 도성 밖이 아닌 안에 정릉을 조성한다. 후에 태종이 시가지 확장에 따라 정릉 주변에 건축을 허가하자 왕실과 세도가들의 주택이 들어선다. 대표적인 것이 월산대군의 저택인데, 임진왜란 때 파난 갔던 선조가 돌아와 거쳐할 곳이 없자 이 곳에 머물게 되어 임금이 머물던 곳이라는 뜻의 ‘석어당’이 된다. 그래서 경운궁이 된다. 광해군은 창덕궁이 보수되었는데도 경운궁에 머물고 화려한 이궁을 짓다가 인조반정으로 물러난다. 그 후 고종이 아관파천한 후 경복궁으로 가지 않고 경운궁에서 집무를 보면서 대한제국을 연다. 그러면서 근대식 건물이 들어서고 궁궐도 확장하면서 법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되는 쓰라림을 겪게 된다. 을사늑약 후 고종은 쓸쓸하고 우울한 나날을 이 곳에서 보낸다. 폐위된 고종황제를 위해 순종황제가 ‘덕수’라고 궁의 이름을 지어준다. 도시의 팽창으로 그 규모가 축소되고 바뀐 도시의 형태에 따라 동문이 정문(대안문-대한문)으로 바뀌게 되는 등 지금까지 이르게 된다.
다시 덕수궁을 찾는다면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때는 미술관람이 아니라 지은이가 의도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살펴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제4부 동관왕묘
동관왕묘가 뭐야?
삼국지의 관우, 관우를 관왕, 그를 모신 사당을 관왕묘라고 한다. 동쪽에 있는... 그래서 동관왕묘다. 1601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동대문 밖에 건립한 것이 동관왕묘다.
북송 휘종이 금나라의 끊임없는 침입에 민심을 다잡고자(?) 결속하고자(?) 관우를 무안왕으로 봉하고 무신으로 모셔 관왕으로 불렸다. 14세기 소설 삼국지연의가 나오면서 대중적 인기를 얻어 더 신격화 되고 명나라 말기에는 관우를 황제로 격상했다. 중국의 한 족이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관우를 신격화 한 것.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조선에 사당을 설치하고 임진왜란 후로 명나라에서 사당을 짓도록 후원까지 하여 시작되었다. 숙종부터 영‧정조 대에는 신하들의 충절을 이끌어내고자 임금이 관우 사당에 방문했다. 그리고 고종 때 전성기를 맞아 1897년 나라에서 공인한 관왕묘만 10곳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왕조 말기, 유교가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신흥종교가 등장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동학, 증산교, 금강대도, 선음즐교 등이 의지할 데 잃은 민중을 대상으로 교세를 확장하던 시점에 관왕묘가 우후죽순으로 세워진 것이다.
시대 상황으로 정신적‧사회적 불안이 온갖 사교와 미신을 낳으면서 갖가지 믿거나 말거나 하는 별의별 얘기들이 생겨났다. 관왕묘는 고종의 폐위와 함께 날벼락을 맞아 훼철‧폐사‧불하 등의 수순을 거쳐 민간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갔다.
관왕묘가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전쟁하면 세우기 시작하여 반일감정 상징했기에 일제의 탄압이 더 심했다고 한다.
항왜, 반일감정을 상징한 것 외에 무엇이?
영조 등이 충절을 위해... 그것도 좀 약하다. 지은이는 중국사람들이 우리나라 관광객 유치를 위해 최치원이나 정몽주와 관련된 것을 정배한 이야기를 한다. 중국의 유커들이 관우에 대한 애착이 크다고 한다. 그래서 동관묘 주변의 침체된 도심에 활력을 줄 수 있는 프로젝트를 생각하고 있더군. 아무래도 서울시 홍보대사 같다. ㅋ
그리고 과하게 기술한 것 같다. 억지스레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느낌도 있고...
제5부 성균관
조선왕조는 지식인 관료사회였다. 엘리트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성균관을 세운 것으로 병역도 면제되는 등 많은 특권을 누렸다고 한다.
무명자 윤기라는 분이 33세(영조 49년, 1773)에 소과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이 되어 20년이 지나 정조16년(1792), 52세에 대과에 급제해서 성균관 전적이라는 종6품 관리로 관직을 시작해 순조 26년(1826) 86세로 세상을 마쳤다. 그가 남긴 성균관에서의 일상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유교가 종교인가 학문인가?
불교와 마찬가지로 유교의 성현을 모시고 예를 올리는 종교공간이 있는데 문묘라고 한다. 불교 사찰과 같이 문묘가 있고, 사찰에 대웅전이 있듯이 문묘엔 대성전이 있고, 사찰에 관음전‧지장전이 있어 보살을 모시듯 동무‧서무가 있어 역대 성현들을 모시고 있다.
그럼에도 종교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하여,
지은이는 1.죽음의 문제와 내세에 대한 인식이 없고 2.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설정이 없기 때문에 종교적 성격이 적다는 점에 대하여
1.유교 성현들은 모두 실존 인물이라는 점이 다를 뿐 1.성현을 붕배하고 철에 맞춰 2.종교적 예식을 거행하는 것은 불교 등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아마도 조선이 길고 길게 이어진 것도 학문이 종교화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성전에 배향된 명현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보니 내 수준에서 보더라도 기준이라는 것이 참으로 애매하다. 지은이도 문묘배향 동국 18현의 인물선정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평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때그때 역사적 평가에 결정되어 온 것으로... 인물 선정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별도의 문제로 두고 답사에 집중하자고 한다. ㅋ
어쨌든 율곡은 배향되었다가 다시 출향되어 결국 오르지 못했지만 율곡 이후 배향 인물은 모두 율곡학파의 노론계 학자였다고 한다.
천리마 꼬리를 잡고 가는 파리도 천리를 간다
공자, 안회
안회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공자라는 훌륭한 분을 만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배운 결과라는 뜻이다. 그래서 롤모델이 중요하다고.
그래 성현들의 말을 되새기고 하는 것... 내가 성인군자는 아니지만 천리마 꼬리를 잡고 가는 파리처럼 천리를 가는데 올바른 자세를 잃지 말자는 것이 아닐까? ㅎㅎㅎ
그냥 끝냈어도 조금 지루했어도 충분한 감동을 주는데, 그냥 끝내기 아쉬웠는지
문묘제례악이라는 지루한 이야기 끝에 나온 “문예부흥”
압축성장의 결과를 이제 문예부흥기로 승화시키자고 한다.
논리적인 전개와 결말은 서울 4번째 책에서나 마무리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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