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분주한 마음 틈으로 '제주'를 우겨 넣으니 참을 수 없는 평온이 몰려왔다
  • 비로서 허락한 소백산 비로봉 푸른 하늘과 초록 풀밭에 그리움까지 숨겨놓고 말았다
여행 이야기

추억이 담겨 있는 계룡산 갑사

by 여.울.목 2020. 7. 19.

오늘은 갑사를 가보련다.

계룡산 갑사라고 해야지 정확하겠지.
살고 있는 곳 근처의 명산이라 얼마나 자주 다녔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밥맛 떨어져 잘 오지 않으려는 곳이 갑사였다.
따박따박 받아가는 주차료 3천냥과 문화재관람료 3천냥 때문이다.

난 그냥 산에 가려는데, 갑사 구경을 하고픈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는데 매 번 3천냥을 가져간다.
대낮에 도둑맞은 기분? ㅎ

 

그런 계룡산 갑사로 산보를 간다.
2주 전 어정쩡하게 아이들과 배드민턴을 한다고 움직거리다 발목이 접혔다.
인대가 늘어나 지금까지 고생이다.
산행은 고사하고 산책조차 엄두도 못내다 주말이라고 조금 헐거워진 발목을 믿고 산보를 즐기러 나왔다.

 

갑사하면, 잘해야 초등 1년 쯤 될 때 비포장길 버스를 타고 온 기억 앞선다.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돌부리 박혀 있는 길을 따라 오른 기억이 난다.
해맑게 웃으며 먹다 남은 크래커 봉지를 자랑스레 집어들고 찍은 사진을 보면
'분명히 갑사는 맞는데 여기가 어디였더라?'

갑사 경내를 구석구석 둘러보고 싶은데,
산행에만 몰똘해 있다보니, 밖에 나와서도 여유를 즐기지 못했던 것이다.

 

40여년이 훌쩍 지나 그 흔적을 찾아보련다.
아픈 발목이 추억을 찾는 시간을 주었구나. 눈물난다.

 

 

갑사 주차장에서 바라본 삼불봉과 자연능선. 계룡산은 1967년 12울 31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행정 구역상 공주시, 계룡시, 대전광역시, 논산시 4곳에 걸쳐 있다. 동학사(724년), 갑사(420년), 신원사(651년) 3개의 천년 사찰이 있고 국보 2점과 보물 10점이 있다. 닭벼슬을 쓴 용의 형상과 같다고 계룡산(鷄龍山)이라 한다. 옛부터 풍수지리적으로 길지로 산태극 수태극 문양으로 펼쳐져 있다고 하여 매우 신성시 여겨졌다네.

 

 

주차장을 벗어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괴상한 나무 한 그루

매년 정월 초사흘날 '괴목대신제'라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갑사 창건과 역사를 같이 한 느티나무는 임진왜란 때 영규대사와 800여명의 승병들이 모여 작전을 세우기도 한 호국불교를 상징하는 신비로운 나무라고 한다.
지역 주민의 건강과 가정의 평안을 위한 염원을 담아 괴목제를 위해 2020년 3월 18일에 복원했다는 표지석이 있더군.

괴목과 괴목대신제와 관련한 이야기
300여 년 전 갑사의 장명등(長明燈)* 기름이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스님들이 몰래 장명등을 지키기 시작하였는데, 어느 날 밤 구척**거인 이 장명등 기름에 손을 대는 모습을 발견했다네.
놀란 스님들이 그를 따라가보니 정체는 괴목의 신이었다.
기름을 훔친 이유을 묻자, 사람들이 담뱃불로 나무의 뿌리에 상처를 내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기름을 가져가 발랐다고 한다.
다음날부터 스님들은 마을 사람들과 나무 주변을 잘 정리했다.
이후 장명등 기름은 없어지지 않았고 마을에 돌던 역병도 사라져,
스님과 마을 주민들은 괴목신에게 매년 정월 초사흘날 제사를 드리게 되어 오늘날까지 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장명등(長明燈): 분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운 네모진 등. 사찰이나 관가 등의 공공 건축물의 처마 끝에 달거나 마당에 기둥을 세워 불을 밝힐 수 있도록 장치한 등도 장명등이라 함
**구척(九尺): 1척의 단위는 30.3cm. 30cm9척 장신은 270cm이상의 장신으로 보면 됨

 

 

괴목 뒤로 보이는 흉물스런 관광호텔 건물. 언제나 말끔하게 해결될런지...
코로나19 때문에 황매화 축제도 치르지 못했다고
며칠 전까지 내린 비로 계곡 물줄기가 시원한 소리를 내고 있다.

 

 

매번 산행을 위해 사천왕문을 지나 갑사 경내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씽~ 지나쳤는데,
지친 발목 때문에 국립공원관리사무소 앞에서 자연체험로를 따라 갑사로 올라가기로 했다.

며칠 전까지 내린 비로 계곡은 생기 넘치는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다슬기를 잡고 신기해 하는 아이

 

계곡물에 잠시 손도 담그고 다슬기도 채집하고, 
징검다리를 건너다 그만... 발목을 틀어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인대 늘어난 녀석을 의식하는 바람에
계곡에 풍덩!
넘어지며 짚은 선 엄지손가락에 피멍이 들기 시작한다.

발목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ㅠㅠ 손톱 피멍이 번지면서 통증도 엄청나다,
하루 종일 엄지손가락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

아~ 악몽 같은 7월이다.

 

아~ 여기다.
시냇물 같은 계곡을 따라 오르다보니 사유지에 민박집이며 음식점이 보인다.
조금씩 예전 생각이 나기 시작한다.

 

 

다리를 건너 조금 가파른 길을 오르자
수풀 사이로 철탑이 보인다!

어릴적 그 탑이다.
20대 때에 찾았던 그 탑이다.

왜 거기에 있는거야?

예전에는 나무가 이리 무성하지 않아서 갑사 오가는 길에 보였던 철탑이,
이제는 맘 먹고 이 고즈넉한 길을 찾아 들어서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너무 자주오고, 잘 알고 있다는 건방진 생각 때문일 수도 있지.

 

 

 

공주 갑사 철당간

보물 256호, 통일신라, 높이 15m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 깃발)이라는 깃발을 달아 둔다.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고 하며, 장대를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대부분 절간의 흔적은 사라졌어도 주춧돌과 달리 당간지주는 돌로 우뚝선 모양으로 덩그러니 홀로 터를 지키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당간지주의 크기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통일신라 때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통일신라 초기 문무왕 20년(680)에 만들었다고 하나 양식으로는 통일신라 중기 것이라고 한다.
방향도 대적전이 아닌 수정봉 쪽인 대웅전을 향하고 있다고 하는데,
예전 대웅전 터가 대적전 건물 자리라는 점에서 미리 대웅전이 옮겨질 것을 예상했다는 것인가?
철탑은 원래 28개 마디 였는데 고종 30년(1893)에 벼락을 맞아 4개가 없어졌다고 한다.

 

 

 

 

당간지주를 지나 그늘에서 땀을 식히다보면,
지극히 정겨운 돌계단이 보인다.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보이는 기와지붕은 저 위에 갑사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 기분과는 다르게
계단을 올라서면 정갈한 분위기나가는 정원이 나온다.
갑사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전이다.

 

대적전

대적광정이라고도 한다. 대적광전이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삼신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그러나 여기는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상을 모셨다.

천장을 한 단 높여 닫집** 효과를 내고 있다.

갑사 대적전은 건립 시기가 갑사 대웅전이나 강당보다 늦지만 갑사의 가람 배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갑사 대적전의 터는 갑사가 처음 개창되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건물보다는 건물 터가 역사적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삼신불:석가모니, 아미타불,비로자나불

**닫집: 궁전 안의 옥좌 위난 법당 불좌 이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

 

대적전 앞에는 승탑이 있다!

바로 내가 크래커를 들고 흐뭇한 웃음을 지엇던 그 곳! 그 곳이다. 찾았다!!!!!!!!!!!

 

승탑

보물 267호

승려들의 유골을 안장한 묘탑. 팔각형 지붕으로 고려시대 대표적인 양식으로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신라 말기와 고려초 양식을 영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갑사 뒷사 중사자암에 있던 것이라고 하네.

 

갑사는 신라 통일 후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로 크게 번성햇는데
당시 절이 중심인 대웅전이 바로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주위에 남아 있는 화려한 주춧돌이 옛 건물의 흔적이란다.

불교를 억제하던 조선 때도 잘 유지되다 선조30년(1597)정유재란 때 왜군에게 약탈당하고 불탔다.
그 후 병자호란과 화재를 몇 번 더 겪으면서 가람배치에 변화가 생기며
대웅전 자리에 대적전이 들어섰다.

 

대적전은 늦어도 순조 26년(1826)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적전 앞 정원과 배롱나무,
주변을 둘러 싼 나무며
돌담 안에 숨어 있는 기와집... 포근한 느낌을 준다.

마음을 차분하게 다잡아주는 것 같다.

다른 블로거의 사진을 보니 봄과 가을의 대적전 풍경도 멋지더군.

어짜피 문화재 관람료 내고 지나는 길이면,

앞으로는 꼭 이 곳을 지나가야겠다.

 

정겨운 돌담길

 

 

 

예전 갑사 대웅전 터라서 그런지 정원이 주는 맛의 깊이가 다르다! 배롱나무 - 백일동안 진한 분홍빛을 자랑했던 네가 상상이 된다.

 

 

대적전을 지나 갑사로 향하는 길에 만난 스님들의 공부방.
예전에는 찻집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찾집에서 가족과 함께 이 신록만큼이나 푸른 녹차향을 즐겨보려 했더만 아쉽다.

 

공우탑(功牛塔) 세워진 때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암자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라 한다. 1층 탑신에 ‘누운 탑을 일으켜 세우니 사람들 방액에 우연히도 부합된다네. 세 번 씩이나 힘이 들었으니 그 공덕이 으뜸이라네’라고 새겨져 있다. 2층 탑신에 牛塔, 3층에 功이라고 새겨져 있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갑사 경내에 들어선다.

오늘은 문화재 관람료 3천냥 본전을 빼볼까나? ㅋ

 

근디 왠 행사가 진행중이네.
1년에 네 번한다는 행사라는데,
초콜릿 만들기, 목판 본뜨기, 서책 만들기, 즉석사진 촬영 서비스... 무료란다. ㅎ

 

아이가 한창 체험활동에 열중할 때 문화재 관람에 나선다.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종각

보물 478호
종각 옆에서 행사를 하고 있어서 이거이 무엇인지 안내판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집에 와서 알게된 사실,
사연도 많은 것이, 선조 16년에 여진족 니탕개가 2만 병력으로 침입했을 때 종을 녹여 무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랑캐가 쳐들어오니 삼도의 이것들을 모아 병장기를 만들었다.
갑사 같이 큰 절에 이것이 없음이 안타까워 철 8천근으로 새로 조성하였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후 조선 선조 17년(1584)에 이 종을 만들어졌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헌납이라는 명목으로 공출했다가 광복 후 다시 찾아 온 것이라고 한다.

깜깜한 누각에 갇혀있는 범종. 안내문도 없는데, 그래도 범종루에 있는 것보다 이게 오래된 것 같다.

 

 

갑사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에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
위덕왕 3년(556)애 혜명대사에 의해 크게 학장.
신라 헌안왕 3년(589) 의상대사가 중수하여 화엄종 10대 사찰로 번영.

현재 대적전 주변의 정교한 초석, 승탑, 철당간 등에서 당시의 면모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원래 절터는 여기가 아니라는 말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왜군들에 의해 사찰이 소실되었다
선조 37년(1604) 대웅전 중건을 시작 효종 5년(1654)에 크게 증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매번 갑사 앞을 지나다보면 특이하게 생긴 모양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건물, 갑사 강당.

강당은 승려들이 법문을 읽고 공부하던 건물이라고 한다. 현재는 사람들의 소원이 가득한 곳이다.
전통적으로 강당은 맨 뒤에 잇고 그 앞에 대웅전을 두는데,
갑사에는 강당이 대웅전 앞에 있다.
보수 당시 대들보 상량문을 발견했는데,
상량문 내용에 따르면, 이 건물은 원래 갑사의 정문이었다고 한다.
광해군 6년(1614)에 지어진 후 정조 22년(1798)과 고종 27년(1890)에 고쳤다네.

 

 

갑사 강당. 원래 갑사 정문이었다네. 안내판이 있는 저 밑으로 사람들이 오고갔을 것이다.
대웅전 석가모니를 모시는 공간으로, 원래 대웅전은 대적전 근처에 있었는데,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탔다. 6년 후 선조 37년(1604) 갑사 전체를 디시 지을 때 다시 세웠고, 그 후 병자호란 후 또 심하게 손상되어 효종 5년(1654)에 크게 고쳤다. 고종 12년(1845)에 24칸으로 늘렸지만 지금은 15칸만 남아 있다.
갑사 중사자암 터 3층 석탑
출입이 제한된 요채 안에 있어, 담장 밖에서나 바라봐야 했다.
대웅전 옆 모습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삼성각 칠성, 산신, 독성의 삼성을 모신 곳. 칠성은 불두칠성으로 별나라 주군으로 인간의 복과 수명을 담당, 독성은 인연의 이치를 홀로 깨닫고 성인이 되어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리는 존재. 산신은 우리 민족 고유의 산악신앙의 토속신으로 호랑이 함께 나타나는데 재물을 담당한다. 각각 도교와 불교, 토속신앙의 표현으로 불교 토착화 과정 여러 신앙이 협쳐진 형태라고 한다. 원래 각각의건물에 모시다 한곳에 모신 것이 특징이란다.

 

 

웬 화장실 건물이 이리 생뚱맞게 자리잡고 있나?

헐~ 이곳이 월인석보 목판을 보관하는 건물이란다.
겉은 한옥이지만, 사방이 꽉 막혀 안은 최신식 서고 형태로 운영 중이 것 같다.

 

월인석보목판
보물 582호
월인석보*를 새겨 책으로 내던 판각으로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판목을 보관하고 있다
.
세조 5(1459)에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월인석보를 편찬한 대장경
원래 57233장으로 24권인데 현재 2146매만 남아 있다고 한다.
계수나무에 돋을새김으로 새겼다.
우리나라 최초 한글불교대장경으로, 15세기 글자와 말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의미있는 자료다.
*석보는 석가모니불의 연보 - 그의 일대기 라는 뜻

 

 

갑사 경내를 휘 돌아 이제 다시 왔던 곳으로 내려가련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와 달리 사천왕문 쪽으로 향한다.

 

 

갑사 사적비 갑사가 세워진 가정과 이후의 역사를 기록한 비석. <공주 계룡산 갑사 사적비명> 효종 5년(1654) 충청도 관찰사 강백년이 갑사를 본래 모습으로 복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다. 앞에 네모난 구멍이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갑사 부도군

 

 

경내를 빠져나와

갑사 사적비와 부도군을 지나면 사천왕문이다.

 

이제 집으로 향한다.

40년을 거슬러 옛 추억을 더듬다 간다.
요놈의 발목아지와 엄지손가락의 통증이 오늘을 쉽게 잊지 않게 할 것 같다.

 

이렇게 천천히 걷는 것도 참 좋구나.
그냥 지나친 것들이 왜 이리도 많냐.

오늘 같으면 3천원 본전은 훌쩍 뛰어 넘은 날이다 ㅎ

 

그나저나 요놈의 발목 언제 제자리를 찾는다냐. ㅠㅠ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마나루  (1) 2020.08.12
공주 계룡산 신원사 - 천연'와불'을 접견하다  (0) 2020.08.08
공주 석장리 꽃단지  (0) 2020.05.05
공산성의 봄  (0) 2020.05.05
칠갑산 천장호 둘레길  (0) 2020.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