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힘을 키우는 고전 공부법
안상헌
북포스
2014/12/5
얼마 전 신문에서 본 내용이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한 도서와 관련된 단어가 ‘그리스’라고 한다. 디폴트 위기에 처한 지금의 그리스가 아니라 ‘그리스 로마신화’의 그리스이다. 사는 것에 대해서 “왜?”라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함이란다.
이 책의 저자 또한 그러한 면에서 고전에 대한 접근을 유도한다. 고전은 주로 세상과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색한다. 그래서 그런 과정을 통해서 고전이 삶의 만족도를 높여주고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생각, 창의성을 발효시킨다고 한다. 이것이 고전 공부의 목적이라고 들어가는 말에서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책을 통해서 배운 것을 어떻게 현실로 확장할 것인지, 내용과 이해 중심의 독서에서 벗어나 생각의 힘을 키울 수 있도록 키워드를 가지고 읽는 방법을 안내했다고 한다. 정말 궁금하지 않은가? 지식이 현실로 확장되고 그 과정에서 생각의 힘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니 말이다.
사실 작가님은 내가 지난해까지 근무했던 직장에 강의를 나오시는 분이다. 얼굴도 몇 번 뵌 적도 있는 분인데, 출장 간 사이에 방문하셔서 직원들에게 당신의 저서를 한 권씩 나눠주고 가셨다. 내 책상 위의 소중한 책 선물 「생각의 힘을 키우는 고전 공부법」, 솔직히 재미있는 주제의 책들도 있었음에도 부재중이라는 이유로 내게 배당된 책. ‘고전’이라는 말이 들어가 딱딱해 보이니 언제 이 책장을 열어볼 수 있을까 스스로 쓴 웃음을 지어보았다. 그리고 책꽂이에 반듯이 모셔놓기를 몇 주,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면서 이 책을 챙겼다. 통증이 심할 때 졸음이 가득한 무거운 책장을 펼치면 잠이 잘 올 것이라는 생각에서 ㅋ
책 속지 첫 장에 자필로 서명해주신 것을 생각하면 죄송할 따름이고, 나이롱 환자도 아니고 병원에서 책을 읽겠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인 일인지...
뚜껑을 열고나니 고전이라는 무게에 부담을 갖지 않고도 읽어갈 수 있었다.
이런저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 책장을 넘겨본다만 정답은 당신에게 있다는 답만을 알려 줄뿐이다. 하지만 그런 회피에 배신감을 느끼기보다는 당연히 그 말이 옳다는 생각이 앞선다.
생각이라는 것을 핵심 단어로 크게 4개로 주제를 잡아 엮었다.
1부/ 생각의 뿌리, 사람과 인생 공부
2부/ 생각 넓히기, 이야기를 읽는 방법
3부/ 생각의 원리, 핵심을 발견하는 방법
4부/ 생각 부수기,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법
작가의 의도를 이해한다면, 신화와 철학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을 굳이 네 개의 주제로 나누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책에서도 각각의 영역을 떠나 전적으로 이해를 돕는데 서로서로 인용되고 있다.
1부 생각의 뿌리, 사람과 인생 공부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책 읽는데 1부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인 것 같다.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 혹이심 수준을 넘어 대체 무슨 말로 답을 했는지 진지하게 접근한 것 같다.
저자의 책에 대한 소개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야기 속에 푹 빠져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세상은 부조리하고 사람들은 고통 받고 있는데 대체 이런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러시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한 소년이 실수로 권력자의 사냥개 다리를 다치게 했다. 그 이유로 권력자는 어린아이를 사냥개에 물려 죽게 한다. 소년과 그 가족들에게 세상은 온통 지옥이다.
게다가 책에 인용한 시 한 편을 읽고 나니 묘한 반감이 솟는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과연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고해성사
죄는 여러 곳에서
따로 따로 짓더니,
속죄는 한 곳에서
왜 한꺼번에 용서받으려 그래?
우리를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어 놓고
구름 속에 편안히 앉아서
땅을 내려다보는,
神이야말로 태초에
죄인이 아니던가?
_《이미 뜨거운 것들》, 최영미
질퍽질퍽하고 구질구질, 꼭 이래야만 하는지... 이런 이야기를 접하면 스스로 나는 누구고 어디에 와 있는지 질문하고 생각하게 한다고 한다. 물론 답이 없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 답이 쉽게 나오면 이 책을 쓰기라도 했겠어? ㅋ
먹고사는 문제 말고 사람 사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이런 과정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얻을 수 있지 않겠냐고 힌트를 준다.
구원
사랑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사랑을 하게 되면 그 확신을 갖게 된다는... 세상을 보는 내 마음과 눈을 바꾸지 않으면 기적은 불가능하며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한다. 사랑의 실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소로우의 불복종과 이야기 속의 조시마 장로의 사랑을 말하며 사랑의 모습이 다양하다고 말해준다. 소로우는 불합리한 세상에 불복종하고 저항해야 한다고 말하고, 후자는 그런 세상을 사랑하라고 한다. 방법이 다를 뿐 두 사람 모두 사랑과 애정으로 세상을 대한다는 점에서 같아 보인다고 한다. 진흙탕 같은 이 세상, 미워졌다가 좋아졌다가... 그 세상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것, 살아가라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는 오직 자신의 판단에 달려 있다네.
사람은 어떻게 악해지는가?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http://yyh911.tistory.com/admin/entry/post/?id=143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일인지 다시 생각해본다.
밥이 먼저냐, 자유가 먼저냐 | 《인간 불평등 기원론》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 1753년 프랑스 디종 아카데미가 현상 공모한 논문의 주제라고 한다. 이에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썼단다. 비참해지는 진정한 원칙이 인간의 진보 속에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글을 쓴 것이란다. 주제를 준 디종 아카데미도 그러하고 루소 또한 대단하다. 그 시절부터도 인간의 근본적인 것을 진지하게 연구했다니.
<루소가 생각한 불평등의 과정>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던 인간들이 모여 살면서 문제가 발생 → 서로의 감정을 의식하면서 불평등이 시작되고 복잡해짐 → 소유와 노동이 시작 → 안정된 장소를 얻으려다보니 그 곳을 중심으로 마을과 국가 형성 → 철을 다루며 농사를 짓고 토지의 분배와 소유 관념 → 자유와 재산, 생명 보호를 위해 공동체의 법률을 제정하고 관리자를 선출 → 부자들이 법과 경찰력을 강하게 요구, 빈자들은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부자들이 가진 재산을 공유할 권리 포기 → 이런 사회질서 형성으로 기존의 차별과 구분을 합법화하고 정당성 부여, 지배와 피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만듦
평생 개처럼 살아야 하는 문명인과 달리 평온한 굴종보다 파란만장한 자유를 택하는 야만인, 그리고 루소는 이러한 불평등은 명백하게 자연의 법칙에 위배된다고 한다.
물론 체제의 안정을 기반으로 하는 기구의 논문 공모이기에 루소의 논문은 채택되지 않았다고 한다. 작가가 묻는다. “이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선택은 무엇이어야 할까?”
뭘까?
무엇을 위해 사는가 | 《이반 일리치의 죽음》
자기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살아온 40대 중반의 법원 판사 이반 일리치가 죽음을 맞이하고 겪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다.
memento mori ‘죽음을 생각하라’. 다행히 판사는 죽음 직전에 그동안의 삶이 죽은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가족과 동료들에 대한 사랑을 회복한다. 죽음을 인정하면 현명해진다.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고,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따라 하려고 기를 쓴다. 그래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과 자신에게 행복을 자져다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뒤쫓는다고 한다. 작가는 죽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이익과 자존심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때 다른 사람도 서로 사랑하게 되고, 우리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진다고 설명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용기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고...
이 이야기는 책 전반을 통 털어 자주 나온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맘이 편안해지고 단단한 토대 위에 용기를 세울 수 있다는 것 같다. 용기.
2부 생각 넓히기, 이야기를 읽는 방법
비극을 만나면 용기가 생긴다 |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비극은 우리를 삶의 진실에 가깝게 해주는 것 같다고 한다. 고통과 죽음 앞에서 안락한 미래를 거부하는 찬란한 슬픔에서 용기를 얻고, 그러한 자기파멸에 대한 수용이 용기의 또 다른 원천이 된다고 한다. 고달픔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자고 한다. 아이히만과 달리 고통을 받아들이는 용기 말이다.
도대체 이야기란 무엇인가? | 《신화의 역사》
머나먼 구석기 시대부터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 인간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세계만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이 존재함을 인식했고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세계를 상상했다고 한다. 신화와 종교는 이런 상상의 산물이라고 한다.
신화, 신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타협을 시도했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인간 한계에 대한 긍정, 죽음에 대한 감정을 가다듬는 기능을 했다. 인간은 일상의 경험을 넘어 상상을 통한 자기극복과 환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다. 더 풍요롭게 살고, 더 인간답게 살고, 더 가치 있게 살기 위해 유효한 정보가 신화였다. 논리적인 사고가 강조되는 세상에서 비논리적이고 환상적이며 내면의 심연에 차분히 몰입해가는 놀라운 세상을 발견할 수 있기에 이윤기, 구본형 선생과 같이 통찰력 있는 작가들이 신화에 몰입한 이유가 아닐까 이야기하고 있다.
신화를 읽다보면 알게 된다. 세상은 그저 존재할 뿐인데 그 세상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해왔음을. <문득 「노자」의 ‘자연은 그저 그러할 뿐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분명 세상의 기본적인 이치는 어느 정도 통하는가보다.
신화는 윤리적, 정신적 측면인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시대에 따른 재해석으로 인간을 의미 있는 삶의 공간으로 안내해왔다고 한다.
짬을 내서 이윤기, 구본형 선생의 작품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와 신화의 비밀을 발견하다 | 《신화의 힘》
신화는 현대인들을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도록 안내한다. 신화는 상징이므로, 그 상징이 가진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핵심이다. 승천은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로 들어간 것이요. 재림 또한 다시 태어나기 보다는 자기 이상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일부 종교인들이 종교의 진리가 아닌 경전의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는 것은 ‘상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 생각의 체계에 맞게 이 조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이 조직의 배후에 작용하는 역사적인 힘은, 그 정도의 행동은 의미도 없을 만큼 거대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요? ...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 우리의 이상을 움켜 안고, 루크 스카이워크처럼, 조직이 가해오는 비인간적인 압제에 저항함으로써.”
그냥 읽기는 어려운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영혼을 흔드는 지식,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지금 읽는 것이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그냥 읽어나가는 것이 좋은 독서라고 한다. 누구나 쫓아야 하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안내해줄 책이나 작가를 만나는 것을 ‘천복’이라고 표현한다. 그런 영혼을 흔드는 경험은 아주 우연히 찾아오는데, 그 우연이라는 배경 속에서 진실의 눈으로 볼 때에만 우연히 찾아온 천복이 보인다고 한다.
이야기 속 인간의 상징을 읽다 | 《일리아스》
《일리아스》이야기를 통해서 신화가 상징하는 것에 대한 해석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당당한 영웅, 이 영웅들이 추구하는 것들과 파멸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 삶의 밑바닥에 흐르는 요소들을 드러내 보인다. 권력과 명예, 아름다움과 젊음, 열정과 지혜... 이러한 상징들을 통해서 나는 무엇을 쫓고 있는지 무엇을 쫓아야 하는지 고민해볼만하지 않느냐고 말을 던진다.
3부 생각의 원리, 핵심을 발견하는 방법
모른다는 것을 먼저 안다 |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질문을 던지는 과정
①이해자의 단계: 왜 그럴까? 무슨 의미일까? 적용될 수 있는 다른 경우는?
②비판자의 단계: 과연 옳을까? 사람이나 상황이 달라지면? 적용될 수 없는 경우는?
군주론- 인간의 본성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만, 대중을 짓밟아 뭉개버리는 군주의 행동이 올바르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③실행자의 단계: 나는 과연 이렇게 살고 있나? 내게 적용하려면... 어떤 곳에 적용 가능한가.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은?
책을 읽는 사람들이 가진 문제 중 대표적인 것이 실천의 문제다. 실천은 하지 않고 자꾸 더 깊이 일려고만 든다. 그러다 스스로 지쳐서 공부를 멈추고 실행까지도 잊어버린다.
공부는 실행을 최종 목적으로 한다. 진리는 실천을 포함한다.
저자가 말한다. “삶의 위기는 실천의 결여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이해가 간다.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뭐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없구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보라 | 《국가론》
이데아라는 말이 나오고,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사소한 문제가 축적되어서 발생한다. 그 이전의 일이나 전체적인 상황까지 생각하지 못한다. 여기서 ‘본질’을 어떻게 발견할까 하며 이야기를 이끈다.
플라톤은 이데아(객관적이고 불변하는 사물의 본질 → 순수한 이성을 인식되는 관념이나 이념)를 찾는 사람을 철학자라고 한다. 플라톤 말처럼 모든 학문을 통달할 필요는 없을 것이요 우리 시대에 맞게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글쓴이는 니체의 우상의 황혼을 인용해서 깊고 사색적인 주의력과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면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다. 내용을 알기 위해 급하게 일어내려 가거나 사건의 배경은 제쳐두고 결과만 알려는 방식이 아닌... 문장이 말하는 것을 느끼고, 문장의 의미가 가리키는 곳에 빠져들며, 태고의 근원을 맛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하나의 개념을 알았다면 이데아라는 개념을 생활 현장에 적용해 무엇이 현상이고 본질인지 구분해보는 연습 말이다.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이 사건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데아를 적용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란다.
알게 된 것을 자기 일상과 현실에 적용 → 확실하게 이해 → 생각하는 힘이 커진다.
자기중심적 사고(우상)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필수
생각하는 힘을 키우고 본질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란다.
영화 <설국열차>, 동굴 밖의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는 방법밖에 없단다.
공부는 맥락을 잡는 것 |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원리를 알고 공부해야 한다고 하는데, 자신이 발견한 원리를 통해 이론을 전개한 대표적인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한다. 모든 사물은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본성(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는 본성(정치학)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생각하는 능력 - 이성을 가진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 달리 살아서의 행복을 중시했고, 현실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행복 추구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중용’이라고 한다.
함께 어울려 행복을 추구하려는 본성으로 가족, 마을, 국가가 형성된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국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국가 체제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네. 동물도 어느 정도 무리를 지어 생활하므로 사회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동물과 달리 언어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조율하고 타협하는 이성적인 과정이 인간의 행복 추구과정으로 보고 있으므로 ‘사회적’이라는 말보다는 ‘정치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말한다. 함께 어울리는 행복... 참여의 시작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울리다보면 갈등은 자연스럽게 생기기 마련이다. 그 것이 두려워 참여하지 않는다면 인간다운 즐거움을 경험할 기회 역시 사라진다고 한다. 그러다 결국 자기 안에 갇히게 된다. 소외 - 내가 내 안에 갇혔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뭐 잘은 모르겠다만,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을 통해서 원리에 따라 글을 쓰고 생각을 전개하는 연습을 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예전에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다 포기한 적이 있다. 뚜렷하게 원리를 찾기는 힘들었는데... 내가 너무 무식한건가? ㅋ
저자도 그런 내 심정을 조금은 아는지, 그가 생각한 다양하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이해하며 넘어가야 하는데 쉽지 않기에 이런 방안을 제시한다. 전체적인 큰 맥락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맥락에 따라 텍스트를 읽어나가면 된다. 이런 경우 꼼꼼하게 읽기보다는 빨리 읽고 대강의 뜻을 파악하는 방법이 덕 효율적일 수 있다.(p.175) 자세한 공부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익숙해진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철학자나 시대의 핵심과 흐름이라는 맥락을 알고 있는 경우 공부가 훨씬 수월해진단다. 왕권과 신권이 갈등하고 타협하는 과정이 있다는 맥락을 알고 조선왕조실록을 읽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큰 차이가 있단다.
맥락을 안다는 말은 원리와 그 원리가 흘러가는 과정을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설명의 힘>에서 ‘맥락’은 ‘왜?’라는 핵심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의 맥락은 어떤 일이나 사물이 서로 연관되어 이루는 줄거리라고 한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배경이나 왜 일어났는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등의 흐름
좀 쉽게 이야기해볼까? 나만 읽기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네. 다들 힘들어 한다. 저자도 그랬나보다. 그래서 고리타분한 책에 대해서 ‘맥락’을 잡고 읽어 내려가는 방법을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 같다.
생각하는 하루를 산다 | 《명상록》
철학으로 다스리는 로마의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대한 이야기다.
책을 읽고 좋은 내용을 기록해두었다가 다시 꺼내보는 활동을 예로 든다. 생각이나 사상이라는 것은 이런 기록과 성찰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지 귀뜸 해준다.
<memento mori> 우리가 언젠가 죽을 존재임을 기억하는 것은 삶의 짐을 푸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스토아 철학자답게 자연과 죽음에 대한 통찰이 담긴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다고 한다.
변화 없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삶이란 변화 그 자체라고 한다. 그 원리를 알게 된다면 죽음과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도와준다고 한다.
자연에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은 당연히 일어나는 것이며, 나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해서 그것을 이겨내고 견뎌야 한다. 이것이 이성이며 자연의 섭리다. 여기서 다시 <노자>의 여러 텍스트가 떠오른다. 그저 그러할 뿐이다....
그리고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한다. 신문기사나 책을 읽으면서 의도적으로 나를 제외하는 연습을 해서 나의 시선으로 보고 나의 생각으로 판단해서 왜곡하는 어리석음을 줄여보자고 한다. 현명한 사람은 나를 넘어서 보고 듣고 느낀다.
철학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면 내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알 수 없고, 일상의 방향을 통제할 수 없다고 한다. 통제력을 잃은 일상 → 불만과 스트레스 양산.
철학자인 황제는 생각하는 것이 습관에 의한 것이라고 믿고 의도적으로 좋은 생각을 키워나갔다. 고전을 읽는 이유는 생생한 삶의 정신과 치열한 고뇌의 현장을 느끼고 공감하기 위해서다. <명상록>은 이런 고뇌에 찬 철인 황제의 생생한 삶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재료라고 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개똥철학이나 깡통철학과 같은 것은 한 때 처세의 방편일 뿐. 삶의 안정감과 지향성을 얻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고, 그래서 생각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
자기 삶의 원칙을 가져라. <역사는 반복 → 반복되는 인간의 욕망추구 과정> 예전의 삶과 지금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예전 사람의 삶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삶의 원리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삶에는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기에 주어진 시간이 소중하다.
자기 생각을 만드는 공부 | 《희망의 인문학》
왜 가난하게 사는지...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자리 제공 정책의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날그날 생계를 유지할 일거리를 주는 것보다 도덕적 좌절,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결여와 억압 장치를 풀어주는 것. 더 많은 기회보다 더 나은 세계관이 필요하다고 한다. 삶에 대한 규율과 책임감을 회복하고 정치적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희망이 되는 것이 인문학이다.
정신적 삶 → 인문학 → 의견을 제시하고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적 삶을 가능케 하는 원천
정치: 사람들 사이의 견해차나 이해관계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
우리 사회는 추락의 가능성을 늘 내포하고 있다. 경제적, 사회적으로의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압력에 시달린다. 정신적 피로의 증가, 삶의 중요한 여유를 빼앗아 간다.
인문학, 독서 토론... 등을 통해서 소외를 극복할 수 있고 소통을 통한 성장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인문학은 본질상 비판적이다. 역대 권력자들이 우민정책을 쓸 수밖에 없던 이유도 이와 간련 있다고 한다.
정치에 참여한다는 의미가 신문을 보고 시국을 논하거나 정당에 가입하자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자신의 폴리스를 발견하고 참여해서 역할을 맡고 책임 있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며, 이 과정을 통해서 보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정치적 삶이라고 할 것이다. (p. 201) ⇒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맞댄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4부 생각 부수기,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법
익숙한 생각에 대한 저항 | 《시민의 불복종》
국가의 부정당한 행위에 저항하기 위해 세금을 거부해서 감옥에 간 소로우, 비록 하룻밤이지만 비폭력 저항으로 간디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한나 아렌트는 크고 중요한 문제는 무시하고 자기 앞의 작은 이익에만 골몰하는 보통사람들을 대중(mass)라고 한다. 한나 아렌트의 대중의 문제를 <시민의 불복종>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 vs 소로우: 소로우에 비한다면 소크라테는 법에 복종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인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불합리함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합법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저항을 거부한 아이히만과 달리.
외우는 공부에서 느끼는 공부로 | 《소유냐 존재냐》
생존을 위한 공부, 실존을 위한 공부 <소유냐 존재냐>에서 두 존재 방식을 분석한다.
비판과 저항이 단지 불평과 불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방향성이나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국가나 공동체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이게 무슨 국가냐!”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어떠해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 불복종과 저항도 방향과 대안이 있을 때 힘을 받는다. 말하기 전에 생각을 좀 해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시험을 위한 소유 중심의 공부 → 지식에의 의존성 문제: 다른 지식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로 나타날 수 있어, 아는 것에 반하는 내용을 만나면 부정적 태도를 취하고 거부한다. 광신도에 비유. <소유냐 존재냐>에서 생각의 집착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을 시작하는 방법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1.적게 읽고 천천히 읽어야 한다. 2.소유 지향 사회구조 개선
소유를 포기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존재 지향적 공부 - 능동적 지식, 자기가 하는 일에 생명을 불어 넣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한다. 이를 능동성이라고 부른다. 머무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것이고, 가지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것이다. <노자> 빔[虛]의 철학이 생각난다.
큰 생각으로 뛰어넘기 | 《장자》
간만에 동양의 철악이 나온다. 엉뚱할 것 같기도 한 장자의 생각.
생각의 폭을 넓혀주고 스스로 판단하게 해준다.
카오스(혼돈)는 코스모스(질서)의 조건이다. 코스모스는 카오스로 이어진다. 둘은 서로 의존한다.
장자는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이것저것 구분하고 경계 짓는 생각의 틀 – 장자는 이런 경계 짓는 공부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이란다. 이 눈을 깨는 공부가 장자가 추구하는 앎. ‘큰 생각’이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면 보이는 것도 다르다 | 《돈키호테》
<돈키호테>라는 책을 통해서 자기계발서와 같은 지식 위주의 책이 주는 단순 명확한 단어에서 벗어나 문학작품과 철학이 주는 의미와 상징을 알아가는 재미를 느껴보자고 한다.
내가 믿는 것이 우상이다 | 《우상의 황혼》
‘철학을 하는 것은 망치를 드는 것’이라는 소제목이 눈에 띤다. 지금까지의 의미심장한 말들을 가슴 깊이 새겨보려 노력한 무딘 자에게 니체는 망치를 들어 깨어 부숴버린다. ㅠ
우리가 옳다고 믿고 있는 생각, 믿음, 가치관, 신념, 도덕 → 우상, 그 우상을 황혼으로 보내는 작업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다. 전혀 새로운 관점이다.
망치로 깨면 상처를 입는다. 상처의 충격이 가시고 생채기가 생길 때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며 나만의 생각들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니체는 삶의 중심으로 들어가기를 원했고 그러자면 우상을 깨부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니체에게 이성은 하나의 폭군일 뿐이란다. 참 어려운 이야기다.
정리: 저자는 망치는 두 가지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1.어느새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아버린 ‘고전은 어렵다’는 선입관을 부수는 것, 2.현자들의 생각, 사람들이 절대 진리라고 믿는 생각을 모루 위에 올리는 것. 강철이 두드리면 강해지듯이 생각도 공부를 통해 커져갈 것이라고...
10여 편의 멋진 서평을 읽은 것 같다.
아무리 책을 펴내기 위한 작업일지라도, 책은 이렇게 읽어야 하는 구나. 부끄러운 생각이 스친다.
읽으면서, 내용을 요약하면서 뭔가 본질에 가까운 이야기는 주장하는 사람들의 관점이 다르더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노자의 텍스트 여러 부분 그대로 저자의 책에 붙여놓아도 될 만하다.
나 말고도 아니, 오히려 나보다 더, 인간이 살아오는 그 역사 속에서 비슷한 것들을 고민해왔구나. 그래서 위안이 된다. 그래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난 행복한지도 모른다.
변화를 인정하고 외롭고 고독하고 치열한 싸움으로 얻어낸 산물을 난 그저 눈 깜박임 하나로 모든 것을 다 진지하게 생각해본 것처럼 우울해 한 것이 알고 보니 우쭐해 한 것이었다.
변화
새로운 변화 앞에 섰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변화를 원하면서 변화가 가져오는 불편함과 같은 그 이면에 대해서는 겁을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변화를 누가 그냥 주는 것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옳은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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