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 위의 역사
2016.01.06.
이덕일
도서출판 인문서원
이덕일 선생이 쓴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조선왕 독살사건1,2」을 에서 새로운 관점에서 발전적인 시각으로 부당한 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보면서 언젠가부터 그의 책은 믿고 살 수 있는 것이 된 것 같다.
출간한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책을 구매를 했지만 워낙 밀린 책들이 많다보니 늑장을 피다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조선시대 이후의 역사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얼마 전에 군대 매점에서 추천도서로 취급받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는 문제의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의 부제목 ‘역사학자, 조선을 읽고 대한민국을 말하다’에서 알 수 있듯이,
새로운 사실을 밝혀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라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주제에 맞추어 토막 내어 실은 것인데, 그 이야기마다 친절하게 우리 현대사 -그것도 지금과 바로 전 정권에서 벌어진 일들-에 빗대어 해설을 해 놓은 것이 여기저기에서 이목을 받는 이유가 된 것이다.
주로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자의 부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1. 재위 44년, 망국의 황제 | 고종의 최후와 무한 권력 독점의 폐해
자신은 웅대한 지략과 불세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며 세상일에 분주했던 결과 500년 사직이 망하고 말았다.
-시대 흐름에 역행: 세상의 변화를 거부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시대착오적 전제군주를 꿈꾸다
입헌군주제든 입헌공화제든 ‘헌정’자체를 거부했기에 외세를 갈아타는 행위를 함
*강화도조약(1876) 치외법권 인정하는 불평등 조약 체결로 첫 단추를 꿰다, 이미 일본과 국교가 수립되어 있어 새 조약의 체결이 필요 없었음
-인재 발탁에 실패: 더군다나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을 승진시키다
☞병역면제,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등이 기본 스펙인 인사 난맥을 질타
2. 임진왜란 때 왜군 절반이 조선 백성이었다? | 류성룡의 개혁과 병역 면제
임진왜란, 선조의 피란 최종 목적지는 요동(만주)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의 제후 대접을 받으며 살겠다.
-일본군의 절반이 조선백성
·조선의 병역제도: 양반 사대부들 군포 대상에서 제외/ 황구첨정, 백공징포 횡행, 병역 연좌제 / 병역세 때문에 도망가는 백성 > 일본 침범 형조와 장예원을 불태우고 일본군에 대거 가담
·조세제도: 가난하든 부유하든 같은 액수를 내던 공납
-류성룡의 개혁
·속오군 조직(양반+양인), 양반, 노비도 유급 조건으로 함께 근무
·공납, 간접세→작미법, 직접세 –부자증세
·서자와 노비 발탁
→ 민심이 다시 돌아서 전쟁이 승리할 기미가 보임 → 양반 사대부 류성룡 낙마시킴 →정묘호란가 병자호란 때 배신당한 백성은 움직이지 않음
☞소득불균형이 심한 국가 대한민국
3. 노비들의 분노, “양반들이나 나가 싸워라” | 노비와 비정규직을 생각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양반 숫자가 늘었어도 10%를 넘지 못함, 후기로 갈수록 양인의 숫자는 54.6%로 별로 변화가 없었지만 노비는 10%정도 줄어 계속 양반숫자 늘어남
1984 갑오개혁으로 반상제도 폐지까지 지속적으로 늘어 오늘날 양반의 후예라는 허위허식을 갖게 하는 큰 요인이 됨
-태종 종모법→종부법으로 바꿈: 군역과 세금의 대상자가 계속 늘어 나라가 부유해질 수 있음
-세종 다시 종모법으로 환원: 개악, 신분제의 온갖 불이익, 평시에는 도망, 전시에는 적국에 가담하는 사회의 화약고/ 임진왜란 때 형조와 장예원 -노비문서와 관련 소송을 관장하던 부서로 백성들이 난입해서 불태워버림
☞조선이 크게 저항도 못하고 망한 근본적 이유는 ‘내 나라’라는 귀속감을 주지 못함이 큰 원인
4. 고종의 아버지는 왜 쫓겨났는가 |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외교 정책의 방향성
삼정의 문란(전정, 군정, 한정) 개혁하려 함 But 성리학적 질서 회복 ‘복고’를 목표로 삼음
시대적 변화를 읽지 못하고 왕권강화와 성리학적 질서 회복이라는 봉건적 틀 속에서 접근
-대원군이 자주적 개국을 했다면, 서구 열강과 평등한 조약을 맺은 최초 동아시아 국가
-호포제와 서원철폐로 사대부의 지지×, 경복궁 중건, 환곡제 부활 등으로 상민지지 상실
☞퇴행적인 개혁이 성공했던 적은 없다! 개혁의 방향성이 중요한 이유
5. 이 무기는 동포의 피와 땀이다 | 독립군의 무기 전쟁과 방산 비리
군수물자 확보마다 아슬아슬하고 고달팠던 독립군
☞우리 사회 여러 문제는 그 뿌리를 캐보면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군이 독립군의 정신을 계승했다면... 일본군의 폐습이 남아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6. 이유 있는 삼전도 굴욕 | 병자호란 자초한 인조 정권과 국제 정세
임란 후 선조는 명나라에 대해 再造之恩 표현→ 명나라는 자국의 전장화를 피하기위한 것이었음에도, 도망친 자신의 행위 합리화하기 위해 류성룡, 이순신과 백성들이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명나라 덕분이라는 것
-지는 해 명, 뜨는 해 청 사이에서 광해군의 실리외교 → 숭명을 기치로 한 사대주의자들의 쿠데타 → 인조의 길을 걷게 됨
☞사드 배치와 관련, 이념이 아니라 국익이 잣대가 되어야 한다.
7. 속 좁은 정치의 말로 | 광해군과 불통
정적을 포용한 당태종, 태종·세종 황희 중용
-광해군 대북외 남인, 서인 중용 → 대동법 경기도 시범실시, 허준의 동의보감, 양전사업 추진
-But 인목대비 폐모 (소모적)이념논쟁 → 대북만 등용 → 서인의 인조반정
☞상대방에 대한 포용은 손해가 아니라 큰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간단한 사실
8. 사생활은 없었다 | 왕의 시간과 대통령의 시간
9. 류성룡 내쫓은 양반들, 병역 면제 성역 되다 | 균역법과 병역 면제
노비제도는 조선 발전을 가로막은 가장 큰 주범/ 조선은 토지문제 해결을 완조 개창의 명분으로 삼았으나 노비 문제 해결에는 소극적이었다.
-태종: 과전법 이후 23년 만에 종부법 시행으로 조선 개창의 당위성 완성
-세종: 사대부들의 줄기찬 요구에 종모법으로 환원함
→종부법 유지했다면... 세금을 내는 양인 지속적 증가로 강한나라, 강한 사회가 되었을 것임
또 하나의 사회 불안요소/ 악법 ‘군적수포제’
- 개병제(양반, 상민) 출발 → 세조 계유정난 양반지지 위해 양반 병역의무 벗어나는 것 용인 → 방군수포 음성적 실시 → 중종 방군수포제 입법/ 양방 사대부 군포 납부 대상에서 면제
-류성룡 속오법→ 양반 사대부 전란 끝남과 동시에 류성룡 파직/ 숙종 청남 영수 윤휴 호포제→ 서인정권 윤휴 사형
☞김영란 법, 만든 당사자?/ 각종 카르텔을 해체하는 새로운 법 제정
10. 쿠데타 정권, 살육이 판치는 세상 | 인조반정과 공포정치
선조가 도주한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대부분 북인: 정인홍, 곽재우, 기면, 조종도, 이노 등 → 선명성과 실천성으로 인진왜란 때 정권 장악
소북- 선조의 뜻 좇는 인물(2살짜리 영창대군을 후사로...), 대북- 광해군지지 정인홍 등
-광해군 연립정권: 주요업적이 이 때 집중, 그러나 전란 극복과 관련 없는 이념문제(오현문묘종사)로 북인과 남인을 갈라서게 함
-이후 영창대군 유배와 죽임, 인목대비 서궁 유폐→ 서인 세력 유배
→ 숭명사대, 폐비 기도로 인조 반정: 다른 당파와 백성의 지지를 못 받음/ 숭명사대와 폐를 구실 삼아 정권 탈취한 서인의 대북에 대한 무자비한 정치보복
☞사대주의와 다른 정당에 대한 가혹한 공격과 탄압
11. ‘세’가 날아든다, 온갖 ‘잡세’가 날아든다 | 군적수포제와 담뱃값 인상
☞지난 정부의 법인세 감세와 관련, 증세여력이 있는 부분은 기업의 법인세와 부자에 대한 직접세인 재산세, 고액 연봉의 직장인이라며...
12. 을사오적은 모두 노론이었다 | 사대주의의 긴 역사
정조의 3대 개혁정치
1.노론 일당 독재를 다당제로 전환 2.성리학 유일사항에서 양명학과 천주학까지 다원화 3.서자도 벼슬길에 진출시켜 신분제 완화
-정조 독살설과 함께 노론 정권 일당 독재→ 세도 정치로 퇴행→ 삼남 농민항쟁→ 진압 명분으로 외세 끌어들임 →일본군 파병으로 이어짐 |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 노론이었다.
☞정치공작으로 다른 당을 절멸시킨 후 논론 일당 독재가 결국 나라까지 팔아먹는 극단으로 치달음
13. 외교독립이냐, 무장투쟁이냐 | 상해 임시정부 노선 차이와 자주적 외교
공화주의
1.외교독립론: 우호적 외세 힘에 의존/ 이승만, 정한경- 조국을 미국 위임 통치하에 넣겠다.
미국은 1905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국점령 비밀리 인정, 영이동맹... 이런 미국과 일본이 한국을 독립시켜줄 것이라는 오판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애국 후원금을 상해 임정에 보내지 않고 자신이 착복하려하기 위함
2.무장투쟁론
이상룡 안창호에게 ①외교 ②내정 ③재정 ④군사의 순서를 ①군사 ②재정으로 풀면 외교와 내정은 저절로...
☞사대주의를 버리고, 대한민국을 주인으로 놓는 자주적 시각으로 외교문제를 다뤄야
14. 혁명 공신 처남 4명을 사형시키다 | 태종과 친인척 비리
태종, 법 위의 존재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 공신과 백성 이익 출돌 때 백성의 편
☞친인척 문제
15. 양녕대군,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다 | 태종과 비선 라인
16. 사관 학살한 ‘무오사화’로 연산군 몰락 | 연산군과 언론 길들이기
-사기를 쓴 사마천: 역사 기술은 사관의 몫이라는 상식을 가진 한 무제
-조선왕조실록: 명사나 청사고가 극도로 편집된 역사서/ 조선왕조실록은 생생한 목소리가 그대로 현장중계처럼 전해지는 역사서로 국왕도 보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
17. 목숨 걸고 그릇된 지배구조와 싸우다 | 조광조의 사약과 몸 사리는 야당
동상이몽: 중종- 왕권강화, 조광조- 성리학적 사회의 수립이 목적
조광조는 현실에서는 패배자의 길이었지만, 그 길이 정당하면 역사에서 승자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계산법만 난무하는 야당 비판
18. “전하, 이순신을 죽이지 마소서!” | 명재상 류성룡과 총리 잔혹사
선조: 중국이 구원해주기를 믿을 뿐 이순신을 죽이려하다
남인 류성룡, 이원익/ 당파를 달리했던 서인 김육이 대동법을 충청도와 전라도에 확대
☞당파를 초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우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재상
19. 양반들, ‘주자’ 신격화로 기득권을 강화하다 | 노론의 주자 숭배와 우상화
전체주의 VS 다원주의: 주자만을 절대 선으로 격상 vs 주자를 상대선으로 여겨 해석을 달리
교조주의적인 주사 숭배자 송시열 vs 다원주의 사상의 윤휴
신분제의 해체 내지 완화는 조선사회가 반드시 걸어야할 회생의 길 But 사대주의 세력은 이런 시대적 요구를 양반 사대부 중심 신분질서를 더 공공히 해야 한다고 주장
-남인 중 개혁정파인 청남의 영수 윤휴는 호포제 실시 주장, 신분제 완화를 추진했으나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사형당함 ← 윤휴의 사형 이유를 ‘주자에 대한 모욕’으로 단정 지음
-주자는 이후 조선에서 “신”이 됨
-모든 사상은 시대의 반영인데... 1200년에 사망한 주자의 주자학이 17세기 조선사회에 맞을 리가 없었다.
20. 주자의 이름으로 피의 숙청을 벌이다 | 윤휴의 죽음과 사상의 자유
주자학이란 주자가 공자 맹자의 말을 해석한 것으 뜻하는데, 송시열 등에 의해 유일사항으로 떠 받들여짐
성호 이익: 주자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보다 → 정약용에 영향력 작용
양명학자들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나선 반면, 주자학이 당론이었던 노론의 당수 이완용 중심으로 나라를 팔아먹는 대열에 집단으로 나섬
☞조선총독부 학무국 학제가 교육제 지배, 조선총독부 식민사관, 즉 총독부사관이 주류 학문으로 행세, 학제와 학문의 틀을 타파해야 할 것이라고...
21. 『장리안』에 이름 오르면 삼대가 망했다 | 부패 벼슬아치 명단과 김영란법
-장리안: 부정부패 벼슬아치-장리-명단을 만들어 자자손손 벼슬길이 막히게 함
☞장리안과 청백리 포상과 같은 양방향의 대책 필요
22. 권력에 취한 사림의 배신 | 사림의 변질과 야당의 교훈
인사 간섭을 막기 위해 인사권을 이조정랑(정5품)과 이조좌랑(정6품) = 이조전랑
사림 집권 후 개혁의 길을 걷기보다 맞서 싸웠던 훈구의 길을 따름
23. 양반들 격한 반대에도 ‘대동법’ 한길로 | 김육과 고위 공직자
효종, 김육 우의정 임명- ‘대동법을 실시하려면 나를 쓰고, 그렇지 않을 거면 쓰지 마시오’
대동법
-공납: 중앙→ 군현→ 마을→ 가호 단위로 내려가 가호 단위 분배될 때 송곳 꽂을 땅도 없는 가난한 소작인이나 지주에게도 비슷한 액수 부과됨
-대동법: 부과 기준을 “농토 면적”으로, 부호 부담이 늘고 빈농은 면제될 수도 있음
-작미법, 공수미법, 대동법: 개혁정치가들 단골 주장 ↔ 많은 통토 소유 양반사대부 극렬 반대
-연역: 임난 류성룡의 작미법- 전란이 끝나면서 쫓겨나고 폐기됨→ 광해군 즉위년 영의정 이원익 경기도 대동법 시범 실시, 양반 세가 약한 강원도로 확대→ 양반의 반발 극심 영, 호남 및 충청 확대대지 못함→ 인조 16년 충청감사 김육 충청도 대동법 실시 주장 좌절→ 효종 2년 김육 충청도 대동법 실시(죽으면서도 호남 확대를 거정함)→ 효종 9년, 현종 3년에 전라도 일부, 현종 7년 함경도→ 숙종 34년 황해도까지 실시, 전국확대 [광해군 즉위 100년만인 1708년]
☞소신 있는 재상
24. 하나도 둘도 아닌, 셋을 추천하다 | ‘삼망 제도’와 밀실 인사
영조가 세자(정조)에게 3가지를 묻는다 1.당파 구조를 아는지 2.조정일과 나랏일을 아는지 3.병조와 이조판서 적임자를 아는지
병조와 이조판서를 가려 뽑는 병조판서- 무신인사권, 이조판서- 문신 인사권 > 人事는 萬事
낙점: 세 명의 후보자 중 점을 찍는 추필
특배: 임금이 직접, 숙종은 악용/ 정조는 선용- 채제공(금난전권 폐지, 신해통공)
☞숨은 인재 발탁의 중요성, 조선과 같은 시스템에 의지한 인사가 그나마
25. “전하만 홀로 못 듣는 것입니다” | 직언의 어제와 오늘
-숙종: 자기중심적 성향 강한 인물로 정상적 판단능력 부족, 당쟁을 왕권강화에 이용→ 왕권은 일부 강해졌는지는 몰라도 국사는 엉망이 되고, 사방에서 도적이 날뛰게 됨
-선조: 법을 외면한 채 왕자들을 감싸, 법 위의 존재인 왕자들의 횡포
-태종: 처남과 후궁 비리 연루에 일벌백계
26. 이순신 전사, 선조는 울지 않았다 | 백성의 눈물, 정치인의 눈물
-노론, 쿠데타 위해 경종에게 후사(연잉군-영조)를 다그치고, 대리청정 요청
-경종독살설(노론, 영잉군, 대비 인원왕후로 추측되는... 게장을 먹고 생감을 먹게 함)이 사도세자 죽음으로 이어짐
-못난 군주 선조,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정적의 죽음을 알리는 희소식으로 받아들임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함께 사루가 아닌 공루를 흘릴 정치인을 보고 싶다고...
27. 왕을 독살한 신하들 | 노론의 ‘택군’과 부정선거
-조선 당쟁은 택군擇君의 시기로 접어들어 말기 증상을 보였다. 臣擇君 →반정 →국왕 독살설(변형된 형태)
-노론, 정권 유지위해 청 고관들에게 뇌물→ 친명 사대는 쿠데타를 위한 명분에 불과
-이인좌의 난: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소현세자의 ‘삼종의 혈맥’이 연잉군(영조)에 의해 끊긴 것으로 보고 새 왕통의 정통론 내세움 ⇐ 노론은 위축되어 진압에 나서지도 못합/ 결국 소인강경파의 봉기는 소인 온건파에 의해 진압
☞택군이 낳은 비극을 거울삼아야 한다는
28. 수사권은 사헌부의 독점물 아니었다 | 사헌부와 검찰
조선이 숱한 문제점에도 500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권력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권력기관을 서로 견제시켰던 국가 운용의 지혜에 있다고 한다.
아울러 검찰의 수사권 독점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만들어진 잘못된 관행이라고 한다.
29. 쓴소리는 나의 힘 | 승정원과 비서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기대승(선조 때 승지), 김덕함(인조 때 승지), 윤국형(선조 때 승지) 같은 처신을 한 인물을 찾을 수 있을까?
30. ‘4색 당파’ 정치공작의 검은 그림자 | 최 숙빈과 정치공작
四色 당파: 노론, 소론, 남인, 북인
31. 미인계 정권의 최후 | 노론과 남인, 공작정치의 끝
남인을 도륙하기 위한 ‘임술고변’, 정치공작에 찬성하는 서인 원로 중심의 노론과 반대하는 젊은 서인 중심의 소론으로 갈리게 됨
이후 노론과 남은은 국정 파트너가 아닌 적당으로 여기게 됨
남인의 장희빈을 이용한 정권의 노론 사형, 숙빈 최씨를 이용해 정권 남인사형
정권의 교체가 살육으로 이어지는 공작정치의 일상화로 정상적인 정치 체제를 삼켜버림
32. “명나라 군대 주둔은 절대 불가하옵니다” | 임진왜란과 전작권 반환
효종 때 2차례 나선정벌 승리한 반면, 선조는 임난 후 명나라의 주둔을 두둔하였다. 비록 류성룡의 반대로 저지는 시켰지만... 명은 임난 참전의 명목으로 조선을 지배하려는 듯을 노골화 함- 만약 명나라 군대를 평안도에 주둔시켰다면 최악의 경우 명이 조선을 합병하겠다고 나올 수도 있었다고 함
... 지혜도 있고 힘도 있는 자를 뽑지 않고, 단지 글자나 알고 영리한 자를 뽑다 보니 모두 서생들뿐이다. 급한 상황에서 적을 상대할 때 서생을 쓸수 있겠는가. 이것이 우리나라 풍습이 추구하는 큰 병폐다. _효종실록 3년 5월 15일
33. 백범이 광복 소식에 한탄한 이유는? | 광복군의 독립성과 전작권 양도
3·1운동 결과로 탄생한 임시정부가 위기에 빠진 근본 이유- ‘무장투쟁론’보다 ‘외교독립론’을 우선했던 독립운동 전략 때문
-임정 위치는 상해에 두되 독립군 지휘 군정부는 만주에 두자는 서로군정서의 모체 교민 자치 조직 한족회의 건의가 사실상 외교독립론과 무장투쟁론을 만족시킬 최선의 방책
-But 외교독립론에 치중했던 임정 노선의 문제가 가장 컸지만, “재정”도 문제였다.
1.재정이 열악 2.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 탄압으로 1년도 못 되 와해 3.이승만이 임정 직제에도 없는 구미위원부를 미국에 만들어 미주 애국후원금을 별도 관리한 탓에 재정이 어려움
-의열투쟁(윤봉길 등)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함→ 장개석의 임정 지원 이끌어 냄
광복군 창설
-중국군사위원회 예속 거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제로 활동에 제약→ 중국의 9개 준승을 받아들임→ 부단한 교섭 결과 광복군 임정에 직속
34. 개혁은 사형당하고 | 청남·탁남과 야권 분열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 광해군 때 집권당 북인을 대대적으로 숙청. 가혹한 정치보복
-세간의 반응이 싸늘해지자 동인의 또 다른 축인 남인은 체제 내 야당으로 남겨둠
-결국 조선 후기는 체제 내 야당이었던 남인과의 대립으로 이어짐
-청남(윤휴): 북벌, 북벌위해 신분제와 빈부 격차 완화로 조선 내부 모순 해결코자/ 만인과 실시, 지패법 시행, 호포법 주장→ 숙종의 경신환국, 정치보복으로 윤휴 죽임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야당 비판
35. 왕 내쫓기 위해 청나라에 뇌물 | 춘추대의와 대한민국의 국익
조공시스템: 조공- 사여, 조공을 받은 대국은 사여를 내리는데, 사여품이 조공품보다 많은 것이 원칙으로 상국의 체면 유지 비용이자 전쟁 예방비용- 조선 초기 사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부정적의미가 아님(명 3년 1공 주장, 조선은 1년 3공 주장)
-인조반정 이후 숭명 사대주의는 국익 위의 이념으로 격상되고 맘, 시대착오적인 쿠데타
-그런 사대주의자들이 조선 왕을 내쫓기 위해 청나라 조정에 뇌물을 씀
-조선 초기 태종의 사대외교가 평화 유지 수단이었다면, 조선 후기 노론의 사대주의는 당익과 사익을 위한 명분론에 불과 ⇒ 결국 나라를 팔아넘기는 매국 행위 자행 ⇒ 해방 후에도 친일 청산이 좌절되면서 일정부분 세력 유지
☞대한민국 외교, 국익과 특정 집단의 이익 혼동
36. “어찌 정승을 사사로운 신하로 두시려 하십니까” | 낙점과 인사
조선시대 의정부서사제든 육조직계제든 정승 자리는 ‘될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원칙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사람을 외면하기 때문에 인사 문제 발생
37. “나라 무사하다면 어찌 몸 하나를 아끼겠는가” | 정승과 총리
광해군 폐모라는 이념 문제로 너무 많은 피해자를 만들어 인조반정이 사대부의 지지를 받음
-숭명반청 기치를 높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발생
-삼전도비문을 누가 쓰느냐- 정승 이경석이 책임을 짐
38. 류성룡의 밝은 눈, 조선을 구하다 | 이순신 천거와 인재 등용
☞작금의 인재 등용 실패
39.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했거늘 | 이순신과 군인정신
☞해군 장성의 방산비리와 성희롱 사건 연루, 군인정신의 개조 역설
40. 임금과 대신도 힘겨루기했다 | 다른 듯 비슷한 권력 주조 논쟁
의정부서사제와 육조직계제의 장단점
-의정부서사제: 각 부서에서 수시로 정승들에게 보고, 국사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장점/ 세종 영의정 황희를 믿고 의정부서사제로 환원함
-육조직계제: 각 부서에서 국왕에게 항상 보고하기 어려워 국사가 지체되는 단점/ 태종은 신하들이 권신화 하는 것을 막아 세종도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음/ 세조는 원상제를 실시함으로서 왕권강화라는 쿠데타 명분 상실
☞제도와 사람을 함께 보자!
41. 버림받은 탕평, 살해당한 아들 | 영조의 실패한 탕평과 통합의 길
‘영·정조 시대’ 용어: 노론 후예 학자들의 자당 임금을 치켜세우기 성격이 강함
-영조는 균역법 제외하고 내세울 만한 치적이 별로 없음
-‘과거사-경종 독살설’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임금이 됨
-물론 검소한 영조는 제왕의 미덕이었지만 더 중요한, 새로운 어젠단 제시와 그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고 가는 능력 상실 ←크게 향상된 농버 생산력과 상공업 발달은 신분제 완화 내지 해체시키고 능력에 따라 대접받는 사회로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었음에도... 경종 독살설에 발목이 잡혀 시대적 요구를 외면함
-옹졸한 영조, 소론 온건파와 강경파, 남인까지 포용했어야 하는데...
-반면 정조는 부친을 죽인 노론 벽파까지 포용하면서 미래를 지향함
☞사회가 변하고 발전한만큼 다시 과거로 되돌릴 수 없다! 대통합의 길을 걷는 것만이 예견된 실패를 막는 유일한 길임을 역사는 말해준다고...
42.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정조대왕과 미래 지향 정권
역정의 아들이 왕이 됨
정조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으나, 14년 전 과거로 돌가가겠다는 과적지향 정치를 하지 않음
-다당제 전환, 사상의 다원화, 신분제도 개혁
-화성 축성에 강제 부역을 시키지 않으려는 함
⇒ 백성들의 ‘임금 노동’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성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독살설), 정치 개혁 무위되면서 조선에서 성공한 마지막 임금이 됨
☞미래를 지향하자!
42개의 토막글마다 우리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어려운 문제를 매칭시키고 있다. 그 매칭의 기준이 헬조선이라 일컬어지는 대한민국의 현 주소이다보니 역사적 사건이 다른 주제에서도 인용되 반복 소개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아무튼, 책을 읽으면서 명확하다는 생각도 들으면서 너무 직설적이 아닌가? 하는 걱정 아닌 걱정도 해보았다. 어떤 글에서는 아직 사실 관계가 명확하지 않는 사항에 대한 지금의 이야기로 후기에 옮기기도 껄끄러운 이야기도 있고...
아무래도 내가 공무원이라 보수적인가?
요즘 사이버연수로 사마천이 쓴 사기를 주제로 인간경영에 대한한 강의를 듣고 있는데,
사마천에게서 3,000천 년 전의 기간 동안 일이 배경이나 정도의 차이는 조금씩 있을지언정 사람이 사는 일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일상과 크게 다름없음에 역사가 거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럼에,
이덕일 선생의 조선이후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야 두말할 수 있겠는가?
함석헌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 도올의 「21세기와 노자」의 마지막 부분에서 만났는데, 온 몸에 소름이 돋는듯했다. 이덕일 샘도 이 시를 아는가 보다. 그 일부를 소개하고 있더군.
그 시 전부를 다시 옮겨본다.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맡기며 마음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드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졋는가
불위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 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 웃고 눈을 감을 수 있는 그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찬성 보다도
“아니,” 하고 머리를 흔들 그 흔한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저자는 위 시 문구 중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말에 방점을 찍고 싶었나 보다.
아무래도 난 내가 ‘그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슬프지만...
그래도 우리 아이들은 그런 사람이 있는 나라에서 살게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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