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1993/05/20
2002/04/06
유홍준
(주)창작과비평사
20대 초반에 처음 만난 책이다. 그땐 읽을 수 있던 기회를 내가 차버렸었다. 이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우습게 보였었지.
왜 그랬을까? 대체 무슨 책을 읽고 있었기에 발로 걷어찼을까?
아무래도 사회문제에 대해서 조금씩 눈을 뜨고 있을 때라 이런 문화답사가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은 것 같다.
책을 사려고 인터넷 서점을 두리번거리다 새로 개정된 이 책 광고가 보이는 것이여. 갑자가 관심이 가더군.
참~ 나도 살아온 세월인데, 이렇게 쓰려니 옛 이야기가 되고 만 것이다. 세상이 그렇게 빠르게 변화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20년이 훨씬 지난 이 책을 다시 찾아 읽게 된 것은 그 세월의 변화 속에도 변치 않는 무엇이 매력 덩어리로 남아 있고, 아마 그건 문화탐방이라는 이면에 그 시절에 대한 향수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지금 같으면 해당 지방자치단체나 관리주체의 공식 홈페이지를 방문하거나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에서 검색어만 잘 선택하면 포털사이트 지도검색 서비스에서 정확한 위치를, 누리꾼들의 생생한 글로 이런저런 뒷이야기며 입장료 정보까지 알아볼 수 있는 세상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은 1990년대 초반 IMF를 겪기 전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릴 때지만 개인무선통신이나 인터넷, 더더군다나 스마트폰이라는 건 상상도 못했던 시절에 저자가 한국문화유산답사회에서 실제로 답사했던 일정까지 올려놓아 나름 현장감이 살아 있는 책이다.
남도답사 일번지와 담양땅의 정자- 3일 일정
남도답사 일번지와 보길도 및 운주사- 4일 일정
예산 수덕사와 가야산 주변- 2일 일정
경주 남산과 감은사터- 3일 일정
관동지방의 폐사지와 양양 낙산사- 3일 일정
문경 봉암사- 1일 일정
선운사와 갑오농민전쟁의 현장- 2일 일정
답사 당일 일정과 약도, 답사자만이 알고 있는 약도를 책에 옮겨놓았다. 옛날 생각난다. 약도를 그려주던 그 때 말이다.
광고지에도 모임 안내장에도 약도가 있었다. 지금은 청첩장에서나 형식적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이 책은 그렇게 오랜만에 내 손에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먼 시간의 흐름 탓에 제 값을 주고 사기에는 거시기 한 것 같아서 3,600원에 알라딘중고서점에서 다른 책들과 함께 사들였다. 자칫 햄버거가격도 안 되는 돈으로 얻은 것이라 어디 구석에 던져놓고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무겁고 무겁게 느껴지는 책의 첫 페이지를 어렵게 들어서 젖혔다.
사진도 흑백이고 책의 편집상태도 예전의 것인 매력이라고는 향수밖에 없어보였지만,
책을 펴내면서 “국토박물관의 길눈이”라는 머리글을 읽고는 이 책을 꼭 읽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그가 미국 뉴욕에서 외국인에게 한 말이란다. 서구 미술관은 그 규모의 방대함을 자랑하고 있지만 제국주의 시대 산물로 ‘이국문화의 포로수용소’일 뿐 유물의 생명력은 잃어버린 것이다. 프랑스 평론가의 말을 빌어 ‘명작들의 공동묘지’라는 말을 썼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고 뭔가 새로운 것에 눈을 뜰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저자의 말로는 모든 유물은 제자리에 있을 때에만 온전히 제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문화재청 장관으로 재직할 시절 고궁을 개방한 덕에 나도 경회루에 올라본 적이 있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그 생을 더 오래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취지였다.
해외여행에서 대영박물관을 보고와서 스스로 움츠려들려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향해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은 아는 만큼 보일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
조선시대 한 문인의 글이라고 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이 책이 그 아는 만큼 보이는 길을 열어주는 것 같구나.
게다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우리 민족의 숨겨진 삶까지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남도답사 일번지-강진‧해남(1)
월출산/도갑사/월남사터/무위사/남도의 봄
강진가 해남은 우리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무대의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촌스런 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첫 머리는 88고속도로 지리산 휴게소에서 열 받은 이야기다. 이 책 내내 기본적인 그의 관점을 엿볼 수 있는 소재다.
민족의 영봉 지리산이 보이는 지리산 휴게소는 앞산에 가로막혀 정작 볼 수 없어 답답한 곳인데다 그 시절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보기 싫은 준공탑을 보면 피가 끓는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 반남박씨의 본을 이야기 하면서 독무덤이니 마한의 족장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땅에 대한 의미를 이끌어 내니 그 때만해도 붉은 황토와 너른 들판이기만 했던 땅이 하나의 이야기로 살갑게 다가온다. 그는 이렇게 독소와 온기를 뿜으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너른 들판에 첩첩이 쌓여 자리한 골산을 바라보며 탄식을 하면서도 그런 멋진 산을 제대로 그려낸 호남의 화가들이 없다며 비판을 한다. 대부분 관념과 전통의 인습에 파묻혀 현실과 현장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호남 화단은 양적으로 풍부하지만 허구로 비쳐줄 때도 있는 것이 어디에나 걸려있는 그림이 공상의 산수, 감동은 사라진 사군자 나부랭이이기 때문이다. 남도의 황토와 아름다운 산등성, 너른 들, 야행초, 동백, 월출산 같은 그림은 없다.
예술은 관념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대상에 대한 사랑가 감동에서 시작한다!
백제시대 왕인 박사?
왕인이 영암출신임을 자랑하지 않았음 좋겠구나. 왕인을 추앙할 사람들은 일본인이다. 아펜젤러는 한국의 개화사에서 이름난 것이지 미국 현대사에 나올만한 인물이 아닌 것처럼...
식민시절 일본에 댕했던 아품의 정신적 보상을 이런 식으로 찾으려 했던 애처로운 작태라고 생각한다.
-월출산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자리에 세워진 월남사, 삼층석답: 백제양식의 고려 탑-지방적 특징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13호): 수덕사 대웅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조사당 고려 맞배지붕 주심포 엄숙함 이어받으며 조선 종묘나 대성전에서 보이는 단아함이 살아 있다. “본래 단순한 미는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무위사 뒷 문쪽 벽화에 그려진 열십자, 해괴한 20세기 자취
-남도의 색: 피고 지는 저 꽃잎의 화사한 빛깔은 어쩌다 때가 되면 한번쯤 입어보는 남도의 연회복이라면, 남도땅의 평상복은 시뻘건 황토에 일렁이는 보리밭의 초록물결 그리고 간간이 악센트를 가하듯 심경 있는 노오란 유채꽃, 장다리 꽃이다.
남도답사 일번지–강진‧해남(2)
해태식당/영랑생각/구강포 귤동마을/ 다산초당
-한정식 3대 음식점
조선백반의 진수 강진 해태식당, 해남 천일식당-맛이 너무진하고 장삿속이 얄미울 정도다, 서울 인사동 영희네집-비싸다, 예약이 필수다
-네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의 깨알 같은 정보가 나온다. ㅋ 요즘은 기계에 너무 의존하는 건가? 몇 년 전에 오가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던 다산초당 길을 정겹게 표현하시네.
-19세기 각 지방 토호들은 왕릉의 문신‧무신석, 양반 무덤 호신석을 융내 내 독특한 석인상을 세우곤 한다. 지배층 문화를 흉내내어 자신들도 문화적 향유 내지 소비를 할 수 있는 경제적‧신분적 상승(45쪽 동자석 사진)
-다산초당 부근
귀양처에서 팔자 좋은 사람들의 별장터로... 게다가 1958년 복원된 다산초당은 유배객이 살던 집 같지 않은 큰집이다. 예비지식이 없이 온 사람들은 유배객 팔자가 늘어졌다고 생각하게 되는 허구 중의 허구다. -맞다. 나도 이 정도면 양반 계층의 유배는 할만하겠다고 생각할 정도였고, 안내자도 툇마루와 방안에 앉아 그 때의 심정을 느껴 보라라 뭐라나. 실제 다산 초당은 초라한 오막살이.
-갑오농민전쟁 때 동학군이 선운사 마애불 배꼽에서 꺼냈던 비기는 ‘목민심서’였다는 전설(54쪽; 319쪽)
남도답사 일번지–강진‧해남(3)
만덕산/백련사/녹우당/윤고산 유물전시실/대흥사 유선여관
-백련사
몇 년 전 나도 다산초당으로 해서 천일각을 지나 백련사에 이른 일 있었다. 그 때는 군에서 전국적으로 청렴연수를 유치하기 위해서 정비를 잘 해 놓았기에 이 책에서 읽은 것처럼 궁색한 길은 아니었다.
선생은 백련사 가람배치의 불친절성을 사찰 중 가장 거만스런 배치라고 설명하고 있다. 유성 홈플러스에서 위 아래층으로 이동할 때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면 매장 저쪽으로 일부러 가게 만들어 놓은 것처럼, 이동하려면 꼭 필요 없는 거리를 걷게 만드는 - 몇 채 안 되는 당우로 거만한 위압감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산비탈에 지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지만 다른 곳은 누마루 밑을 계단으로 뚫어 보완을 했다지. 뚫리지 않는 그 누각 위에서 스님한테 차 마시는 법을 연수생과 함께 배운 기억이 나네.
-해남 윤씨 부귀 내력
왜구의 잦은 침탈과 고려의 멸망과 함께 폐사되었던 백련사 이야기 외에도 해남 윤씨의 부귀 내력도 읽을 만한 이야기다.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고택을 찾아가면서 하는 이야기다.
임진왜란을 경계로 자손균분에서 장자상속으로 넘어갔고 국가 토지정책도 자작소농제가 아닌 대토지소유제를 택해 토지에 의한 자본집중과 팽창은 임진왜란 이후의 현상이었다고 한다.
임란 이전 삼산 벌 주인은 해남 정씨, 자손균분 상속으로 해남 윤씨에 시집간 딸에 떼어주고, 덕분에 부자가 된 윤씨 집안은 장자상속을 시행하고 그것을 만대 유언으로 남기어 자산이 눈덩이처럼 불어 신흥갑부가 되었다. 이 재력을 바탕으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이야기.
그냥 고산과 공재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면의 이야기가지 두루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그러니 계속 밑줄 그으면서 읽지 않을 수 없다.
고산과 공재의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저자의 말이 생각난다. 상속의 가장 좋은 방법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회환원이라고. 저자는 이런 주관을 가지고 있다.
남도답사 일번지–강진‧해남(4)
두륜산 대흥사/일지암/미황사/땅끝
-주인 됨을 느끼다
나는 가을보다도 겨울날의 대흥사를 더 좋아한다. 벌거벗은 나뭇가지가 보드라운 질감으로 산의 두께를 느끼게 해주고 비탈길에는 파란 산죽들이 눈 속에서 싱싱함을 보여줄 때, 그때는 왕후장상만이 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님을 말해준다.
언젠가 내가 그 골격을 그대로 드러낸 겨울산을 보고 느낀 것과 비슷한 표현을 썼다. 나 스스로는 참 살갑게 다가오는 표현이다. 그런데 저자의 마지막 말은 참 그 생각의 크기가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을 했어도 굳이 그런 표현하기에 어물거리는데 아주 시원스레 내뱉는다. 어쩜 사람들이 이런 글에 대리만족을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같은 흙수저도 인생을 생각하고 세상에서 주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추사 김정희
대흥사 이야기며 불가의 실학정신을 가졌던 초의스님에 대한 이야기는 추사와 원교 이광사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추사는 30,40대를 기고만장하게 신문학과 신예술의 기수가 되어 지내다 54세에는 형조참판까지 오르지만 정변으로 제주도 귀양길에 오른다. 귀향길에 초의를 만나 대흥사 현판의 원교 이광사의 글을 보고는 그를 비판하며 현판을 내리라고 신경질을 부려 내리고 말았다고 한다. 하지만 귀양살이 9년에 인생의 반전이 이루어진다. 법도를 넘어선 개성의 가치가 무엇인지 체득한 것이다. 그가 아픔의 제주로 갔기에 오늘의 추사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추사가 귀향에서 풀려나면서 63세 노령으로 다시 대흥사에 들러 회포를 풀면서, 떼어 냈던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걸어달라고 한다. 그래서 대흥사 대웅보전에는 다시 원교 이광사의 현판이, 그 왼쪽에 승방에는 추사가 귀양가며 썼다는 무량수각 현판이 걸려 있다고 한다.
<그래 실패란 사람을 여러 면에서 더 완성시켜주는 계기가 되는 구나>
예산 수덕사와 가야산 주변(1)
내포평야/수덕사 대웅전/정혜사 불유각/수덕여관
차량산맥 위쪽 가야산을 둘러싼 예산, 서산, 홍성, 태안, 당진, 아산에는 비산비야의 넓은 들판 → 내포, 내포평야 / 인문지리학적으로 옆 마을 사람처럼 친근한 동향의식을 가져 내포사람
평평하고 아름다운 산천에 따르면 평온 속에 사람들이기에 부드럽고, 여유 있고, 친근하고... 하지만 내포땅이 배출한 이재들은 기골이 강한 깡 있는 사람들이란다. 최영, 이순신, 김정희, 최익현, 김대건 신부, 윤봉길, 김좌진, 기옥균, 심훈, 박헌영, 한용운, 이응로... 독립운동도 항일 운동을 주로 한 사람들 이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애써 가야산의 정기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간결한 힘과 멋을 지닌 수덕사의 대웅전(국보 49호)에 대한 그의 애착이 무척 강한 것 같다. 하지만 최근 돈으로 쳐 발려진 절의 모습과 엉뚱한 문화재 안내문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진다고 한다. 그가 그만의 시선으로 주시포집의 맞배지붕을 설명한 글이 지금은 수덕사에 세워져 있을는지 궁금하다. 근데 쉽게 잘 쓰셨는데 어렵긴 여전히 어렵다. ㅋ
한번 확인해볼 겸 덕숭산에 오르고 싶군.
예산수덕사와 가야산 주변(2)
남연군 묘/보부상 유품/해미읍성/개심사
내포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에 못지 않은 흥미를 끄는 이야기다. 풍수에 대한 것이지.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값싼 원료와 넓은 시장을 찾아 우리와 같은 후진국에 와서 ‘개방’이라는 명목의 압력과 침략을 자행하는 순서는 ①장사꾼 ②선교사 ③대포와 총칼로 들어왔던 표본, 오페르트는 남연군묘를 파헤쳐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전주곡 연출
흥선군에게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한 말 “충청도 덕산땅에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 가야산 동쪽 덕산에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 당연히 흥선군은 후자를 선택
가야사 보웅전 앞 금탑, 흥선군은 주지(절을 불태움)에게 돈을 주고 충청감사에게 벼루를 뇌물을 주어 이 절이 폐사되었다고 한다.
잘은 모르지만 남연군 묘의 자리를 보면, 조산, 주산, 안산, 좌청룡과 우백호가 완연히 드러난다고 한다.
그러니 절집만큼 기막힌 자리는 없다네. 거기에 가장 좋은 곳은 부처님이 앉아 내다보는 경관이란다. 어느 절을 가든 대웅전 기둥을 등에 대고, 또는 댓돌에 앉아 앞에 있는 탑과 함께 주변을 보는 것이 가장 좋은 관람 방법이라고 한다.
덕산면사무소 뒤뜰 ‘예덕상무사’ 기념비각과 보부상 유품
보부상-= 보상(보자기)+부상(지게)
임란 때 행주산성 권율장군에게 양식을 조달,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 포위망 뚫고 양식 조달, 1866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도 군량 조달
그러나, 1811 홍경래난 때 허상이라는 자가 1천명을 데리고 관군을 도왔고, 1894 갑오농민전쟁 때 수백명이 농민군 토벌에 공을 세우고, 1898 황국협회는 보부상을 앞세워 독립협회를 분쇄하는데 이용, 개화파의 테러에 부부상이 앞장서고...
그런 정치에 간여하고 위기에 공헌했다!!! 돈을 향해 뛰는 자들의 이성의 파괴, 관권과 상권의 결탁의 뿌리가 깊었다. 변란 때 공헌도 어쩌면 애국적 동기보다는 상권을 기키려는 시장보호차원이었을 것이다. 그 미움을 알기 위해 여기 한 번 들러보라~
올해 가족과 함께 개심사에 갈 때 우연히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이국적인 풍경에 감탄하던 때가 생각난다. 그것이 현재는 농협의 소유로 되어 있나본데, 김종필이 어찌어찌해 모은 돈으로 만든 삼화목장이란다. 이 이국적 풍경 뒤에는 자연의 생태계는 물론이고 거기에 살던 사람들이 강제로 타 지역으로 떠돌게 되어 인간 생태계까지 바뀌었다는 슬픈 실제 사연이 품어져 있다.
개심사에서 그리 신기하게 바라보던 청벚꽃. 저자는 겹벚꽃이라고 설명한다.
경주(1)
첨성대/황룡사 구층탑/삼화령 미륵삼존/감실부처님/여근곡
첨성대
동양최고의 천문대가 10m도 안 되는 초라한 규모? 거기에 올라가면 가깝게 보이던가?
정말 그렇네~ 그럼 뭐냐?
가난하고 용렬스러운 것은 첨성대가 아니라 그것을 동양 최대의 천문대라고만 가르치고 배운 이 시대의 행태라며 비판한다.
천문기상관측의 상징물로 여러 가지 과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지. 땅과 하늘을 상징하는 틀 사이에 28개의 기본 별자리와 한 달, 1년 12달과 24절기를 상징하는 돌의 개수로 표현했다. 게다가 태양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기능도 했다는데, 4방위 8방위에 춘분과 추분, 태양의 남중 시기, 하지와 동지의 광선의 사라짐을 통해 춘하추동의 분점과 지점의 측정 역할을 한다네. 절묘한 구조이고 기막힌 상징성이며 안정감 있고 아담하고 조순한 인상을 준다네.
경주를 말해주는 세 개의 유물
진평왕릉/ 장항사 절터/ 에밀레종 치는 거
다른 건 다 이해를 하겠다는데, 감동할 만반의 준비가 되었건만 감동이 몰려오지 않는 진평왕릉 – 그저 온화하며 굳센 진평왕릉이라 한다.
고신라의 찬란한 문화전성기의 진평왕의 기록은 아예 없고 선덕여왕의 것은 그나마 사기꾼 김부식에 의해 폄하시키려 애쓰고 있다.
황룡사 구층탑
20층 건물 위에 송신탑 하나 붙어 있는 점, 황룡사는 1세기 동안 거축을 했단다. 기술력 부족보다는 꼼꼼한 장인정신
그 匠人은 누구인가? 백제에서 파견 온 아비지. 9층탑을 지어 적을 물리치겠다는 의지에 각 층마다 그 적인 일본, 중국, 말갈, 예맥을 다 적었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없었다.
상대방을 곡 정복하려는 싸움이 아니라 이 때만해도 늘상 있어왔고 있을 수 있었던 분쟁이었다는 예상이다. 그 티격태격의 다툼이 한 시점에서 통일전쟁으로 바뀐 것 아닐까 추측을 하는데, 아마 그러니까 이런 문화교류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나도 동감한다.
첨성대의 우아하면서 온순한 느낌도 백제풍이라고 한다.
찬란한 문화의 강요
외세이 침략으로 엉망이된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고도 문화를 설명할 때는 “찬란하였다” 이고, 지배층의 도덕적 타락을 말하면서도 문화는 ‘찬란’이란다. 논리적이지 않은 미사여구는 맹목적 애국주의의 소산이거나 찬란하지 못한 문화의 열등의식이 낳은 표현이다.
→ 사이다 같은 해설이다. 누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아니구나 20년 전부터 했는데 내가 못 알아들었던 게지.
문화의 생장소멸이라는 도도한 흐름 7세기 전반기 진평왕과 선덕여왕 시절 신라문화사은 모든 것을 자신의 입장에서 창조하고 소비할 수 있던 자신감이 충만했다고 한다. 마치 1950,60년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는 지식인으로서 해외를 경험해야만 불안감과 열등감을 해소할 수 있다고 믿었고, 1980, 90년대에는 결코 필수나 만능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네. 원효의 젊은시절.
역사적 유물에 대한 정보야 다시 펼쳐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지식인의 사실과 판단이 어우러진 이런 이야기야말로 내심 내가 듣고 싶었던 본질이 아니었을까?
아마 그건 진평왕릉에 대한 이야기와 연계되는 건 아닐까 생각된다.
경주(2)
감포가도/대왕암/감은사탑/고선사탑/석가탑
아이들과 경주에 갔을 때 무열왕릉은 교과서에 나오니까 아이들에게 보여주고는 감은사 터는 시간도 없고 피곤하니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그래 그거다. 아는 만큼 보이는 거다. 아이에게 딱 내가 아는 만큼 보여주고 느끼게 하고 왔다. 무열왕릉을 보면서 독재까지 비평하는 선행에 비해보니 좀 부끄럽기도 구나.
석탑의 나라
중국의 전탑(벽돌탑), 일본의 목탑에 비해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다.
1.백제인 처음 목조건축 형식을 석탑으로 전향–목조건축 방식을 모방한 익산 미륵사지구층석탑
2.목조건축 방식을 간소화하여 석탑이라는 양식–기단부와 각층 몸돌, 지붕, 상륜부라는 구조의 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자체로 하나의 완결미 가진 명작, 모범답안/ 일층 몸체가 길어 상승감 있지만 힘과 안정감이 미약
3. 상슴감↔안정감, 기단과 몸체 확연한 분리, 기단부 강조에서 안정감 취하고, 몸체의 경쾌하 체감률에서 상승감 획득 – 감은사지 삼층석탑, 이성기단의 삼층석탑으로 1층을 시원스럽게, 2,3층은 점점 좁혀 몸체 지붕돌과 기단부 끝 모서리를 그으면 80도 경사 일직선
4.감은사탑 이후 통일시라 석탑은 여기서 기본을 둠, 큰 덩치 때문에 1층 몸돌은 한 장로 만들지 못해 4장으로 붙여 속을 자갈로 채운 거친 마감으로 감은사탑은 뱀이 소굴 – 이에 석가탑은 크기가 2/3로 줄어 짜맞춤함, 완벽한 아름다움의 모범답안으로 통일신라 삼층석탑형식 완성
경주(3)
성대대왕신종/봉덕사종 이동기/후천개벽춤/불국사 박정희종
에밀레종
20세기 복제품의 실패-제작하는 자세 내지 정신을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다.
종을 매달 쇠막대기도 당시 기술력으로는 얇게 만들 수 없어 그냥 예전 것을 씀. 예전엔 판을 두드리면서 말아 만들었기에 강하면서 부드러워 휘지도 부러지지도 않았다.
부처님의 말씀- 불경, 불처님의 형상- 불경, 부처님의 목소리- 종소리, 종은 쳐야 녹슬지 않는다.
에밀레
거푸집이 튼튼해야 했고, 주물에 기포가 없는 것이 신기, 반강제 성금을 내야 했던 민중의 고통으로 해석되어야 할 듯.
인(P)성분이 합금에서 신기한 작용을 해왔다고 한다. 벽골제의 벽골, 푸른 뼈- 말벼를 갈아 섞어 그 때 당시 바다에 인접했던 곳의 벽골제 완성
사람의 인이 신묘해도 27톤 쇳물 속에서 그 양은 거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니...
종을 옮겨와 달
낙양 낙산사
낙산일출/의상과 원효/원통보전 돌담/낙산사 그림
낙산사는 의상대사가 요란하게 창건하고는 1231년 몽고란 때 몽땅 불타버렸고, 세조 때 크게 중창되었지만 임란과 병자호란 때 또 ... 구한말 절모습을 찾았지만 6‧25 때 홀랑 타버린다. 20세기 후반 대수롭지 못한 안목으로 치장하고 복원했다는 그 것도 이 책 발간 이후 2004.4.4.산불로 타버렸다. 기구한 낙산사여!
원효대사의 낙산사 봉변
원효 봉변기- 유언비어의 사회사/
-의상: 진골귀족 출신, 유학 포기 “모든 것은 마음에 다렸다”, 대중적, 스스로 깨달음
-원효: 육두품 출신, 강렬한 국가의식의 저이적 인물, 호국적, 거대한 불교체계에 들어와야
통일 전쟁으로 원효보다 의상이 필요한 시기에 대중이 원효를 신봉하니 그를 뒤엎을 유언비어 필요!
관동지방의 폐사지
설악산 진전사터/도의선사 부도/미천골 계곡/선림원터/홍각국사 부도비
도의선사와 전진사
-당나라 선종 중 남종선의 골수를 익힘 “타고난 마음이 곧 부처(自心即佛)”, 경전이나 해석하고 염불 외는 것 보다 본연의 마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
⇒ 변혁사상, 불온한 위함한 사상자로 서라벌을 떠나 북쪽으로 은둔
<당시; 왕→부처, 귀족→보살, 대중→중생, 부처님 세계 논리와 위계질서=사회 지배 논리>
⇒ 도의 가르침은 지방의 경제적‧군사적 부자 호족, 호족도 황이 될 수 있다고 비약
⇒ 왕건의 승리
-부도의 유행: 고승의 시신 화장한 납골을 모신 건조물- 선종의 유표와 연관, 하대신라의 변혁적 기류/
원효, 의상, 진표, 자장 등 고승의 죽음은 그저 죽음 But 선종, “본연의 마음이 곧 부처” 깨달은 사람=부처와 동격으로 대선사의 죽음은 석가모니의 죽음 못지않음, 탑~>부도
진전사 폐사지 삼층석탑- 지방호족의 능력 과시, 부도- 선종 유행의 시작, 부도의 첫 시도
수도승과 보살행의 참모습- 차라리 선림원지 빈터 낡은 너와집 늙은 부부가 약초 캐며 살아가는 모습이...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니 않으리라.(P 236)
문경 봉암사
희양산/봉암사/지등재사 부도와 비
촬영금지와 출입금지
얼마 전 미술관에 갔다. 아예 카메라를 못 쓰게 하더만. 내가 그걸 가지고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보다는 지들 상업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더 큰데 말이다. 오로지 머릿속에 저장해 놓고 오로지 지들이 찍어댄 책자로만 알고 느끼라는 거야?
저자도 그런 불편한 심기를 이야기 한다.
세계 모든 유수 미술관은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는 한 촬영할 수 있댄다. 플래시 사용시 자외선이 작품을 헤칠 수 있고 다른 관객에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지, 어짜피 돈벌 용도의 사진은 특수한 조명과 장치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과 일치한다.
모든 문화재 소유자는 그 재산권과 관리의무가 있을 뿐, 인문적 가치를 공유할 권한은 만인에게 있다는 생각이 보편화 되어야 문화적으로 민주화에 다가설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러기에 아주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던 백남준 전시회가 천경자의 것 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인상적으로 기억된다. 천경자의 것은 그 관람방식에 대한 반항 때문인지 도무지 뭔지 이해하기 싫을 정도다.
이 이야기는 철저하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봉암사에 대한 방문과 그 실망감을 말하는데 크게 작용을 한다.
문경 봉암사(2)
정진대사 부도와 비/마애보살상/야유암
지증대사는 원효나 의상 같은 위대한 사상가는 아니지만, 스님으로 한세상을 성실하게 산 분이라고 한다.
자신의 의지로 결정한 출가, 나무군의 꾸짖음에서 깨달은 바, 왕의 부름에 쉽게 응아지 않은 고고한 기품, 봉암사를 창건하는 과정... 인간의 영원한 스승은 위대한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에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한 시대의 사상가, 껏도 그 인물이 아니라 사상 자체에 조첩이 맞추어져 한 시대를 성실하게 살았던 인간에 대해선 야박할 정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네.
견훤
봉암사를 황폐화 시킨 장본인 견훤의 고향은 봉암사 가은땅. 첩첩산골 출신으로 민심을 잃어버린 나라에 반기를 들어 어느 호족보다 강성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그저 패자였을 뿐이다. 용- 지렁이로 왜곡하듯 패자는 승자의 칼과 붓에 의해 난도질 당한다.
문경 봉암사에 대한 저자의 실망은 돈 냄새 많이 나는 여느 사찰과 같이 큰 것 같다.
생뚱맞지만 여기서 잠시 저자가 소개한 매실 담그는 방법을 적어본다.
여름에 매실을 사서 채에 받쳐 물로 서너번 헹군다.
손으로 비비면 매실 본성이 다치므로 단지 물로 먼지나 농약을 씻어야 한다.
매실을 술과 6:4로 오지독(오짓물을 발라 만든 독)에 넣고 잘 봉한 다음땅속에 묻으면 제일 좋고, 그렇지 모하면 지하실 같은 어두운 곳에 놓는다.
3개월 지나면 매실은 건져내고 다시 오지독을 어두운 곳에 두었다가 1년이고... 오랠수록 좋다. 술이 숙성하는 것은 매실을 건진 다음부터이기 때문이다.
술은 자기가 변해가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아요. 술의 숙성원리이자 학문의 숙성원리이고 참선의 원리. 인생의 영원한 스승은 인간 그 자체인가보다.
담양의 정자와 원림(1)
중부휴게소/누정의 미학/소쇄원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 소쇄원
이 글을 읽었더라면 지난 해 소쇄원 방문이 더 뜻깊었을 것을
담양의 정자와 원림(2)
식영정/서하당/환벽당/취가정/명옥헌
백일홍-배롱나무-쌀밥나무
우리나라 전통 조원에서 조경설계자들이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은 나무, 그 중 소나무의 위치
송강이 시에 적은 원숭이 휘파람
지식인의 한 단편. 모든 것을 자기 정서에 내맡기지 못하는 불안감, 뭔가 남모를 유식한 끼가 있어야 차원이 높아 보이고, 이국적 냄새도 약간 풍겨야 촌스러움을 벗어날 거것 같은 착각이 일어나는 자신감의 상실증
나의 타산지석이 되어 행여 지금 내 처신과 글 속엔 그런 ‘원숭이 정서’는 없는가 스스로 되물으며 섬뜩해하곤 한다.
그래 당신 지식인 맞소이다. 항상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실천하는 지식인.
정자와 원림 경영- 호화판 인생의 풍류, 지배층의 문화 > 예전 지배층만의 정자와 원림의 미학을 보다 넓은 계급적 지평에서 공공성으로 환원시키는 일이 민중적 재창조의 길이 될것이라네.
모정- 예전에 대개 초가지붕이었단다. 농촌사회의 품앗이 두레의 한 상징으로 요즘은 4각 8각의 콘크리트 기둥에 기와지붕
고창 선운사
동백숲/상갑리 고인돌/낙조대/칠송대 암각여래성/백파선사비/풍천장어와 복분자술
도솔암 석가여래상- 배꼽의 비결, 고려시대 마애불
배꼽 속에 신기한 비결이 있어 그 비결이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유언비어. 있었다면 고작 불경일 터인데 역적죄까지 연루되는 사건으로 확대된 이유는? 민중의 열망이었을 것이다. 낡은 체제 말고 희망의 무엇을 걸고 갈 것을 말이다. 세월이 흘러 다른 전설이 붙었는데 그 비결책이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경세유표」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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