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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니의 책가방

인물로 본 공주역사 이야기

by 여.울.목 2017. 1. 27.



인물로 본 공주역사 이야기
2016/11/01
김정섭
㈜메디치미디어

 

480쪽이나 되는 두꺼운 책이다.
아는 선배님이 쓴 책이라 내용 불문하고 서점에서 한 권 골라 담았다.

왜 하필이면 공주라는 특정 지역을 주제로 책을 엮었을까?


공주사람이니까.
공주 고유의 정체성을 찾아내고 더 좋은 지역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자.
그리고 자랑스럽고 빛나는 역사와 함께 어둡고 아픈 역사도 외면하지 말고, 현재와 미래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라고 한다. 옛일을 통해 미래를 꿈꾸기 위해. 法古創新


그럼 난?
공주사람이니까.
그리고... 난 솔직히 지은이처럼 큰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사실 내 업무와 관련해서 공주의 인구통계와 같은 전반적인 자료를 자주 들여다봐야 하는데,
가을걷이가 끝난 후 논바닥에 홀로 남은 허수아비 같은 느낌이다.
저출산과 고령화라는 우리나라의 구조적인 문제만으로도 허기진 상태인데,
세종시가 인접해 있다 보니 인구의 순 유출이 심해 비슷한 규모의 도시에 비해 공주시가 급격하게 쇠약해지는 것 같다. 피부로 느끼는 체감도 상당하다. 실제 주변의 사람마다 웬만한 조건만 충족하면 이런저런 이유로 세종에 둥지를 튼다.
업무적인 것을 떠나 어쩜 나 개인적으로도 새롭고 희망만 가득 차 보이는 도시로 이사 가고 싶은데, 여의치 못한 내 상황에 대한 피해의식인지도 모른다.


이런 판에 공주사람들의 뿌리 깊은 역사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남들은 알아주지 않는 자존심을 더 쌓아 올려? ㅎㅎㅎ
무엇보다 내게 작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해서 책장을 넘겨보기 시작한다. 뭔가 장기적인 생각이 짜여 진다면 더 좋겠지만.

산업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앞으로는 역사와 문화 콘텐츠가 어우러져야 한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공주지역의 문화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면에 깔린 저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 좋은 자료가 된 것 같다.


지은이는 200편에 가까운 자료를 참고하고 직접 발품을 팔아 많은 인물과 이가기를 엮어냈다.

백제시대의 무령왕과 성왕의 이야기를 읽고 있자면,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백제의 부활과 함께 지역의 위상도 함께 높아진다.
하지만, 백제의 멸망과 함께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백제라는 커다란 타이틀 때문에 지금까지의 위상만큼 차별을 받았다는 느낌이 들더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호서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공주는 그 중심에서 역할을 다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일제와 김갑순과 같은 친일 투기 재력가들에 의해 도청이 이전되면서 영향력이 급감하고 만다.

마치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 같다.


처음부분의 무령왕과 성왕의 흥미진진함, 효자 향덕과 이복에 대한 전설 같이만 여겨졌던 재미난 이야기, 공주를 본으로 하는 여러 姓氏와 문관 김종서에 대한 장군 칭호의 오해 근원 등 인물중심의 스토리가 책장 넘기기를 게을리 하지 않게 한다.
중반을 넘기면서는 다른 시대에 비해 풍부한 사료가 있어서 그런지 인물중심으로의 이야기가 반복되니 좀 지루해지는 감이 든다.
하지만 그 지루함은 ‘공주를 바꾼 사건&인물’ 11꼭지가 시원하게 날려주는 것 같다.

 

재미있게 읽었던 11꼭지 이야기를 간추려본다.
1. 웅진백제 5대 64년에 대한 연대표를 시작으로,
2. 김헌창의 난을 통해 백제 망국 후의 시대적 상황과 통일신라대의 폐단과 더불어 왕건이 훈요십조로 공주지역을 배역背逆으로 표현하여 차별을 받게 된 배경을 풀어 놓고 있다.
3. 고려 현종의 공주 파천. 파천보다는 태조 왕건의 “차령이남 공주강외의 인물을 등용하지 말라”는 유훈 때문인지 공주 지역이 고려 정권에서 우대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태조23년에 웅주→공주개칭 되면서 11개 대읍으로 인정, 성종2년 12목제 중 하나로 지역적 위상이 컸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4. 공주명학소의 난. 양인 신분인데도 차별을 받자 신분차별에 난을 일으킴. 망이·망소의 난은 농민의 투쟁과 차별 철폐운동이 복합된 것으로, 지배층에 경각심을 일으켜 고려 말기에 이르면 대부분 차별지역이 해소됨
5. 충청감영과 역대 관찰사. 행정, 사법, 병권까지 장악한 관찰사가 있던 공주 충청감영 이야기. 감영청사와 공주아문에 대한 이야기에는 내 사는 동네의 친근한 이름이 나온다. 대동법을 시행한 김육과 같은 관찰사와 무성산 홍길동산성을 모티브로 홍길동전을 지은 공주목사 허균 등의 이야기가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펼쳐진다.
6. 인조의 공주 파천.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파천을 한다. 인조 파천에 숨은 정치적 배경은 물론이고 '조왕골', '인절미', '도루메기'의 전설이 함께 어우러져 재미를 더한다.
이괄의 난 때 6일 간 머문 인조 임진왜란 때 3개월 가까이 머문 광해군.
이괄의 난은 반정으로 인한 인조의 정통성 문제였다. 나아가 반정 세력의 정치적 기반 때문에 - 광해군이 집권했더라면 없었을 - 두 번의 호란으로 이 나라 백성과 강토가 겪어야 했던 시련의 역사도 빠짐없이 기술하고 있다.
7. 황새바위와 공주의 순교자들. 황새바위, 황새가 노닐 던 곳이라서 또는 죄인들의 항쇄 때문에 이름지어졌다는 설도 있다. 학문으로 시작된 천주교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함께 전개한다. 공주에 관찰사가 있어 충청도 4목과 5진영 중죄인들이 공주감영에서 재판을 받고 형벌을 받게 된다. 공주에서 337명의 천주교도들이 순교, 이중 공주사람이 140명으로 42%. 황새바위가 성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제 공주 순교 337위는 장소별로 황새바위 36명(초기 공개 참수), 향옥 197명(후기 교수형), 감영과 우영이 6명이다.

현재 그 박해의 장소인 향옥 자리에는 교동 성당이 우영 위에는 중동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8. 우금티에서 스러진 후천개벽의 꿈. 언젠가 공주대간 산행을 하다가 ‘웅치’라는 명칭을 알게 돼서 그 명칭의 유래를 파헤치다보니 동학혁명과 관련이 되 있더군. 그렇게 여기저기 흩어진 이야기를 모아 글을 쓴 적이 있다. 저자가 그 때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미리 이책을 접했다면 그리 고생은 않았을 텐데.) 그들은 왜 싸웠는지, 전투에서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황해도 팔봉 동학 접주 김창수(김구 선생)가 마곡사에 숨어 지냈던 이야기도 함께 써 놓았더군.
9. 망국에 항거한 자결·의병 열사들 편에서는 우리지역에서 일제에 항거한 투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데 모아 놓았다.
10. 공주의 항일운동 지도자들. 공주 지역의 만세시위 공주보고와 영명학교 학생들의 동맹 휴학과 항일 비밀클럽 활동
11. 충남도청의 대전 이전. 최근 공주의 쇠락을 이끈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당시의 상황 –일본인의 도시 대전에 밀리고, 공주갑부 김갑순을 비롯한 큰손들의 투기로 공주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도청이 식민도시 대전으로 옮겨가게 된다.


책 전체의 내용과 공주 출신의 인물들의 이야기도 훌륭하지만, 11개의 주요 꼭지만 따로 다뤄도 훌륭하고 흥미진진한 역사이야기 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들을 모아본다.
16 문주왕의 웅진 천도. 1.자연해자 역할 금강, 천혜의 요새 2.충청·전라지역을 안정적 통치하며 가역을 넓힐 지리적 중심 3.금강 뱃길로 서해로 중국, 왜국과 교역 4.토착세력과의 정치적 관계로 기반

17 무령왕의 배다른 동생 모대(동성왕)/ 부자 간 인줄 알았는데 동생이 먼저 왕위에 오름

22 가림성 백가. 동성왕이 위사좌평(경호실장격) 백가를 가림성-지금의 성흥산성, 서해로부터 금강 수로를 거쳐 내륙으로 들어오는 요지- 성주로 좌천/ 자객을 보내 왕을 시해하고 무령왕을 세움/ 무령왕 백가 응징

41 대통사. 기록 상 백제의 가장 오랜 사찰로 사비시대 사찰의 원형

55 향덕. 우리나라 최초로 효행으로 국가 표창 받은 인물 –이례적 큰 포상, 옛 백제지역 위무(불행한 사람이나 수고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어루만지어서 달램) 또는 교화 목적 보임/ 허벅지 핏물 –혈흔천

72 백제시대 4혈사: 공주시내 남혈사와 서혈사, 의당면 동혈사, 주미동 주미사

100 효자 이복. 충남역사박물관 앞길 부근 국고개 지명 유래

107 공주 관향 성씨: 공주(공산) 이씨, 공주 김씨, 공산 안씨, 공산 정씨, 공주 박씨, 공주 모씨

124 공주 의당면 월곡리 태생 김종서의 죽음 –정상적인 통치질서의 붕괴 신호탄, 태종이 힘겹게 세운 기틀을 스스로 부수고, 공신들을 법 위에 올려 그들의 천국으로 변하고 훈구파 형성하게 됨

128 세조에 대한 역사의 비판 1.폐륜 쿠데타 2.왕권을 공신에게 내준 잘못 –훈구파, 태종이 피의 숙청을 해서 법 아래로 끌어내린 공신들을 세조는 법 위로 올렸다.

128 김종서 “장군” 왜곡, 무반직은 48년 중 5년에 불과. 고려사, 고려사절요 편찬 세종실록 완성. 그의 성품을 지칭한 것으로 봐야하나 어떤 의미에서 승자의 입장에서의 역사왜곡

154 기호학파 – 근기(경기)와 호서(충청)지역 기반으로 영남학파와 조선 후기 성리약 양대 산맥을 이뤘는데, 공주·논산·대전 등 금강 중상류 지역이 중심

159 충청우도(남도) 최초 건립된 충현서원

163 통일신라 5악 동 토함산, 서 계룡산, 남 지리산, 북 태백산, 중 팔공산
조선시대 3악 상 묘향산, 중 계룡산, 하 지리산 / 국가의 제사처 역할

211 330여 년 동안 충청도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기능
- 457~538 백제 왕도
- 통일신라 시기 중천주의 주도로 13개 군, 29개 현 통할
- 고려 태조23년 공주로 개칭, 성종 때 12목 중 하나로 충남지역 유일
- 조선 8도 확립 시 충청도 54 고을 중 4목(공주·홍주·충주·청주)/ 선조34년(1601) 충청감영

213 공주목사·공주판관 집무처 동헌자리 –중학동 도립의료원 일대, 公山衙門현판
도사都事(종5품) -부관찰사 역할, 충청감사가 목사역할 겸하면 판관判官(종4품)이 공주지방 행정을 실질적으로 담당

218 충청감영 이전 역사
1603 공산성에 처음 감영을 지어 근무
1604 공간 협소로 옛 관아터(제민천변)로 이전
1645 방어시설이 있는 공산성으로 이전
1653 교통이 불편해 제민천 옆으로 이전
1707 침수가 잦아 봉황산 아래(현 사대부고 자리)로 이전
1932 충남도청을 대전군으로 이전
1603~1896까지 관찰사 341명 평균 10개월 정도

221 1607부터 공주목사 허균/ 무성산 일대 홍길동 행정과 설화를 수집하고 줄거리 구상 개연성 크다

223 공주 십경

241 한산소 –한태동의 묘가 있는 곳

251 임진왜란은 문화 약탈 전쟁의 양상, 도자기 산업 번성 하며 생활용기가 목기에서 도기로 바뀌게 됨, 반면 조선 도자기 기술 인력 명맥 끊어지고 산업기반 붕괴

255 도쿠가와 막부 말기 최강 프러시아와 맞먹는 군사력 대부분이 아리타 도자기 판매에서 나왔다는 분석

265 광해군이 왕세자 시절 임란 때 공주에서 3개월 가까이 머뭄. 그에 대한 설화나 유적 등은 전해지지 않음. 반정으로 오른 인조가 즉위하고 광해군의 일화도 인조의 것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270 류형 노량해전 이순신 전사하자 끝까지 전투를 지휘해서 승리를 가져옴

292 윤휴 “경전의 오묘한 뜻을 주자만이 알고 우리는 모른단 말인가?...” 숙종, 환국을 통한 왕권유지

308 김인겸 한글 가사 ‘일동장유가’ 일본으로 통신사.
1624년 사행의 부사 강홍중, 포로 쇄환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를 –붙잡혀 온 사람들은 수년 동안 재산이 늘고 생활이 편해져 돌아갈 마음이 없어졌다. 크고 작은 노역은 백성을 동원하지 않고 모두 고용한다. 노임 또한 충분해... 아리타와 같은 도공들처럼 제대로 존중받고 정착할 수 있었다면, 귀국하려는 의지는 그리 강하지 않았을 것이다.

378 동학군이 패배한 이유
1. 화력면에서...
일본군 사거리 수백 미터 개틀린 기관총과 스나이더 소총. 1초에 한 발씩 발사
농민군은 대부분 활과 창으로 무장, 화승총은 발사에 30초, 사거리도 1/10에 불과. 개틀린 기관총은 분당 600발
2. 전술의 잘못. 공주는 공격하기보다 지키기 쉬운 곳으로, 전면전 보다는 주력군을 분산하거나 유격활동을 했어야 했다.

393 1904년 일제가 철도를 부설할 때, 그 노선이 연기군 종촌 초려 이유태의 묘소를 침범하자 유림이 중앙정부를 상대를 항의 활동을 벌임. 철도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나중에 철도가 공주를 지나지 않게 된 것이 유림 탓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1901년 착공해 1905년 개통된 경부선 철도가 공주를 비껴 천안-조치원-대전으로 난 것은, 일제가 대륙 진출을 쉽게 하려고 직선로를 택한 것이다. 잔인무도한 일을 다반사로 하던 일제가 침략정책의 첨병인 철도를 놓는 일에 조선 유림의 말대로 결정할 리 없었다.
또한 1911년 경성에서 목포까지 호남선 부설 시 조치원-공주를 거쳐 강경으로 가는 노선을 정했다. 하지만 결국 대전 분기점이 생겼다. 금강에 철교를 놓아야하는 데 시간과 비용이 들고, 대전에 식민도시를 새로 개척한 일본인들의 집요한 로비 결과였다.

423 1918년 충청도의 신흥 부호 전 공주군수 김갑순이 중동 제민천변 저습지를 매립해 만든 사설 시장
1937년 중동시장이 포화상태가 되자 산성동 일대 습지를 메워 공영으로 개발한 것이 현재

425 1922년 설립된 공립 공주고등보통학교, 조선인이 들어갈 수 있는 충청도 최초의 인문계 중등학교. 5년제, 2학급으로 인가 받아 학생 110명으로 개교

443 1990년대까지 수 십 년 동안 일제가 지어준 ‘산성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방치되었던 공산성

468 박동진. 판소리 다섯 바탕을 속속 완창
1969 명동 예술극장에서 판소리 ‘춘향가’를 8시간 동안 날 달걀 2개만 먹고 쉬지 않고 부름
1970년 ‘심청가’ 6시간, 1971년 ‘적벽가’ 7시간, 1972년 ‘수궁가’ 5시간.
‘흥보가’ 5시간, ‘춘향가’ 8시간 완창은 세계기네스북에 ‘한 자리에서 가장 오래 부른 노래’로 기록
이후 완창능력이 되느냐가 명창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고, 완창 공연은 현대 판소리의 대표적 공연 양식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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