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분주한 마음 틈으로 '제주'를 우겨 넣으니 참을 수 없는 평온이 몰려왔다
  • 비로서 허락한 소백산 비로봉 푸른 하늘과 초록 풀밭에 그리움까지 숨겨놓고 말았다
후니의 책가방

그리스 로마신화 1,2,3,4,5

by 여.울.목 2015. 11. 10.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1 2000/06/26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2 2002/02/07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3 2004/08/13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4 2007/10/15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5 2010/10/15

초판 발행일은 각기 다르지만 내가 산 이 한 질의 책은 지난해와 올해를 거쳐 인쇄된 책이다.
이윤기
㈜웅진씽크빅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책의 여는 말은 이윤기 작가님이 시작했고 막지막 5권의 맺음말은 그의 딸이 썼다. 이 「그리스 로마신화」 이야기책은 5권을 넘어 10권 이상을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작가님은 2010년 여름에 신화의 주인공들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책 속에서 자전거 타는 방법을 알려주었던 딸. 손을 놓아버렸는데도 어느덧 자신의 페달 밟는 힘으로 가고 있던 그 딸이 더 이어져야할 신화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어쩜 새로운 신화이야기의 시작일는지 모른다.



세상의 이치를 다 알았을 것 같은 저자로 느껴졌기에, 그에게 있어서 되돌아감이란 것이 어떻게 느껴졌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이 책을 읽을수록 자꾸 생각나는 책이 있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노자와 21세기」라는 책이다.
그저 그러할 따름이다... 그도 처음 신학을 전공했으니 희랍 신화도 섭렵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야기를 풀어내는 곳곳의 매무새가 비슷한 점이 많다.
아마 사람이라는 본성이 근본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출발했다. Hell조선이니 N포 세대니 하는 말이 흔하게 오르내리는 이 시대의 고달픈 사람들이 왜 사는지에 대한 궁극적 물음에 스스로 인문학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읽고 나면서부터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 있기에...
그래서 서양문명의 근원인 그리스 로마신화를 읽어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 욕심에 책 한 질을 샀건만, 당체 처음 첫 장을 넘길 용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그리스 시대의 신과 로마의 신이 거의 같다는데 그 명칭이 다르다니 책을 꼼꼼히 읽어가면서 그 내력을 적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는 책을 읽었다는 표를 내려면 단어의 어원이라든지 숨겨진 특별한 이야기와 지명, 신들의 가족력을 그려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이런 생각에 차마 묵직한 이 책들의 첫 페이지는 마치 신들의 몫 인양 느껴졌을 뿐이다.




::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 ::
첫 장을 넘긴다.
자전거를 이야기한다. 신화라는 이름의 자전거 타기를 배운다네. 넘어지지 않도록 페달을 밟으란다. 상상의 날개 짓을 하라고 한다.
신약성서의 처음처럼 누가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의~ 그런 말을 기다렸건만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라는 테마를 가지고 난데없이 여기저기를 쿡쿡 찔러댄다.
신발과 같은 징표, 신화시대의 혼돈, 음탕하기까지 한 사랑이야기...
이야기 토막마다 재미있기는 하다만, 시대의 순서를 가늠하기 어렵거니와 가끔 12가지의 주제에 그 토막이야기가 그닥 맞아 들어가지 않거니와 미화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알몸을 보여주는 것 같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인간의 모양새를 보이는 신들이 참 낯설기만 했다.




:: 사랑의 테마로 읽는 12가지 열쇠 ::

그렇게 화장기 없는 맨 낯을 보게 하고는 본격적으로 사랑이야기를 한다.
까마득한 옛날 사랑의 모습을 풀어놓는다. 도덕과 윤리라는 것이 자리 잡기 전의 신화 속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아니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겠지. 지금을 사는 사람들에게서 아직도 꿈틀거리는 그 욕망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떠한 금기도 없다. 어떠한 윤리적 잣대로도 재단되지 않는다. 이제 ‘사랑’의 코드로 인간 안에 흐르는 천 가지 만 가지 마을을 들여다보자.”
길고 긴 시간 속에서 다듬어 온 것과 대체 얼마나 다른가?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사람은 이 피할수 없는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대신 끈질긴 심리적 저항을 시도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저희들 삶을 이상화해서, 영생불사하는 신들을 상정하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신화는 바로 이 영생불사하는 신들과 때가 되면 죽어야 할 팔자를 타고나는 사람들 이야기, 그리고 신들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신인(神人, heros)들 이야기다.”
들의 생태는 평화적이지 않다. 적자생존의 무자비한 전쟁터다. 그래서 신화의 신들이 웃는 웃음은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란다.
도올 선생의 「노자」에도 그런 말이 나온다. 자연은 그러할 뿐이라고. 자연에는 따사로운 햇살과 맑은 물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적자생존의 생태계와 태풍이나 가뭄 등의 무자비한 재해도 자연의 일부다. 그게 자연이라고 한다.

신화는 상징이란다. 반쪽이란다. 두 통으로 작성된 계약서란다.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사랑, 사랑해선 안 될 사람, 도마뱀, 동성애로 내몰린 사포... 구체적으로 꺼내고 싶지 않은 인간의 반쪽을 신화를 통해서 볼 수 있게 한다. 어릴 적 재미있게만 보았던 만화영화 중 오이디푸스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 모험 속에서 스스로 강해지는 주인공을 보면서 얼마나 즐거워했던가. 학창시절 그 오이디푸스에 대한 비윤리적(?)인 이면을 처음 드게 되었을 때 내 머릿속은 얼마나 뒤죽박죽이었던가? 대체 뭘 상징한다는 거지?
오이디푸스의 기구한 여정은 신들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프로이드는 오이디푸스의 대리 체험으로 어머니에 대한 성적 충동과 아버지에 대한 무의식적인 질투의 감정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정신 신경증 환자만 제외하고...) 무의식 중에 자기와 동성인 아버지를 미워하고 이성인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려는 남성의 복잡한 마음의 상태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한다네. 2권 161쪽
그 상대어로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바로, 무의식 중에 동성인 어머니를 미워하고 이성인 아버지의 사랑을 구하려는 여성의 복잡한 마음 상태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엘락트라 이야기

괜히 읽기 시작했나? 카오스... ㅋ

이윤기는 이러한 혼돈 속에서 나름의 코스모스를 길어 올릴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창조적 신화 읽기’라고 부른다. 이런 혼돈은 어릴수록 좋다고 한다네. 내 수준으로 말한다면 프로이트의 말을 조금 가져다 쓰면, 말 그대로 간접경험이자 예방주사다. 이걸 통해서 이런저런 것들에 흔들릴 수도 있지만 흐트러지거나 쓰러지지 않는 중용을 지켜갈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열쇠 ::
5권의 책 중에서 가장 많은 밑줄을 그은 것 같다. 신들의 마음을 열려는 선생의 의도에 잘 맞물려가서 그런가?
비로소 신과 인간에 대한 대화를 엿볼 수 있다.
들어가는 말에서 작가 이윤기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있었다. 그가 신을 생각하는 관점인 것이라고 보여 진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다. 나는 절에 가서도 절을 하지 않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지 않는다.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서도 나는 꿇어앉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원칙이 하나 있다. 종교의 마당을 밟고 들어가는 것은 특정한 ‘사람들의 꿈이 서린 곳’을 밟는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극히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꿈이 서린 곳’은 아니지만 ‘그들의 꿈이 서린 곳’인 만큼 나는 되도록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조심하려고 한다.”
나에게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소중한 것이다.
더불어 그는 그 신화시대 사람들에게도 예의를 갖추고 싶어한다.

“올륌포스 신들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하지만 그 신들은 당대를 살던 사람들의 보편적인 꿈과 진실이었다. 그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합의해서 도출해낸 보편적인 꿈과 진실이기도 했다.”

세 번째 책에서는 이렇게 신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을 중심으로 풀어가 보려고 한다. 인간이 없으면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 세상을 놓고 서로 차지하려고 싸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신화에도 꾀 많은 석가여래와 너그러운 미륵불이 인간 세상 소유권을 두고 시합을 한다. 결국 승리는 석가여래, 그래서 인간이 속임수를 쓴다네.

정리해보면, 신화를 읽는 이유는
1.그 시대의 보편적인 꿈과 진실 찾기 → 현대에도 그 근본은 변치않고 있다.
2.내 마음 속의 신전 찾기 → 내 시대에 사는 사람에 경건을 다하고, 마음을 여는 일이 신들의 마음을 여는 일,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일

인간의 신의 힘을 빌려 소원을 이루고 싶어 한다. 소원을 들려주되 단서가 붙지, 능력을 받되 오로지 외곬의 능력을 받지.
작가 이윤기가 소원에 대한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 이야기 끝에서 자신의 딸 이야기를 한다. 딸아이의 에세이의 이야기 골자는 다음과 같다.
-소원 한 가지만 말해라, 꼭 들어줄 테니.
-소원을 생각하다보니 행복하다고 느꼈던 내가 초라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나소원이 이루어 진다고해서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겠다.
-심술궂은 약속이군요 약속을 거두어가세요.

아~ 난 지금도 가끔 어디서 일확천금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 얼마는 어떻게 하고 얼마는 어떻게... 어린 나이에 그만한 현명함을 얻은 작가가 부럽다.
한편으론 그런 행복을 지킬 수 있는 그 아이의 행복도 부럽게 느껴지기도 하다마는, 잘 안다. 작가 이윤기가 뭘 말하고 싶은지.
그런데 참 세상 사는 게 그렇다. 웬 욕심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나말이다. 소박한 사람 같은데도 말여. 가끔 고단할 땐 자꾸 일확천금이 생각난다. 으이~ 속물. ㅎㅎㅎ


그리스 로마신화를 읽으면서 가장 맘에 드는 신!

프로메테우스!

인류는 근대를 맞으면서 프로메테우스 시대를 꽃피웠다가 디오뉘소스의 반격을 받았다. 이제 헤르메스 시대가 왔다. 현대는 헤르메스의 시대다. (중략) ‘이성’을 신의 은총으로 믿던 데카르트는 산업 사회를 열었다. 하지만 곧 니체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데카르트의 면제는 종말을 고했다. 이제 현대의 헤르메스, 빌 게이츠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외대 유재원 교수-

인간을 만든 프로메테우스, 추위와 어둠과 공포에 떠는 인간을 우해 회향나무 대롱에 불을 붙여 인간세계로 내려온다. 그 벌로 사슬에 묶이고 독수리가 간을 뜯어 먹는다. 신이기에 다시 돋아나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다음 날 다시 독수리가... 매일 반복된다. 헤르메스의 꼬임에도 프로메테우스는 의로운 일로 고통을 받는 편이 부정한 압제자와 야합하는 것 보다 달다고 말한다. 덕분에 인간은 황금시대를 누렸다.
결국 헤라클레스에 의해 독수리를 물리치고 풀려난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는 신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던 그가 이긴 것이다.




::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 ::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에 헤라클레스가 잠깐 등장한다. 인간을 위한 행동 때문에 고통스런 벌을 받고 있는 신을 도우러 나타난 헤라클레스는 정말 영웅 같았다.
과연 영웅답게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5권의 책 중에서 가장 두껍다.
하지만 내용은 실제 다르다. 헤라클레스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자신의 가족을 죽인 일, 죽음을 무릎서고 자신을 도운 자를 죽인 일...)을 뉘우치기 위해 12가지 과업을 하게 된다. 인간보다도 철딱서니 없는 행동도 한다. 결과적으로 그가 어려운 과업을 괴수를 하나씩 제거해 결과적으로는 인간을 이롭게 한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 시작이 개인적인 것에다 그 과정에서도 무고한 사람과 신들까지 피해를 보게 된다.
작가는 그런 과정을 하나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 신화시대 힘이 절대 권력이던 그 시절을 액면 그대로 말이다.
영화를 찍는다면 영웅을 위해서 그 업적과 위대한 발걸음 하나하나를 치켜세웠을 것이다. 너무나 인간적이다 못해 밉기까지 하다.
태어나 얼마 안 되어 자신을 헤치려는 뱀을 잡아 힘으로 제압한 뒤로, 장사 헤라클레스는 그의 완력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헤라클레스가 해 내야 할 과업은 가면 갈수록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난이도 높은 것들로 다가온다. 헤라여신의 눈 밖에 나서 험난한 삶을 사는 그에게 헤라여신의 황금사과를 따와 헤라여신에게 바치라는 과업이 주어진다.
신의 영역에 있는 황금사과를 얻기 위한 헤라클레스의 도움요청에 강의요정은 네레우스에게 떠넘겼고, 네레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떠넘겼으며 프로메테우스는 또 아틀라스에게 떠넘긴다. 이윤기는 말한다. “그는 어쩌면 혼자 두발로만 걷던 시대가 가고 있음을 얼핏 깨달았을는지도 모른다.”
종반으로 치 닫으면서 헤라클레스는 조금씩 무언가를 느껴가는 것 같다. 정신없이 웃다가 갑자기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그려본다.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는 그 웃음과 울음, 그 전에 그가 보인 이상야릇한 극과 극의 행동이며 삶과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시원스럽게 풀린 것으로 표현한다. 해탈의 지경? ㅎ

인생의 마지막지경까지 그는 땀을 흘려야 했다.
노자의 ‘是以聖人終日行 不離輜重’ 성인은 종일 걸어 다녀도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않는다.

그냥 힘센 한 반신(半神)의 이야기로 가볍게 끝날 이야기는 마지막에서야 짠한 감동을 주며 신의 열반에 오르게 된 것에 조금이나마 수긍을 하게 한다.
질투에 사로잡힌 헤라클레스의 부인이 어떤 상황을 오해해서 그의 마음을 돌리게 하려고 넷소스가 건넨 것이 무슨 일을 불러올지도 모른 채 헤라클레스의 예복에 마법의 피에 젖은 옷자락 조각을 꿰매어 넣는다.
그가 죽인 휘드라의 독이 돌고 돌아 그에게 온 것이다.
‘칼리니코스(빛나는 승리자)’로 불린 것을 부끄러워하라. 무엇에 승리했던가? 나 자산에게 승리해본 적이 있던가?
‘알렉시카코스(백성의 보호자)’로 불린 것을 부끄러워하라. 언제 백성을 보호했던가? 괴물을 처단한 것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헤라 여신이 내게 부여한 운명의 과업을 수행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과업을 수행하고 보낸 세월, 나는 무엇을 했던가? 나는 승리했던가? 나는 백성을 보호했던가?
 「그 때 장자를 보았다」에서 언급되었던 <프로스의 승리>가 갑자기 떠오른다. 이겼지만 이긴 것이 맞냐?
비로서 헤라클레스는 고난의 육신을 벗고 신의 반열에 오른다네.




::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 ::
아마도 작가님은 이렇게 테마를 정해서 계속 이야기를 엮어나가시려고 했나보다.
마지막 책은 이야기가 계속 이어질 것 같은데 급히 마무리 된 느낌이다.
책을 여는 말은 이윤기가, 닫는 말은 그의 딸이 한다.

책 이야기보다는 작가 이윤기의 들어가는 말이 정말 좋다.
황금모피를 찾아 떠나는 아르고 원정대, 이아손과 헤라클레스를 포함한 당대의 영웅들.
두 거대한 바위섬이 박치기를 하는 무시무시한 쉼플레가데스를 지난다. 지금껏 신화시대의 어느 배도 이 쉼플레가데스를 무사히 지난 적이 없다. 하지만 아르고 원정대는 불가능할 것 같은 도전을 한다. 그리고 성공해서 금양모피를 찾아온다. 금양모피를 손에 넣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후로 더 이상 그리스 인들이 흑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책을 엮은 저자처럼 책을 읽는 우리에게도 두려움과 망설임을 이겨내고 흑해를 향해 배를 띄우라고 한다. 한 번 띄우고 나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단다. 금양모피는 바로 그 것이다.
“먼 길을 가자면 높은 산도 넘고 깊은 물도 건너야 한다. 먼 바다를 항해하자면 풍랑도 만나고 암초도 만난다. 이 장애물들이 바로 개인의 흑해, 개인의 쉼플레가데스다.”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보람이 이 한 구절에 있다. “개인의 쉼플레가데스” 코엘료이의 소설 「연금술사」에서처럼 그것은 먼 곳에 있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내 쉼플레가데스를 지나야 한다.

바위가 더 이상 서로 부딪치지 않는다는 것은 , 흑해가 더 이상은 미지의 바다가 아니게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182쪽 삽화 캡션>




 



영웅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


 

영웅은 머물지 않는다고 한다. ‘성인은 종일 걸어 다녀도 짐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노자의 말처럼...
이처럼 영웅들의 삶도 보통의 인간처럼 녹녹치 않다. 신들도 오늘날의 신들처럼 온화하거나 자비롭고 사랑스럽기만 하지 않다. 마치 겉은 멋진 신사나 숙녀지만 어김없이 여리고 이기적인 인간의 내면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이렇게 이야기와 그림을 보면서 스스로 ‘토담토담’하고 싶어서 신화를 찾는가보다.


작가 이윤기의 스스로 이야기도 참 재밌다.

그렇게 자기가 사는 이야기를 하거나 그리스 로마신화에 가지를 쳐서 동양의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인도의 신화이야기와 비교도 한다. 문명의 통로가 있었기 때문인지, 그런 신들의 삶이 배어 있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거기서거기여서 그랬는지 닮은 구석이 꽤 있군.

여느 때처럼 책에 밑줄을 긋고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힘겹게 책장을 넘겼지만, 누구의 아들이 누구의 ***이며 그리스의 신이 로마에서는 ...으로 불리였고, 어떤 신이 무엇을 관장했는지...
이런 것들은 억지로 외우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책장이 한결 가볍게 느껴진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있는 그대로 느끼기 위해서다.


비록 아직 써야할 이야기가 더 많은 더 읽고 싶지만 작가의 운명으로 미완의 책이지만, 작가 이윤기가 의도했던 것처럼 - 부끄럽고 조심스럽지만 - 난 신화를 이해하기 위한 두발자전거의 페달을 혼자 힘껏 밟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건 나와 그리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예의로 대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후니의 책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자가 되는 정리의 힘  (0) 2016.04.27
프루프: 술의 과학  (0) 2016.04.13
입으로 숨쉬지 마라  (1) 2015.07.16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0) 2015.06.29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0) 2015.05.28